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서 잠들거나 혹은 잠 못 들고 있을까 잠, 2023

by.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2023-12-29조회 1,747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일은 없다’. 가끔식 남의 집 가훈을 들으면 실소가 나올 때가 있다. 가훈이란 원래 성경의 한 구절 같아 실천하기 어렵고 이루지 못할 이상향 같은 것 아닌가. 그래서 영화 ‘잠’에서 둘이 함께를 강조하며 남편과의 분리를 극도로 경계하는 아내의 집착이 처음부터 매우 불안해 보였다. 급기야 남편에게 귀신이 씌였다는 무당의 한마디에 의해 불안은 공포로 급격하게 전환되는데. 그 말이 아랫집 할아버지의 말이든 혹은 남편의 속마음이든 둘이 함께라는 말은 이제 둘 이외의 것들은 모두 제거되어야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남편의 몽유병, 아내의 불면증
남편은 잠이 들고 아내는 그런 남자를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본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어쩐지 함께 잠드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밤이란 시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유한다. ‘둘이 함께라면’이라는 가훈의 전제는 영화 시작부터 어긋나있다. 한 공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밤 시간을 공유하던 부부에게 마침내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남편이 자다가 얼굴에 피가 나도록 뺨을 긁고, 잠든 상태에서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갑자기 거칠고 낯선 사람으로 돌변한다. 더없이 편안하고 안락해야 하는 둘만의 밤이 당장 해결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하지만 몽유병을 앓고 있는 남편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내가 밤새 함께 꾸었던 악몽으로 인해 그들의 신혼집은 불길하고 뒤숭숭한 꿈자리로 바뀐다.   

의사의 치료, 무당의 치유
악몽과도 같은 현실로부터 발생한 문제를 의사는 수면장애로 진단하고, 무당은 빙의라 점을 친다. 적극적인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데, 의학은 환자의 상태를 시각화된 그래프로 제시하고  무당은 부부 사이에 보이지 않은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고 점을 친다. 어쩐지 의학의 이성적 치료와 무속의 영적 치유라는 극단의 처방으로 인해 부부의 불면증과 몽유병 증세가 더욱 악화되는 것 같다. 이제 남편의 잠은 현실을 더 끔찍한 악몽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아내는 펄펄 끓는 솥에 토막난 아이가 들어있는 악몽에 시달린다. 이런 부부에게 의사는 잘 듣지도 않은 약을 처방하고, 무당은 집안 곳곳에 붙일 부적을 주며 굿이 최선의 방법이라 조언한다. 애초에 몽유병과 불면증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증상에 시달리는 부부에게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은 정신과 영혼을 다루는 정신의학과 무속 외에 달리 기댈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남편은 몽유병 완치 판정을 받지만, 이번엔 아내의 편집증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심각해진다. 아내는 이미 무속에 깊이 심취해 남편의 빙의를 확신한다.
 

남편의 연기(혹은 빙의), 아내의 프레젠테이션
이제 막 아이가 태어난 젊은 부부의 집은 방문마다 자물쇠가 걸려 있고, 냉장고는 한때 그들이 키우던 애완견이 죽어 있던 곳이다. 아기와 엄마는 욕조에서 문을 잠근 채 잠들고, 아이 아빠는 잠든 채 거실을 배회하다 아이 침대에 소변을 본다. 급기야 거실에서 귀신 쫓는 굿이 벌어지고, 온 집안이 부적으로 뒤덮인다. 그리고 기어이 일이 벌어지는데. 이때 남편이 아랫집 할아버지에게 빙의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여자가 남편에게 지금 그들의 가정이 처한 상황과 그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방법이 다름 아닌 프레젠테이션이다. 남편의 몽유병과 아내의 편집증으로 인해 고조된 긴장감이 이 부분에서 와르르 무너지며 당혹감을 안겨준다. 극도의 불면증과 불안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던 여자가 남편(에게 씌인 귀신)을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PT라니. 게다다 남편과 관객은 그 PT 속 사진 자료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 집에서 귀신을 쫓는 굿이 벌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왜 그처럼 중요한 굿 장면이 하필 PT속 사진 한 장으로 제시된 걸까. 생각해보니 앞서 냉장고에서 애완견이 발견되었을 때의 충격도 아내의 비명과 몸짓으로 전달했는데, 이번에도 남편의 몸에 귀신을 봉인하는 글귀를 세기고 무당이 굿을 하는 장면을 사진 한 장으로 갈음해버린다. 공포와 미스테리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가장 끔찍하고 강렬한 공포 이미지를 굳이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있을 터.

문득 아내가 남편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에서 어쩌면 우리는 가장 가까운 관계의 사람과도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설득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니 남편이 직장을 관두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남편의 재능을 추켜세우고 용기를 복돋는 말로 그의 중도 포기를 막는다. 본인의 수면장애가 가족의 안위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남편이 잠깐 방을 따로 얻어 나가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을 때 아내는 가훈을 이유로 단칼에 거절한다. 대기업 사원인 아내에게 중도 포기는 지독한 경쟁 속에서 자멸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른다. 또한 기업 시스템의 통상적인 보고 방식에 길들여져 있기에 위급한 상황에서 PT는 그녀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사적인 대화마저 그녀가 공적인 장에서 습득한 방식으로 이뤄진 장면으로의 전환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기이하게 와닿았다. 아내에게 ‘둘이 함께’는 어떤 상황에서도 실천하고자 했던 개인적 믿음에 가까운 말인데, 이 또한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이 아닐까.

남편 또한 아내의 광기에 가장 공적인 소통 방식으로 맞선다. 긴급한 순간에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학교와 현장에서 배우고 익혀왔던 연기를 응용하는 것이다. 어쩌면 여자의 말처럼 남편은 진짜 빙의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자기 정신으로 연기를 했든, 진짜 빙의된 상태였든, 그 또한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배우고 익힌 연기 혹은 타인이 일생에 걸쳐 사용해온 언어로 아내를 진정시키게 된다.
 

노인과 아파트
이 영화에서 부부의 아파트를 침범한 외부인은 아랫집 노인이었다. 물론 귀신일 수도 있고, 아내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 영화는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난해하게도) 부부의 불면증과 몽유병의 원인이 된 노인이 귀신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에 대해 끝내 밝히지 않는다. 다만 무당의 말 “개 짖는 소리 없이 애기 우는 소리 없이 둘이서만 살고 싶어”가 남편과 노인 중 누구의 속내를 대변하는 것인지 의미심장하다. 마지막에 남편의 빙의(혹은 연기)를 통해 어쩌면 노인은 그 아파트란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부부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노인의 딸은 아내를 볼 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혼을 권한다. 남편에게 노인은 조금 더 먼 미래일지도 모르며, 아내에게 노인의 딸은 조금 더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 전형적인 공통의 삶은 윗집의 후추와 아랫집의 앤드류를 통해 드러난다. 마치 복제한 것 같은 두 반려견을 통해 윗집과 아랫집이 바닥과 천장을 공유한 것을 넘어 실은 더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서로에게 타인이란 당장 베란다와 창문 밖의 가파른 벽과 같은데, 그 단단하고 차가운 벽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신경 쓰게 된다.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벽을 통과해온 소음과 베란다 창을 타고 올라온 담배연기, 화장실 천장의 누수를 통해 타인을 감지하게 된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감정선과 억측 또한 그로부터 생성된다. 단단하게 굳은 철근콘크리트 벽과 바닥으로 인해 우리는 보이지 않고 대화하기 어려운 타인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오해하며 망상한다.

영화에서 아랫집 노인은 살아서는 불쾌한 이웃이었고, 죽은 뒤에는 광기와 공포의 원인으로 내쫓아야만 하는 악귀가 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노인은 부부가 나눈 대화, 아내가 아랫집에서 발견한 흔적, 그리고 남편의 몸을 통해 빙의 혹은 연기되는 존재로 등장한다. 타인의 삶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일련의 과정이 어딘가 익숙하다. 지금 우리가 매끈하고 스마트한 콘크리트 박스 안에서 잘 알지 못하는 이웃을 규정하는 방식과 닮아 있어서다.
 

영화를 보다 몇 년 전에 한 어르신이 들려주신 태몽 이야기가 떠올랐다. 태몽이란 흔히 부모가 태어날 아이에 대해 꾸는 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노인들의 태몽은 이웃집에 살고 있던 어르신들이 꾸기도 했다. 한 아이의 탄생이 자기 부모와 가족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누군가에 의해 암시된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때 한 아이에게 이웃의 노인은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몽상가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화를 알고 있었음에도  영화 ‘잠’에서 무당의 한 마디에 남편의 몸에 빙의된 존재를 추적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아랫집 노인을 떠올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생각의 흐름이 소름끼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느꼈던 찝찝함과 다소 무서웠던 감정의 실체가 이와 같다. 인물들이 무심코 던진 말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내용과 결말을 유추하다 보면 어느새 그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영화를 보고나서 타인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혐오를(아내의 불안과 공포의 원인) 만든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초반에 부부의 가훈을 유독 강조해서 드러내는데, 이미 그 가훈의 ‘둘이 함께’는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곳에 둥지를 튼 부부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니까 부부가 된 두 사람에게 닥칠 숱한 문제 속에서도 오직 둘만 바라보고 살아남겠다는 다짐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미 두 사람은 함께 누워 각기 다른 잠을 자고 꿈을 꾸며 살고 있고, 이제 둘은 셋이 되었다. ‘셋이 함께’ 겪을 문제는 또 어떤 잠과 꿈을 불러올까. 아랫집 여자의 말처럼 그냥 다 놓고 헤어지면 그만인데 부부는 기어이 또 함께 살며 또 다른 악몽을 감내하게 되었다. 셋이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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