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천
Kim Eung-chun / 金應天 / 1935  ~  2001
대표분야
감독
데뷔작품
영광의 침실 1959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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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김치국일병 (김응천, )
고행석의 불청객 굴뚝새편 (김응천, 1993)
밀월여행 (김응천, 1993)
따봉 깐돌이 (김응천, 1990)
못말려 우리반 (김응천, 1990)
젊은 날의 초상 (김응천, 1990)
담다디 (김응천, 1989)
그녀와의 마지막 춤을 (김응천, 1988)
얄숙이들의 개성시대 (김응천, 1987)
말괄량이 대행진 (김응천, 1986)

주요경력

1953년 경기중학교 졸업
1958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기타정보

주요 영화작품
영광의 침실(1959)
감나무골의 공서방(1960)
사장딸은올드미쓰(1962)
지미는슬프지않다(1963)
밤에걸려온전화,눈물의영도다리(1964)
청춘을변상하라(1965)
귀신잡는 해병(1966)
기분파아가씨(1967)
청춘대학(1968)
모르는여인의편지,푸른사과,여인의종착역(1969)
3인의검은표범(1970)
꼬마아씨(1971)
최고로멋진남자(1972)
부부교대,천사의메아리(1973)
설야,그대의찬손(각색),당신은나의태양(1974)
대학얄개(1982) 등
수상내역(영화)
<진아의 편지> - 1974년 대구 서라벌 예술제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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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김응천 - 감독 - 충무로 신사 김응천(金應天)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영원한 청춘 감독의 이미지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전혀 늙은 티를 내지 않고 젊음을 유지한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응천은 32년생이다. 그러니까 올해 70 고희인 셈이다. 그 유명한 경기(京畿)출신이다. 요 ... by.조문진(영화평론가) 2008-11-11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다녔으며, 1956년 연합신문의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던 중 아직 연출 수업을 받던 김묵 감독을 알게 되어, 시나리오 조수로 일하며 영화계에 입문한다(영화백과). 1959년 약관 24세의 나이에 <영광의 침실>로 연출 데뷔하는데, 이 영화는 전쟁 중 육체에 상처를 입은 남자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여자가 만나 고난을 이겨내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전후 정서를 다룬 멜로드라마이다. 이후 1960년대 초반에는 주로 <지미는 슬프지 않다>(1963), <눈물의 영도다리>(1965), <청춘을 변상하라>(1965) 등 멜로드라마를 주로 작업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로 청춘 영화에 천착하여 많은 청춘 영화들을 연출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김수용 감독이 김지헌 작가의 시나리오로 만든 '하이틴족의 생태를 그린 젊은 세대 이야기'(조선일보a) <사춘기여 안녕>(1962)의 원안을 작업했을 때부터 그 연속성을 지닌다 할 것이다. 하이틴과 청춘 영화 사이를 오가는 연출 작업은 <청춘대학>(1966), <푸른 사과>(1969), <여고졸업반>(1975), <푸른 교실>(1976), <고교 명랑교실>(1978), <우리들의 고교시대>(1978), <모모는 철부지>(1979), <대학얄개>(1982), <열아홉살의 가을>(1983), <87 맨발의 청춘>(1987) 등의 영화들이 있다. 이와 함께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어(김종원), 당대의 톱 싱어 30여명과 밴드를 동원해 만든(조선일보b) <청춘대학>(1966), 남진, 조영남, 트위스트 김 등을 출연, 삽입곡을 녹음하고, 신중현이 음악을 맡은 <푸른 사과>(1969) 등의 영화를 연출하기도 한다. 2001년 별세한다.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62년 11월 24일 8면
조선일보b 1966년 11월 20일 6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영화백과 편집위원회, 『영화백과』, 정치평론사, 1975, 165쪽

[작성: 황미요조]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5년 서울 출생. 경기고 출신에다 서울대 철학과 중퇴란 호화로운 학력의 소유자. 그는 작품 편수에 있어 김수용, 고영남, 임권택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작품을 남긴 감독이다. 작품 수가 많다는 게 반드시 재능과 맞아 떨어진다는 법은 없으나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데뷔작 <영광의 침실>(1959년) 당시 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대단히 빠른 데뷔였다. <영광의 침실>은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한 사나이와 역시 불행한 과거를 가진 한 여인이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갖은 고난 속에서도 사랑의 힘으로 아픈 상처들을 하나씩 극복하고 마침내는 행복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초창기의 멜로성과는 다르게 그는 차츰 중고생들을 상대로 한 하이틴물, 청춘물에 전문가가 된다.
<푸른 사과>(1969년) <진아의 편지>(1974년) <여고졸업반>(1975년) <청춘을 얘기합시다>(1976년) <첫 눈이 내릴 때>(1977년) <고교 우량아>(1977년) <우리들의 고교시대>(1978년) <모모는 철부지>(1979년) <달려라 풍선>(1980년) 등은 70년대 당시의 고교생들을 크게 열광시켰다.
그렇다고 그가 하이틴 영화만 만든 건 아니다. <지미는 슬프지 않다>(1963년) <목마위의 여자>(1979년) <여인의 종착역>(1970년) <낯선 곳에서 하룻 밤>(1980년) <밤마다 천국>(1984년) 등은 완전 성인 영화들이다.
그의 특기는 이른바 제작자를 배려하는 빨리 찍기, 필름 아껴쓰기, 초스피드의 촬영 진행은 제작자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흥행감독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지키게 했다.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영화 음악 작곡, 선곡을 마음대로 한 특이한 입장이었다.
그는 외로운 사내였다. 조실부모하고 형제도 없이 언제나 외톨이였다. 그가 하숙집을 전전하며 홀몸으로 유랑한 건 유명한 얘기다. 아동 김씨인 김감독은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서인지 넉넉한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남과 다투는 걸 아주 싫어했다. 그런 그가 마흔이 훨씬 넘어 부인 김정수 여사와 만나 결혼을 할 당시 충무로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축하해준 건 큰 화제였다.
당시 하이틴 영화의 트로이카는 김응천, 문여송, 석래명이었고 이들 셋이서 하이틴물을 분할 점령, 선의의 경쟁을 한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주 만나 작품 토론을 가지며 우의를 다짐했는데 <우리들의 고교시대>(1978년) 영화는 3인 트로이카 감독들이 공동 감독한 특별한 열매라고 하겠다.
원래가 점잖은 그가 한번 되게 화를 낸 일이 있었다. 고(故) 하길종 감독이 어느 잡지에다 김응천이 만든 하이틴 영화 <여고 졸업반>(1975년)을 “알캉 달캉 까불기만 하다가 만다”식으로 깔아 뭉겠는데 이에 화가 난 김응천이 하길종이 묵고 있던 스카라극장 뒤쪽 경화장여관으로 쳐들어 갔다. 편집용 가위를 들고 습격한 것이다. 하길종이 혼비백산,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친 얘기는 당시 충무로 화제였는데 모두 김응천의 편을 들어주었다. 당시 영화계 풍토는 동료가 동료를 까는 데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임파선암으로 고생할 때 부인 김정수 여사의 지극한 간병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감독협회 총회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부인> 상을 부인에게 수여하도록 한 건 아름다운 미담이었다. 200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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