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화
Kim Yeong-hwa / 金永華 / 1913  ~ 
대표분야
감독
데뷔작품
아내의 윤리 1941
활동년대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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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우르러라 창공(원제:仰げ大空) (김영화, 1943)
아내의 윤리 (김영화, 1941)

주요경력

1945년 재일본조선인연맹 문화부 영화반 조직

영화감독 구락부 조직

1948-1950년 공보처 공보국 초대 영화과장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3년 태어났으며 본적은 경상남도이다. 영화감독 이규환의 소개로 일본 신코시네마에서 연출수업을 받았다(친일인명사전). 1941년 <아내의 윤리>로 감독 데뷔하였다. 이듬해 김일해, 김신재, 문예봉 등이 출연한 군국주의 영화 <우르러라 창공>(1942)을 연출했다. 해방 후에는 1948년 단독정부 수립 당시 공보처 공보국 초대 영화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보안법위반혐의로 피검되었다는 기사가 전해지며(경향신문),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의 행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50년 5월 7일자 2면
김종원 외,『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1』, 민족문제연구소, 2009.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생년, 출생지 미상. 학력은 대학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근거로 '대학을 거쳐 동보에 입사. 카메라 앵글부터 시작한 영화 공부'라고 언급한 <예술영화>(1948-5월호) 프로필 기사를 들 수 있다. 그로부터 형님이라 호칭된 이규환(남기고 싶은 이야기:1979.12.7~)에 따르면 '나의 소개로 일본 신흥 키네마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데뷔'했다는 것. 이 대목은 동보에 입사했다는 앞의 기사 내용과 상치돼 확인이 필요하다. 대학시절 시를 쓰고 음악평에 손대고 회화에도 관심을 가진 그에게 예리하고 단도직입적이라는 이유로 면도칼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귀국 후 조선예흥사를 내 <처의 윤리>(1941)를 제작, 감독하면서 영화계에 들어섰다. 출판사에 나간다며 바의 여급으로 취직한다. 방종한 여자로 오해한 남편에게 시달리다 못한 아내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한강에 몸을 던진다. 김한,전택이,지경순 등이 출연한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이다. 두 번째 감독작은 일제 말기 관제 조선영화주식회사가 나웅,김일해등을 출연진으로 내세워 제작한 <우러르라 창공>(1943). 학생들에게 항공정신을 심어 줄 목적으로 모형 비행기를 이용하여 기술을 습득케 한다는 군국주의 어용영화이다. 타협과 간섭의 산물로 그의 개성과 본령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방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제작자 이철혁과 손잡고 <갈매기>(1948)를 감독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규환 감독의 천거로 초대 공보처 영화과 과장으로 취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일본 귀족의 딸과 결혼했으나 6.25때 납북, 그 후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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