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윤: 위대한 여성영화인, 짱구 엄마를 기억하며(계속)

2020-12-31 ~ 계속
이해윤: 위대한 여성영화인, 짱구 엄마를 기억하며(계속)
2020년 '제11회 도전! 나도 프로그래머' 우수상 수상작

의상 할머니, 짱구 엄마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해윤 의상 디자이너. 1955년 전창근 감독의 단종애사 속 의상 담당을 계기로 1996년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활동했고 해당 분야를 전문적으로 발전시킨 영화인이다. 당시 여성이 거의 없었던 영화계에서 분투하며 성춘향, 난중일기, 최후의 증인, 사의 찬미, 서편제 등 길이 남을 걸작들에 참여했다. 1980년에는 ‘영희회’ 라는 단체를 공동결성해 여성 영화인의 업계진출과 권익 보호에 힘쓰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행보는 남성이 드물었던 영화 의상업계에 아들 권유진이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어 모자가 함께 유리천장을 깬 셈이 됐고, 이는 한국 영화계가 좀 더 다양성을 가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이해윤이 올 가을에 향년 95세로 타계했다. 경악스러운 것은 어느 언론에서도 그녀의 타계를 보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영화사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탄생 102년째를 향하고 있지만, 발자취를 남긴 이 원로 영화인을 누구도 추모하지 않는 온당치 않은 현실은 여전하다. 그러니 관객으로서 미약하게나마 추모해 보고자 한다. 위에서 거론한 유명작들 대신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기획전으로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이해윤 디자이너의 참여작들로 말이다. 보존상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판권문제 때문일까. 아래 영화들은 전면복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 영화들이 더 좋은 화질과 음질로 공개되길 소망하는 의도도 있다. 이해윤 디자이너의 명복을. 동시에 그녀의 작업을 한층 더 깨끗하게 볼 수 있게 많은 영화들이 복원되기를.

by 홍준호(우수상 수상자)


상영작품
  • 01. 순교자 유현목, 1965
    순교자는 유현목 감독이 재미소설가 김은국의 소설을 영화화했다. 6.25 소재임에도 전쟁 장면이 거의 없고 종교 문제를 중심으로 평화를 위한 거짓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비중 있게 묻는 독특한 영화다. 이해윤의 의상은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인에게는 한복, 목사들을 학살했던 인민군은 인민복과 검은 정장, 한국군은 군복으로 일관하고 있어 흥미로운 관점을 갖게 만든다. 흑백 영상 속 돋보이는 의상으로 인해 각자가 믿는 바를 고수하는 이들의 모습이 소신에 국한되지 않고 어딘가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주는 것이다. 이런 의상 컨셉은 기독교 신자인 유현목 감독의 연출 아래 종교와 믿음, 이념에 대해 실존주의적 자세를 취했던 원작소설의 감성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 02. 나운규 일생 최무룡, 1966
    나운규 일생은 최민수의 아버지이기도 한 최무룡 배우가 직접 감독과 주연을 겸한 역작 전기물이다. 그가 연기한 나운규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요절한 명배우이자 명감독이며 걸작, 아리랑을 연출한 바 있다. 스스로 수명을 단축하며 영화혼을 불태웠던 예술인 나운규의 행보가 최무룡의 귀기 서린 연기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해윤의 의상은 이를 충실히 뒷받침한다. 반듯한 모습으로 가쿠란 교복을 입은 채 일제를 거슬리게 하며 등장한 나운규. 그는 결말에 이르러 야윈 얼굴에 흰색 한복 상의를 입고 레디 스타트를 외치다 옷을 쥐어뜯어 넝마주이처럼 만들고는 장렬히 쓰러진다. 이해윤의 의상은 엄혹한 시대에 영화 만들기를 숙명으로 삼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한 예술가의 비장함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 03.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임권택, 1984
    이해윤의 철학 중 하나는 '의상하는 사람은 영화의 성격이 어떤지, 어느 배역에게 옷을 입히는지, 시대적 배경이 어딘지 감독 못지않게 잘 알아야 한다' 였다. 임권택 감독의 과소평가된 이 걸작에서 그 철학이 잘 드러낸다. 역병이 퍼져 백성들이 죽어가는 조선을 배경으로 두 남녀가 왕의 원한을 사는 바람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왕의 원한과 집착이야말로 그들에게 큰 역병이지만 이는 극복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의상에도 니힐리즘이 깃들어 있다. 남자주인공이 입은 보랏빛 두루마기는 질병과 죽음, 우울을 상징하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선택된 색채처럼 보이고, 두 주인공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입고 있는 흰색 한복은 상복 그 자체다. 닥쳐올 수밖에 없는 죽음을 어찌 막겠느냐는 심리를 의상이 대신하고 있어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 04. 어우동 이장호, 1985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은 섹슈얼한 측면에서 주로 기억되는 영화다. 그러나 주연 이보희의 압도적 카리스마, 신분 차별과 남존여비 체제를 전복하는 설정을 활극적 재미로 풀어내는 연출력도 상당하다. 당시 감독은 '우리 것' 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여왔다. 그 결과 이해윤은 어느 때보다 고증에 신경 쓰며 충무로 사극영화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감독의 요구를 충족한다.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이화여대 유희경 교수, 단국대 의상박물관 석주선 관장의 도움을 받아 고증에 충실하고 천연염료로 구현한 아름다운 색감을 지닌 의상 수백벌을 만들었다. 동시에 당대에 보여줄 수 있는 모던한 해석까지 가미해 어우동의 옷을 단순하게 치장하는 용도로 국한하지 않는다. 요컨대 몸이 칼이나 마찬가지인 어우동에게 옷은 무기를 가리는 화려한 갑주, 혹은 칼집이다. 옷은 무기의 일부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 05. 내시 이두용, 1986
    내시는 비정상적인 조선 궁궐풍경을 그린 신상옥 감독의 동명 영화 리메이크작이다. 원작이 당대 영화검열의 한계까지 가보자는 듯 불처럼 뜨겁고 자극적이었던 반면, 이두용의 리메이크는 삼엄하고 차가운 80년대 5공화국의 공기가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감독 특유의 박력 넘치는 연출이 있음에도 콜드 느와르 같다. 인물별 개성이 강했던 원작과 달리 개인의 존재감 따위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던 무소불위의 권력이 더 부각 됐기 때문일지 모른다. 복식이 원작보다 가라앉은 톤이지만 왕과 총애받는 자들은 화려함이 유지되고 있어 좀 더 명확한 대비가 드러나 인상적이다.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이해윤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큰 수술을 받는 등, 생사를 오가는 위험 속에서 불굴의 투지로 만든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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