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영화]웃음을 잃은 시대 HISTORY 2: 1970~80년대 한국 코미디 영화

by.권은선(중부대학교 교수)
특집
HISTORY 2: 1970~80년대 한국 코미디 영화
한국영화사에서 1970년대와 80년대는 코미디 영화의 침체기라고 할 만하다. 이전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까지 태동기에 한국 코미디 영화가 보여준 활력을 1970년대는 이어받지 못했다. 1950년대 말 자본주의 이행기 시대의 홈드라마가 보여준 날카로운 생활 감각과 세태 풍자와 세밀한 풍속화,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 집중 생산된 ‘성(性) 전도(轉倒)’ 코미디의 순치된 도발성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갑순이들의 전성시대
1970년대 코미디 영화를 연 것은 60년대 말 ‘남자 시리즈’의 짝패라 할 만한 ‘갑순이 시리즈’다. 구봉서가 주연한 남자 시리즈가 식모나 미용사 같은 여성 직업군에 진출한 남자들의 이야기였다면, 1960년대 또순이 표상의 계보를 잇는 갑순이 시리즈는 역으로 지역에서 상경한 고아 여성이 도시에서 남성에게 할당된 직업(주로 택시 기사)을 얻어 성공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촌뜨기’ 혹은 ‘촌닭’인 여성이 도시에서 겪는 생활의 곤란함, 시골과 서울의 격차에서 오는 적응 지체 현상, 문화 충돌 등이 웃음을 유발하는 원천이었다.
남자 시리즈의 서사가 결국 위기에 빠진 남성성의 재승인과 복고주의적 귀향 등으로 귀착되는 반면, 자본주의의 세속적 가치에 충실한 ‘갑순이’와 ‘팔도 가시나이’는 성공해 도시에 정착한다. 이 영화들은 흔히 여성 주인공들이 영화 말미에 느닷없이 모범 기사 표창이나 간첩 소탕 공로 표창 등을 받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갑순이 시리즈가 당대의 상경 여성 인구의 조절 및 여성 시민·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포섭되었음을 가리킨다. 당시 상경 여성의 직업 경로가 식모-차장-공원의 배열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갑순이’는 상경 여성들을 위한 판타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1970년대를 전후한 성 전도, 혹은 성 역할 뒤틀기 코미디는 근대화 및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들, 즉 이주와 이농, 노동력, 젠더의 사회적 재배치를 둘러싼 힘들이 각축을 벌이고 협상하는 장이었다.

명랑한 자들은 웃지 않는다
이후 1970년대 내내 전반적으로 코미디 영화의 부진이 이어졌다. 1960년대를 대표한 이형표와 심우섭 감독 등이 지속적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제작 편수가 급격히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유의미한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970~80년대 내내 코미디 영화와 TV 코미디물 등을 둘러싸고 저속·저질 시비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 담론의 기저에는 ‘명랑 대 저속’이라는 이분법이 자리하고 있었다. ‘명랑’은 이미 1950년대부터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강하게 작동된 기표였다. 1950년대에 소설, 라디오 드라마, 영화 등의 문화적 형식을 통해 대중적인 의미망을 구축했던 명랑은 70년대 들어 국가의 규율 담론 속으로 나포된다. 폭력의 국가 독점에 더해 명랑의 국가 독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듯 명랑이 국가에 의해 전유될 때, 다시 말해 ‘맑고 티 없음’이 개개인에게 규율이자 초자아의 명령이 될 때, 명랑은 대중의 정서와 유리되어 뒤틀릴 수밖에 없다. 명랑이 강요될수록 반대급부로 ‘저속’의 크기도 커질 수밖에 없다.
명랑이 짊어진 사회·정치적 무게는 고스란히 코미디 장르로 전이됐다. 1960년대부터 만들어진 국책영화 ‘팔도강산 시리즈’와 하이틴물 ‘얄개 시리즈’는 유신의 엄혹한 검열 체계 내에서 건전하고 멸균된 명랑성을 구현했다.
이처럼 1970년대는 풍자가 불가능한 시대였다. 비상사태와 계엄령으로 점철된 시기에 공식적 담론과 대립하는 목소리를 낼 영화적 공간은 마련되지 않았다. 현실성에 뿌리내린 범속한 언어로, 무겁지 않으나 날카롭게 세태를 묘사하고 풍자할 수 있는 코미디 특유의 비판적 가능성은 차단됐다. 그리고 코미디언을 앞세워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모방하는 데 머물렀다.

풍자는 자학이 되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도 코미디 장르의 지체 혹은 침체 현상은 계속됐다. 장기 집권한 독재 정권은 무너졌지만 또 다른 군사정권이 나타났기 때문에, 코미디는 쉽사리 유의미한 전환점을 찾지 못했다. 1980년대 내내 코미디 장르는 주변부 장르로서 실핏줄 같은 제작 추세를 이어갔다. 1950년대 이후 코미디 영화 제작 편수가 가장 적었던 시기가 이때다. 연평균 10편 미만의 코미디 영화가 제작됐다.
그중 코미디 영화가 가장 많이 제작된 해는 1980년이다. 코미디언 이주일의 폭발적인 인기 덕분이었다.
그가 주연한 <평양맨발>(남기남, 1980)은 일종의 ‘만주 웨스턴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경성과 만주, 상해를 오가며 주인공의 인생 역정을 다루었다.
풍자의 웃음이 거세된 사회에서 풍자에 근본적으로 내포된 공격성이 외부의 대상을 찾지 못할 때, 그 에너지는 자아에게 돌아와 자학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이주일을 단박에 스타로 만든 유행어는 이 시대 그러한 자학 개그의 전형을 보여준다.
김수형과 심우섭, 남기남 감독 등은 당대의 유명 코미디언들을 앞세워 꾸준히 코미디 영화를 발표했지만 그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했다. 1979년에 심우섭이 만든 <아리송해>와 <아니벌써>처럼 유행가 제목을 단순 차용한 영화가 다수 제작된 데서 알 수 있듯, 졸속 제작의 관행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갈 곳을 찾지 못한 풍자의 공격성은 1980년대 코미디 영화들에서 공허한 웃음과 함께 흔히 엎치락뒤치락하며 따귀를 남발하는 과도한 폭력적 슬랩스틱의 형태로 드러났다.
1980년대 내내 영화 장르로서 코미디는 저조한 제작과 흥행, 궁핍한 내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코믹’의 요소는 그 시기 한국영화 전반에 퍼져 있었다. 특히 젊은 신진 인력의 영화 산업 진입과 맞물려 한국영화가 일정 정도의 질적 도약을 이룬 1980년대 중반 이후, 해학과 블랙 유머는 상당히 광범위하고 중요한 서사적·형식적 장치로 사용됐다.
다만 코미디라기보다는 사회성 드라마로 분류되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희극과 비극을 혼합한 이 영화들은 코미디의 주요 공식인 해피엔딩에서 이탈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정치적 함의는 많이 누락됐지만 <고래사냥>(배창호, 1984)은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이 보여준 애상적 코믹함의 여운을 담고 있다. 주인공들이 비극적 결말을 맞기는 하나 <칠수와 만수>(박광수, 1988), <성공시대>(장선우, 1988) 같은 영화들은 어두운 유머를 통해 비판적 가능성을 건져 올렸다.

코미디, 돌아오다
특히 이 시기 ‘코믹’과 관련해 <바보선언>(이장호, 1983)이 이룩한 성취는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현대적 소극(笑劇)인 <바보선언>은 전면적인 즉흥성을 도입해 당대의 엄혹한 검열 체계에 맞선다. ‘활동사진의 위기’를 외치며 고층 빌딩에서 투신자살하는 영화감독의 모습으로 ‘무책임하게’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활동사진 시대의 무성영화로 돌아간다.
<바보선언>은 비판적·풍자적 언어가 금지된 시대에 저항하듯, 최소한의 대사와 내레이션만으로 진행된다. 마치 전환 히스테리의 구조처럼, 밖으로 토해내지 못한 언어를 배우들의 몸과 제스처, 슬랩스틱이,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며 음악과 소음이 난무하는 과잉된 음향이 대신한다. 이처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이 소극적 세계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구현한다.
<바보선언>에서 연기, 대본, 음향, 촬영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사용된 즉흥성의 원칙은 당대 사회운동의 주된 문화 형식이었던 민중 연희 형식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장호 감독은 이를 통해 1980년대 민중담론을 영화에 적용했다. 이때 즉흥성의 원칙은 제도권의 검열 장치를 이탈해 자유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저항의 수단이 된다.
혁신적인 <바보선언> 이후 이 시기 진정한 코미디 영화는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8)과 함께 귀환한다. 당대 소수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을 뿐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던 <개그맨>은 한국영화에서 낯선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롱테이크와 딥포커스의 스타일 속에 한동안 한국 코미디 영화에서 사라졌던 참신한 위트와 개그를 영화의 자기반영성과 섞어놓았다. 또한 ‘상하이 박’, 만화, 남성과 남철남의 슬랩스틱, 이주일의 레퍼토리인 ‘수지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중문화 취향을 드러냈다.
<개그맨>은, 비록 절차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데 그쳤다고는 해도,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승리가 일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이규형, 1987) 같은 가벼운 코미디 영화에도 반영됐다. 이 영화는 1990년대에 폭발할 로맨틱 코미디를 예견하게 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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