김상진
Kim Sang-jin / 金尙鎭 / 1905  ~ 
본명
이평 (Lee Pyeong)
대표분야
감독, 미술
활동년대
19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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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노래조선 (김상진, 1936)
방아타령 (김상진, 1931)
종소리 (김상진, 1929)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김상진은 1925년 <쌍옥루>에서 자막을 담당하며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이후 조선키네마사의 <풍운아> 촬영에 관여한 것 같은데 정확한 역할은 확인되지 않는다. <풍운아>가 끝난 이후 김상진은 남궁운, 주인규와 함께 조선키네마사에서 탈퇴하였다. 이후 극동키네마의 제2회 작품 <낙원을 찾는 무리들>에 참여하여 역시 자막을 담당하였다(이영일3; 동아일보a; 조선일보a). ‘명타이틀맨’이라 불리던 김상진의 감독 데뷔는 1929년 금강키네마가 제작한 <종소리>라는 작품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영화에는 이원용, 김연실, 이경선이 출연하였다. 계속해서 1931년에 <방아타령>을 감독하지만, 좋은 평을 얻지 못 했다고 한다.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1937년 OK레코드사가 제작한 <노래조선>의 감독을 맡긴 하지만, 감독 경력을 계속 이어가지는 못 했다(조선일보b; 한국영화감독사전). 해방 이후에는 중앙극장 극장주로 활동하였다. 한성극장협회가 이름을 바꾼 서울시극장협의회의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부자체납자로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동아일보b; 경향신문).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7년 2월 1일 5면.
동아일보b 1946년 11월 28일 2면.
조선일보a 1927년 4월 19일 석간 2면.
조선일보b 1929년 2월 12일 석간 3면.
경향신문 1950년 2월 7일 2면.
<<한국영화감독사전>>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유장산, 이경순, 이필우, 이창근>>3, 소도, 2003.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생년, 출생지 미상. 영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29년 이평 감독의 <종소리>를 각색하면서 부터였다. 감독 데뷔작은 1931년 신흥프로덕션 제 1회작으로 내놓은 <방아타령>이다. 박제행, 심영, 김소영이 출연한 이 영화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천주교도들이 수난받던 시절, 한양성 밖 옥정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리려던 젊은 남녀가 민란으로 말미암아 헤어진 후 40년 만에야 만나게 되는 기구한 삶의 역정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김규영은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이 영화는 조선 영화중에도 가장 떨어진 실패작이다. 내용 취택에 있어서는 말할 여지도 없거니와 조선 영화계의 경제적 불리를 번연히 알면서 대담하게 이조 연대를 배경한 시대극을 박으려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중략) 감독 김상진 군이 조선의 고대 풍속을 조금이라도 알고 메가폰을 들었는지 <방아타령>을 본 후에 한참 생각해 보았다. 컷팅의 혼란과 배우들에 대한 연출의 실수도 말할 수 없다."(조선영화평: 조선일보, 1932.10.6) 이후 알렉산더 듀마 원작, 나운규 번안 각샛 <암굴왕>(1932)을 활동사진 연쇄극으로 연출하고 5년 만에 O.K레코드 영화제작소가 제작한 <노래 조선>(1937)을 두 번째 감독작으로 내놓았다. 고복수, 이난영, 김해송 등 O.K레코드 전속가수 일행이 오사카에서 공연을 가졌을때 그 무대 실연 장면과 국내에서 촬영한 코믹 춘향전을 편집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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