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영
Kim Yu-yeong / 金幽影 / 1907  ~  1940
본명
김영득 (Kim Yeong-deuk)
대표분야
감독
데뷔작품
유랑 1928
활동년대
1920, 19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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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수선화 (김유영, 1940)
애련송(환무곡) (김유영, 1939)
화륜 (火輪) (김유영, 1931)
혼가 (김유영, 1929)
유랑 (김유영, 1928)

주요경력

1938년 이구영(李龜永), 이명우(李明雨), 김태진(金兌鎭), 안종화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개최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김유영의 감독 데뷔작은 1928년의 <유랑>이었다.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제작한 이 영화는 이종명(李鍾鳴)의 원작을 김영팔이 각색하였고, 임화와 조경희가 주연을 맡았다(조선일보a; 조선일보b). 같은 해, 임화, 추적양, 남궁운과 함께 서울키노를 조직한 김유영은 서울키노 제1회 작품인 <혼가>(1929)에서도 감독을 맡았다. <혼가>는 고향을 떠난 세 젊은이의 발자취를 통해 조선의 현실을 조망하려한 작품이었다. 임화가 이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으며, 손용진이 촬영하였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1930년 4월 김유영은 서광제, 김기진과 함께 서울키노를 부활시켰고, 감독부를 담당하였다. 서울키노는 조명희 원작의 <낙동강>을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중지하였다. 계획에 의하면 김유영이 감독을 맡는 것이었다. 결국 서울키노는 <낙동강>을 대신하여 <화륜>(1931)을 제작하였다. <화륜>의 시나리오는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 소속인 이효석, 안석영, 서광제과 김유영이 공동으로 쓴 것이었다. 김연실과 석금성이 출연한 이 영화에서 김유영은 감독을 맡았다(조선일보c; 조선일보d; 조선일보e).
<화륜>을 연출한 후 김유영은 영화 활동은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아마도 임화가 “<화륜>을 비판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반동영화를 비판하는 때보다도 일층 가혹 무자비한 것이 요구된다”며, 김유영을 공격한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조선일보f). 이 시기 김유영은 노동자 농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연극을 선택하였다. 1931년 김유영은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연극을 일반대중에게 보여주겠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이동식소형극장 결성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주로 공장과 농촌에 있는 노동자 농민을 상대로 공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이 극단의 고문은 강천희가 맡았는데, 김유영은 연출부에 소속되었다. 이동식소형극장의 상영목록에는 이효석의 <다난기 기록>, 석일량의 <작년>, 김영팔의 <부음>을 비롯하여, 김유영이 쓴 <하층소동>도 포함되어 있었다(동아일보c). 김유영을 “이론을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던 심훈의 말이 생각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심훈).
얼마 후에 김유영은 서광제와 함께 일본 교토에 있는 동활(東活)키네마에서 3년 동안 영화를 공부할 목적으로 1932년 5월 일본으로 떠났다. 김유영은 감독부에 서광제는 각본부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하였다(동아일보d). 그 후 한국에 돌아와서는 1934년 조직된 조선영화제작연구소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조선영화의 진실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진정한 예술영화 제작을 표방하였다(동아일보e). 그러나 1945년 발생한 진주 신건설사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여 간의 재판을 통해 1935년 12월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풀려나왔다(동아일보f; 동아일보g; 동아일보h).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김유영은 <애련송>(1939)을 통해 감독으로 복귀하였다. 최동금의 원작을 이효석이 각색한 <애련송>은 김유영의 복귀작이자, 첫 번째 발성영화였다. 녹음은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시스템을 빌려서 사용하였다. 이 영화의 대사는 유치진, 미술은 강성범, 음악은 홍난파가 참여하는 등 각계의 권위자가 참여한 것이 주목된다(동아일보i). 영화는 1938년 상반기에 개봉되었다. 이어서 김유영은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제3회 작품인 <수선화>(1940)의 감독을 맡아 감독으로서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 했다. <수선화>를 촬영하는 도중 김유영은 원래 가지고 있던 신장염의 상태가 악화되어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병원으로 옮겨진지 보름 여 만인 1940년 1월 4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김유영은 결국 사망하였다. 그의 유작이 된 <수선화>는 해방 후 <정열>이라는 제목으로 1948년 6월 4일부터 수도극장에서 재상영된 바 있다(동아일보j; 동아일보k; 동아일보l; 동아일보m; 평화일보). 안석영은 김유영을 회고하며, “황색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그 긴 머리를 너풀거리며 거리를 것는 그 모습”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안석영).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28년 1월 22일 석간3면.
조선일보b 1928년 4월 1일 석간3면.
조선일보c 1930년 4월 28일 석간 3면.
조선일보d 1930년 6월 7일 석간 5면.
조선일보e 1930년 10월 8일 석간 5면.
조선일보f 1931년 3월 25일
동아일보a 1928년 6월 20일 3면.
동아일보b 1929년 1월 26일 8면.
동아일보c 1931년 11월 14일 4면
동아일보d 1932년 5월 15일 5면
동아일보e 1934년 5월 2일 3면.
동아일보f 1934년 8월 28일 2면.
동아일보g 1935년 1월 26일 2면.
동아일보h 1935년 12월 10일 2면.
동아일보i 1937년 10월 29일 5면.
동아일보j 1939년 11월 16일 5면.
동아일보k 1939년 12월 15일 5면.
동아일보l 1940년 1월 5일 1면.
동아일보m 1940년 4월 22일 1면.
평화일보 1948년 6월 5일, 하단 광고.
심훈,「朝鮮映畵人 언파레드」,『동광』제23호, 1931년 7월호.
안석영, <出色의 名監督들, -故 羅雲奎·沈薰·金幽影>, <<삼천리>> 제13권 제6호, 1941년 6월호.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 영득(榮得). 조선일보 1931년 1월 25일자 연재 기획물 ‘극계 영화계의 신구인의 면영(面影)’ 난에는 ‘서울키노의 감독 유영 김철(幽影·金哲)’로 소개되어 있어 예명·본명과 함께 김철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9월 22일 경북 선산군 고안면 호동(湖洞)에서 소지주인 선산 김씨 현묵(賢?)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 아홉 살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 졸업과 함께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 들어 갔으나 1년 만에 경성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 19세 되던 1925년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이때 소설 <꽃다운 청춘>을 숙부 김승묵이 발행하던 <<여명(黎明)>>지에 발표하여 일찍이 글재주를 인정 받았다. 카프(KAPF)의 논객 서광제 등과 함께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부를 나온 해인 1928년 데뷔작 <유랑(流浪)>을 선보이고, 잇따라 <혼가(昏街)>(1929) <화륜(火輪)>(1931) 등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예술 이념에 맞춘 영화를 내놓았다.
스물 두살 나이에 신문연재 영화소설을 원작으로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제작한 <유랑>(전 8권)은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집을 버리고 떠나는 상황 속에서 10여 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이 겪는 무력한 사랑과 절망감, 또다시 유랑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비애를 그렸다. <아리랑>(나운규 감독)에서 소박하게 그려졌던 농촌 모습이 구체적 현실로 표출되었다는 평을 듣긴 했으나, 청년이 사랑한 딸을 빚 대신 부호의 며느리로 보내줄 것을 강요받는 가난한 농민의 비애를 통해 계급의식의 타파를 불어 넣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서울키노의 제 1회작 <혼가>(일명·어지러운 거리)는 성공하고 돌아오겠다며 고향을 떠난 세 젊은이가 도시에서 겪는 고난, 곧 부상당해 해고된 노동자와 퇴학당한 고학생, 역마차의 화부의 삶을 빌어 일제치하 조선노동자 계급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것으로서, <유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인이며 경향파의 이론가인 임화가 주연을 맡았다. 그는 영화에 출연할 때에는 화목할 화(和)자 대신 빛날 화(華)자를 사용하였다.
당시 매일신보(1928년 6월 14일자)는 “손용진의 건전하고 정밀한 카메라 워크에는 일찍이 보지 못한 색다른 회화적 장면이 많다”고 하였으나 <<비판>>(1929년 3월호)에 실린 윤효봉(尹曉峰)의 영화시평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작품 전체에 흐르는 중심사상의 애매함, 통일성의 결여, 인물 성격의 불투명 등 세 가지를 원작이 지닌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서울키노 제 2회작인 <화륜>(전 10권)은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 소속 안석영·김유영·서광제·이효석이 중외일보에 발표한 연작(連作)으로 서광제·김유영이 각색한 것. 조선의 현실을 제재(題材)로 참담한 도시인의 생활과 노동쟁의를 그린 것이다. 철호라는 사나이가 사건의 희생자로서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사회에 나왔으나 아내는 어려운 생활을 견디다 못해 마음에도 없는 자에게 재가를 하고 고민 끝에 한강물을 향해 몸을 던지려 한다. 유서를 발견한 사나이는 아내가 찾아갔을 법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얼마 후 여자는 그에 의해 구출된다. 월북 예술인 안막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약사>에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영화’라는 말을 들었으나 앞의 두 영화에 출연한 바 있는 임화로부터는“<화륜>을 비판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반동영화를 비판하는 때보다도 일층 가혹 무자비한 것이 요구된다”는 지탄을 받아야 했다. 아울러 그는 “조선의 젊은 남녀는 붙어서 상해로만 가면 자유의 천지이고 만사는 해결인가”고 주인공의 현실도피적 행위를 꼬집는 한편, ‘이것은 소위 사회극 <화륜> 작자의 이데올로기의 불확실과 소부르주아적 반동성의 표현으로서 관중의 비속한 취미에 영합하려는 상업주의의 노골적 발로’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울키노 영화 <화륜>에 대한 비판/ 임화, 1931. 3. 25  ~ 4. 3, 조선일보)
김유영은 이에 앞서 일본 동경과 교토(京都)에 있는 영화촬영소를 방문(1929)하여 견문을 넓혔고, 뒷날 작가가 된 최정희와 결혼(1930)했다. <화륜>의 실패 이후 카프쪽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이와 상반된 순수문학 모임 9인회의 발기인으로 참여(1933)했으나 얼마 후 탈퇴하고 만다. 이듬해 8월 카프의 행동대를 조직. 혁명적 예술운동, 적색사상을 전파했다는 혐의로 동료들과 함께 전북 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했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다시 메가폰을 잡은 것은 <화륜>을 발표한지 7년 만인 1938년 발성영화인 <애련송(愛戀頌)>이었다. 신극운동 단체 극예술연구회 핵심회원인 서항석, 유치진, 이해랑 등이 대거 출연하여 화제를 모은 최금동의 동아일보 영화소설 현상모집 당선작 <환무곡>을 이효석이 각색한 것이었다. 바이올린 연주자인 젊은 음악학도(이백수)와 그를 좋아하는 여성(문예봉),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가난한 음악학도보다 여유가 있는 다른 청년(이웅)과 정략 결혼을 시키려 한다. 결국 애인의 유학 뒷바라지를 위해 부모의 뜻에 따르지만 잊지 못한다. 가난뱅이 음악학도는 실의에 빠져 타락했으나, 친구의 설득으로 귀국 음악회를 갖게 된다. 애인은 객석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눈물 흘린다. 지금까지 추구해 온 경향파적 영화와는 성격을 달리한 통속극이었다. 뒤이어 나온 <수선화>(1944)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탈이데올로기 영화였다. 극도의 가난과 폭음으로 이어진 정신적 방황과 신장염으로 인한 육체적 탈진 상태에서 수레에 실려 나와 어렵게 찍은 이 영화는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문예봉)가 주위의 모함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타계급과의 관계에 있어서 헤게모니 지도 및 영합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그 무기가 아니면 안될 것'(금후 <푸로>영화운동의 기본 방침은 이렇게:동아일보 1931,3.26~4.17)이라고 주장했던 초기의 그의 작품 성향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슬하에 아들 하나를 남긴 채 1939년 11월 25일 서른 세 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병명은 신장염이었다.(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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