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
Cha Beom-seok / 車凡錫 / 1924  ~  2006
대표분야
시나리오
활동년대
1960, 1970,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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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
산불 (김기충, 1989)
화조 (김수용, 1978)
산불 (김수용, 1977)
그대 가슴에 다시한번 (김사겸, 1971)
돌아온 선창 (전조명, 1969)
장미의 성 (이봉래, 1968)
옥비녀 (강대진, 1967)
산불 (김수용, 1967)
처가살이 (이봉래, 1965)
밤안개 (정창화, 1964)

주요경력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로 가작 입선
1956년 제작극회 대표
1963년 9월~1983년 극단산하 대표
1964년 극단 산하 대표
1968~1975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1973~1978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1975년 한국극작가협회 회장
1984년 청주대 예술대 학장
1986년 88서울예술단 단장
1993년 서울시립극단 단장
1995년 예술원 부회장
1998~200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원장
1999년 경희대학교 정보문화원 객원교수
1999년 예술원 회장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2004년 1월~2006년 6월 광화문문화포럼 회장
MBC제작부장, MBC편성부국장
서울예전교수

기타정보

주요기타작품
■ TV
1980년 전원일기

■ 연극
1961년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
1962년 산불
1962년 태양을 향하여
1963년 여인천하
1964년 청기와 집
1965년 열대어
1968년 장미의 성
1969년 대리인
1970년 왕교수의 직업
1972년 환상여행
1974년 약산의 진달래
1977년 손탁호텔
1977년 화조

■ 희곡
1955년 밀주
저술내역
1961년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희곡집)
1969년 대리인(희곡집)
1975년 환상여행(희곡집)
1982년 학이여 사랑일레라(희곡집)
1984년 거부하는 몸짓으로 사랑했노라(회갑기념 수필집)
1987년 동시대의 연극의식
1992년 식민지의 아침(희곡집)
1993년 예술가의 삶
1994년 우리 한때는 별이 되었나
1994년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고희기념문집)
1998년 떠도는 산하(자서전)
1999년 산불
2000년 한국희곡론
2000년 때론 치열하게 때로는 나지막이
2000년 통곡의 땅(차범석 제7희곡집)
2003년 옥단어
2004년 한국 소극장 연극사
2005년 새야 새야 파랑새야 (외)
2007년 그리스 희곡의 이해
수상내역(기타)
■ 수상내역(연극)
197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80년 성옥문화예술상/
1981년 대한민국 연극제 희곡상/
198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 제8회 동랑연극상/
1987년 대한민국 문학상 일반부문 본상(식민지의 아침)/
1991년 대한민국문학상/
1993년 이해랑 연극상/
1996년 금호예술상/
1998년 서울시 문화상/
1998년 한림문학상/
2000년 삼성문학상/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차범석은 대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차범석은 광주고보 시절 《영화의 벗》이라는 일본 영화잡지를 모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 광주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2년간 일본에서 재수를 하였는데, 이 시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영화를 보면서 극작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23살이 되던 해인 1946년 8월, 연희전문학교 전문부 문과에 합격하면서 극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유치진의 희곡론 수업을 들으면서 사실주의적인 극작술에 대해 공부를 했다(한국현대연극).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密酒)」가 가작으로 입선되었고, 1956년 같은 신문에 희곡 「귀향」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는데(네이버), 이 과정에서 유치진의 도움이 컸다.
차범석이 극작가로 데뷔할 당시 많은 극작가들이 월북한 상황이었고, 남한에는 유치진, 오영진, 이광태, 김진수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등단 후 서울에 올라온 차범석은 덕성여고 국어교사로 일하면서 극단 제작극회를 창단하여 소극장 연극운동을 펼쳤다. 그는 제작극회를 통해 극작가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61년 차범석은 덕성여고 교사직을 사직하고 MBC 창립요원으로 방송극을 집필했다. 같은 해 국립극장으로부터 작품의뢰를 받아 그의 전후 대표작인 「산불」을 창작했다. 「산불」은 1962년 국립극장에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차범석은 사실주의 극작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산불」은 김수용 감독에 의해 1967년 영화화되었다.
「산불」, 「갈매기 떼」가 성공을 거두면서 동인제 방식이었던 제작극회를 탈퇴하고, 전문적인 연극단체 극단 산하(山河)를 1963년 창단하였다. 「장미의 성」은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이었는데 극단 산하에서 공연한 직후에 이봉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당시 인기 가수였던 남진이 주연을 맡았다.
차범석은 극단 산하 활동과 동시에 방송극도 꾸준히 집필하였는데, 1980년에는 1년간 인기드라마 「전원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차범석은 대중성이 강한 방송극 대본을 집필하면서 멜로드라마적인 성향으로 희곡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들은 관객몰이에 성공하면서 동시에 영화화되었다.
1983년 극단 산하는 52회 정기 공연을 끝으로 해체하였다. 이후 차범석은 청주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작품인 <산불>(1967), <산불>(1977), <화조>(1978)를 연출한 김수용 감독과 친분을 나누었다. 1989년 청주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서울예술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교수직에 있으면서도 「식민지의 아침」, 「저 하늘 북소리」 등의 작품을 집필하였다. 이후 한국문예진흥원장과 대한민국예술원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차범석은 한국 현대극의 거장으로 불리고 있다(한국현대연극).

* 참고문헌

한국연극협회, 『한국현대연극 100년』, 연극과 인간, 2009, 579~594쪽.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764514)

[작성: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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