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Kim Yeong-hwan / 金永煥 / 1898  ~  1936
대표분야
감독, 시나리오
데뷔작품
장화홍련전 1924
활동년대
19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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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탄식의 소조 (김영환, 1934)
연애광상곡 (김영환, 1931)
젊은이의 노래 (김영환, 1930)
약혼 (김영환, 1929)
삼걸인(세동무) (김영환, 1928)
장화홍련전 (김영환, 1924)

기타정보

기타이름
Kim Seo-jeong, 金曙汀, 김서정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898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김영환은 휘문의숙을 졸업하자 당시 신흥예술인 영화에 깊이 빠졌고, 1924년 단성사의 영화해설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실제로 영화를 천직으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무렵 단성사가 촬영부를 두고 첫 작품으로 <장화홍련전>(1924)를 제작하게 되자 각색과 해설을 맡았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한국영화감독사전). 이어서 단성사 촬영부와 연결된 금강키네마에서는 제1회 작품으로 이구영 감독의 <낙화유수>(1927)를 제작하였다(조선일보a). 김영환은 <낙화유수>의 원작과 각색을 담당하였다(조선일보b). 1928년에는 금강키네마와 서광키네마의 합동작품인 <삼걸인(세동무)>의 원작과 각색은 물론이고 감독을 맡았다. 이 작품에는 이원용, 이재현, 추청운, 복혜숙 등이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검열 때문에 제목을 <삼걸인>에서 <세동무>로 바꿔야 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b). 이외에도 팔봉 김기진 원작의 <약혼>과 <젊은이의 노래>의 각색과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동아일보c).
김영환은 영화만이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무성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신아리랑>을 편작하였으며, <세동무>의 주제가와 <낙화유수>의 주제가인 <강남달>을 작사, 작곡하기도 하였다(최창호). 1929년에는 콜롬비아축음기회사에서 음반 취입을 하기도 하였다. 음반 취입을 위해 김영환은 복혜숙, 임방울 등과 함께 콜롬비아축음기회사의 오사카 지점에 가기도 하였다(동아일보d). 뿐만 아니라 김영환은 변사로서도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26년에 나운규의 <풍운아>의 해설을 통해 명변사로 알려졌다고 한다(최창호). 다른 사람의 영화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화도 직접 해설을 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약혼>이 인천 애관에서 상연될 때, 김영환이 직접 해설을 하였다(동아일보c). 1931년 조선극장 영화부가 제작한 <연애광상곡>의 각본과 감독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1936년 38세의 한창 나이로 요절했다고 한다(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27년 8월 17일 석간5면.
조선일보b 1927년 10월 8일 석간 3면.
동아일보a 1928년 3월 3일 5면.
동아일보b 1928년 5월 8일 3면.
동아일보c 1929년 7월 21일 3면.
동아일보d 1929년 11월 9일 5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최창호 외.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한국문화사(영인), 200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예명은 서정. 1898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말도 있다. 영화 해설,각본,가요작사,작곡,연출 등 다재다능한 초창기 개척자의 한 사람이었으나 1936년 38세의 한창 나이로 요절했다. 휘문의숙(현 휘문중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당시 신흥예술인 영화에 깊이 빠졌고, 1924년 단성사의 영화해설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실제로 영화를 천직으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때 자신의 집에 관한 '숨은 내력'을 쓴 연극이 단성사 무대(전 4막 5장)에 올려져 크게 히트한 적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한 '숨은 내력'이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신분을 뜻한 것이었다. 이 무렵 단성사가 촬영부를 두고 첫 작품으로 <장화홍련전>(1924)를 제작하게 되자 각색과 해설을 맡았고, 1927년엔 금강 키네마의 <낙화유수>(이구영 감독)로 각본과 주제가 작사 및 작곡의 솜씨를 보여주었다. '강남 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구영 감독의 여동생인 이정숙이 불러 널리 알려졌다. 기생과 화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련을 그린 것으로 어머니의 숨은 내력과 관계가 있다. 1928년엔 서울 인사동에 있는 조선극장 변사로 자리를 옮겼고, 이 해에 <세 동무>를 각색, 감독하였다. <낙화유수>의 주인공이었던 이원용과 복혜숙을 그대로 기용한 이 영화는 세상엔 오직 냉대와 설움만이 있을 뿐이라는 다분히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다룬 정처없이 표류하는 세 명의 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원 제목은 <삼걸인>이었으나 검열과정에서 바뀌었다. 그는 잇따라 <약혼>(1929), <젊은이의 노래>(1930),<연애광상곡>(1931)을 감독하였다. 이중 <약혼>은 예명인 김서정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시대일보에 연재했던 김팔봉 원작으로 배에서 시작되어 기차 장면으로 끝난다. 당시 동아일보 시사평(양유성-1929.2.22)은 이 영화의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명국은 십 년 이래, 조선 지식청년의 전형이다. 상해유학이 인연되어 순자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완고하고 양반이며 지주계급인 명국의 부모는 순자와 사랑을 그 봉건 색안경으로 보고 절대 반대하였으며 순자의 부모는 기독교적 편견과 경제적 야욕에서 남녀의 사랑을 수긍치 않았다. 남녀는 할 수 없이 부모를 버리고 뛰쳐나와 경성 한 곳에서 비둘기 같이 살림을 시작하였으나 어떤 겨울날 임신중인 순자는 기한으로 병을 얻어 필경 죽고 만다. (중략) 그후 명국은 경성에 와서 주의 단체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하 생략) <젊은이의 노래>는 방종한 아내(김정숙)의 가출로 비관 끝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장님이 된 피아니스트(나웅)의 말로를 그렸으며, <연애광상곡>은 앞의 작품과 같이 나웅 김정숙 두 배우를 주역으로 내세워 윤창순이라는 작곡가의 반생을 엮어 내었다. 조선극장이 제작한 이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그런데 한때 카프계열 작품 <약혼>을 만든 바 있는 그가 <연애광상곡>을 만들던 1931년 박정현,나운규,이필우,이창용 등과 함께 카프카에 대항하는 영화 동호인회를 조직하여 상반된 일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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