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Kim Jeong-suk / 金靜淑 / 1906  ~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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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금강한 (나운규, 1931)
화륜 (火輪) (김유영, 1931)
남편은 경비대로 (도전장, 1931)
연애광상곡 (김영환, 1931)
젊은이의 노래 (김영환, 1930)
지지마라 순이야 (남궁운, 1930)
약혼 (김영환, 1929)
먼동이 틀 때 (심훈, 1927)
운명 (전해운, 1927)
풍운아 (나운규, 1926)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부산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연극계에 들어갔지만, 눌변이라서 무성영화를 찍고 있던 영화계로 진출하였다. 김정숙이 사투리가 심했다고도 하고, 발음이 좋지 못했다고도 전해진다. 윤백남프로덕션에 들어가서 1925년 <심청전>과 <개척자>에 연속으로 출연하면서 배우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심청전>에서는 곱단이 역을 맡았으며, <개척자>에서는 주인공인 김성순 역을 맡아 인기를 얻었다. 김정숙이 당대의 스타로 확고히 자리를 잡은 것은 1926년 <장한몽>에서 심순애 역을 맡은 이후였다. <장한몽>에서 김정숙은 주삼손, 정기탁 등의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였다. 이후 김정숙은 <먼동이 틀 때>(1927), <젊은이의 노래>(1930), <금강한>, <화륜>(1931) 등 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여배우가 부족한 조선영화계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고 평가되었다(동아일보a; 조선일보a; 동아일보c; 동아일보d; 심훈). 1927년 조선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운명>에 김정숙이 출연한 과정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러시아에서 영화공부를 하다가 돌아온 이만화를 여주인공으로 <운명>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촬영 도중에 이만화가 장폐색으로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영화사에서는 김정숙을 대역으로 초빙하여 영화를 다시 촬영하였던 것이다(조선일보b; 동아일보b). 그리고 1930년에는 남궁운, 김창선, 김형용 등이 조직한 이동영화제작단에 참여하여 <지지마라 순이야>에 출연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였다(조선일보c). 하지만 1931년에 출연한 영화들을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김정숙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얼굴에 “애수의 빛이 늘 어리어” 있던 김정숙은 생계문제 때문에 결국 카페 여급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남아 있기도 하다(초사; 조선일보d). 그녀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설만이 분분할 뿐이다.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6년 2월 28일 5면.
동아일보b 1927년 11월 11일 3면.
동아일보c 1931년 7월 25일 5면.
동아일보d 1931년 8월 5일 4면.
조선일보a 1926년 5월 14일 석간3면.
조선일보b 1927년 11월 11일 석간3면.
조선일보c 1930년 3월 16일 석간5면.
조선일보d 1933년 5월 28일 석간3면.
심훈,「朝鮮映畵人 언파레드」,『동광』제23호, 1931년 7월호.
草士,「銀幕에서 사라진 화형배우」,『삼천리』 제8권 제6호, 1936년 6월호.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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