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근
Jeon Chang-keun / 全昌根
출생·사망
1907 ~ 1972
대표분야
시나리오, 배우, 감독
활동년대
1930, 1940, 1950, 1960, 1970

필모그래피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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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
애정삼백년 (윤봉춘, 1963)   
운명의 골짜기 (전창근, 1962)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전창근, 1959)   
낙동강 (전창근, 1952)   
파시 (최인규, 1949)   
푸른 언덕 (유동일, 1949)   
여인 (전창근, 1948)   
그 얼굴 (전창근, 1948)   
불멸의 밀사 (서정규, 1947)   
민족의 새벽 (이규환, 1947)   

주요경력

1941년 극단 고협(高協) 연출가
1943년 극단 태양(太陽)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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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07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국제영화). 1925년 윤백남(尹白南) 프로덕션에 입사해 배우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나, 곧이어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났다(친일인명사전). 무창대학(武昌大學)을 졸업하고 1929년 상하이 대중화백합영화사(大中華百合影片公司) 연기부에 입사했으며, 이어 고성영화사(孤星影片公司), 연화영행공사(聯華影行公司) 등에서 연기자로 활동했다(국제영화). 그중 1931년 고성영화사 제작으로 이경손(李慶孫)이 감독한 <양자강(楊子江)>에서는 주연으로 출연했을 뿐 아니라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각색까지 맡아 화제가 되었다(동아일보a).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여 이창용(李創用)의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에서 자신의 시나리오로 연출을 맡게 되었으며, 3년 3개월의 긴 제작기간과 일본, 조선, 만주 일대의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복지만리>(1941)를 완성했다(친일인명사전). 이후 해방 전까지 연극 활동에 주력했으며 고려영화협회의 극단 고협(高協)에서 <청춘무성(靑春茂盛)>(1941), <빙화(氷花)>(1942) 등을 연출했고, 극단 태양(太陽)에서 창립작 <그 전야(前夜)>(1943)의 기획을 맡기도 했다(매일신보a, b, c). 해방 후 다시 영화계로 복귀하여 1946년 최인규(崔寅奎)가 감독을 담당한 <자유만세>의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았다. 이듬해부터는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아 <해방된 내고향>, <민족의 성벽>(1947), <여인>, <그 얼굴>(1948) 등을 만들었고, 이규환 감독의 <민족의 새벽>(1947),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 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경상남도 공보과가 제작한 <낙동강>(1952)의 각본, 감독을 맡았으며, 전후 서울로 복귀한 후 공보처가 제작한 한미친선 전쟁영화 <불사조의 언덕>(1955)을 연출했다. 이후 <단종애사>, <마의 태자>(1956),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아아 백범 김구선생>(1960) 등 역사적 소재의 영화들을 감독하고 직접 출연했으며, 최초의 한홍합작 영화 <이국정원>(1957), 하와이 교포의 한국 방문담을 담은 <수정탑>(1958), 192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무대로 한 <차이나타운>(1963) 등 이국적인 배경과 소재의 작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차이나타운> 이후로는 1960년대 말까지 주로 배우활동에 전념했으며, 1972년 12월 지병인 고혈압으로 별세했다(경향신문). 영화배우 유계선(劉桂仙)의 남편이며, 두 사람의 딸 전향이(全香二) 역시 배우로 활동한 바 있다(동아일보b).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72년 12월 20일자 7면
동아일보a 1931년 5월 2일자 4면
동아일보b 1962년 5월 24일자 4면
매일신보a 1941년 8월 28일자 4면
매일신보b 1942년 10월 30일자 2면
매일신보c 1943년 8월 29일자 2면
韓國映畵人百人選, 『국제영화』제5권 제2호(1959년 1월 발행)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3』, 민족문제연구소, 2009, 408-410쪽.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07년 1월 18일 함경북도 회령 출생. 이 고장 출신으로 선배인 나운규와 윤봉춘이 있다. 서울에서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중동고보로 옮긴 후 19세 때인 1926년 상해로 건너갔으며, 이곳에서 무창대학 중국문학과 2년을 마쳤따. 임시정부가 운영하는 인성 학교에서 미술과 체육교사로 재직하며 영화활동을 모색하다가 22세 때인 1928년 이 학교의 교장인 몽양여운형의 소개로 상해에 있는 대중화백합영편공사에 입사, 안중근의 일대기를 담은 <애국혼>(정기탁)의 각본을 써서 중국 영화계에 등장했다. 그는 이에 앞서 이경손 감독의 <개척자>에 정기탁과 함께 출연한 경험이 있다. 중앙고보 2학년 때였다. 그뒤 <강쇠로 벼린 칼>(1928,정기탁),<양자강>(1931,이경손)등의 각본과 연기를 남기고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1937년, 12년간에 이르는 중국생활을 청산하게 된다. 그가 고국에 돌아와 본격적인 감독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복지만리>를 각본 감독. 각본-주연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아내가 된 유계선과 전옥 등이 공연한 이 영화는 일제의 통치를 피해 만주로 이민간 조선사람들이 겪는 이야기이다. 벌목작업을 하며 집단적으로 살아가는 이 마을에 작부가 들어와 멸시받고 구박 당하자 한 청년이 나서 같은 민족끼리 도우며 살자고 설득하고 스스로 그녀와 결혼한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 가운데 작부도 이민 집단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복지만리>는 배일사상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전창근에게 100일 간의 옥고를 치루게 만든 바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5년 동안 일체의 영화활동을 중단한 채 휴면 상태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친일어용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거북한 전철을 밟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영화적 해방은 1946년 <자유만세>의 각본 주연으로 시작되어 <해방된 내고향>,<민족의 성벽>(1947),<그 얼굴>(1948),<낙동강>(1952)등에서 개화되어 <불사조의 언덕>(1955),<단종애사>(1956),<이국정원>,<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8)등으로 절정을 이룬다. 그 대부분이 자신의 각본으로 이루어진 감독 작품들이다. 이 가운에 <해방된 내 고향>은 강제 징용됐던 청년이 고향으로 돌아와 농촌 개발에 앞장 선다는 내용이며 <그 얼굴>은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아내의 얼굴을 완성시킨 날 죽음을 맞게 되는 조각가의 이야기이다. <낙동강>은 낙동강변의 농촌으로 돌아온 청년이 여교사인 애인과 함께 무지한 마을 사람들을 일깨우며 살기좋은 고향을 만들어간다는 스토리이고, <불사조의 언덕>은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포로가 된 미군을 구출한 후 장렬한 최후를 마치는 국군의 활약상을 담았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남긴 해방 공간의 자취들은 계몽주의적 색채가 강한 편이다. 이는 일제가 남긴 건국 초기의 정신적인 공동현상, 무너진 통치 기반을 새로운 질서로 메워야 하는 시대상황에 따른 필연적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단종애서>,<이국정원>과 같은 대중의 기호에 맞춘 영화가 나온 것은 이채롭다. 황해남,엄앵란을 두 신인으로 기용한 <단종애사>는 어린 나이에 등극한 단종이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기까지의 비화를, 김진규,김삼화 주연의 <이국정원>은 홍콩을 무대로 한국의 작곡가와 현지의 미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해선 안될 금기의 사랑'을 였었다. 그뒤 <3.1 독립운동>(1959),<아!백범 김구선생>(1960),<차이나타운>(1963)등 주로 일제하에서 항일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을 소재로 영화화했다. 그의 지사적인 풍모,대륙적인 호방성은 선이 굵은 영화를 만들어 내는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감독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유만세>,<아!백범 김구선생>,<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순교자>(1965,유현목)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연기자로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일생동안 가족을 동원하여 만든 <운명의 골짜기)(1962)등 감독 16편과 <내가 낳은 검둥이>(1959)등 시나리오 20여 편을 남기고 1973년 1월 19일 지병인 고혈압으로 영면했다. 배우인 아내 유계선과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둘째 딸 향이 역시 1960년 초에 활약한 배우 출신이며 국회의원을 지낸 배우 이대엽은 그의 맏사위이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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