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밴시> 다정함의 역사 마틴 맥도나, 2022

by.김소희(영화평론가) 2022-12-28조회 5,109

순전히 당나귀 때문이다. 내가 다른 선택지들을 제치고 <이니셰린의 밴시>(마틴 맥도나, 2022)를 보게 된 이유 말이다. 물론 당나귀 때문이라면 <EO>(예지 스콜리모프스키, 2022)를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EO>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동물을 재현해온 관행을 넘어서 당나귀가 인간의 자리에 놓인 실사 영화라는 점에서 궁극의 동물 영화였다. <이니셰린의 밴시>와 비교해도 <EO> 쪽이 옳고 급진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당나귀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건 액션 배우나 로드무비 주인공이 당나귀로 대체된 모습은 아니었다. 고된 여정에 오른 캐릭터를 공동으로 연기한 당나귀 배우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평범한 가축으로 남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동물의 욕망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동물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든 그것이 명백히 인간의 욕망에 의한 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당근 메달을 우걱우걱 먹는 모습만은 귀여웠다. 

관계에 관한 몇 가지 가정

<이니셰린의 밴시>의 주인공인 두 친구 패드릭(콜린 패럴)과 콤(브렌던 글리슨)은 각각 당나귀와 개를 반려동물로 기른다. 반려동물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중요한 방점을 찍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는 패드릭과 콤이 친밀했던 시간을 굳이 재연하지 않는다. 도리어 내내 반목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관객은 늘 있는 일과처럼 친구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패드릭의 걸음걸이와 눈썹 양 끝을 최대한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인 패드릭의 순진무구한 표정에서 그의 진실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패드릭과 콤은 늘 붙어 다니며 교류하는 일상을 나눠왔으나 그렇게 이어오던 시간의 관성이 갑자기 중단된다. 펍의 주인은 홀로 나타난 패드릭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인물과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 일상적 관계를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게 된다. 반면 콤의 태도를 보면 두 사람이 절친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나아가 친구라고 하기에는 둘은 대조적이며, 무엇보다 콤이 패드릭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인다. (실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21살이다) 물론 나이를 뛰어넘어 교류하고 친구로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두 친구는 지금 서로 다른 시간 속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패드릭은 나이가 들지 않은 채 특정 시간에 멈춰있고, 콤은 시간의 순리대로 나이가 들어버렸다. 콤은 패드릭이 실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연기를 하면서 맞춰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그와의 교류를 끊기로 작정한다.

패드릭과 콤은 각각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축을 담당한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던 시간 속에서 여전히 헤매는 패드릭은 과거의 인간이고, 패드릭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새로운 관계로 뻗어나가는 콤은 미래의 인간이다. 두 사람의 부딪힘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맞붙은 채 벌이는 치열한 다툼과도 같다. 미래에서 온 콤은 말한다. 결국 역사에 기록되고 시간을 뛰어넘는 것은 모종의 위대함이라고. 모차르트를 비롯해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은 현재에도 후대에도 기억된다. 반면 두 친구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나눈 다정한 시간은 후대에 기억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미래의 시선에서 그것은 다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 반면 과거의 인간 패드릭은 인간적인 선의를 지키며 가족과 이웃에게 다정함을 베푼다. 경찰관인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는 소년 도미닉(베리 키오건)을 돕고, 동생 시오반(케리 콘돈)과 당나귀 제니를 아낀다. 그가 발휘한 다정함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미셸 공드리가 <이터널 선샤인>(2004)에서 전개한 이야기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특정 기억을 도려내는 것이 가능해진 상황을 그린다. 사랑에 실패한 인물은 연인과의 기억을 통째로 삭제하길 원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여정은 곧 기억을 소생하는 여정이 되어 과거의 시간을 긍정하게 만든다. 기억을 삭제하는 기술을 통해 <이니셰린의 밴시>를 관통하면, 콤만 기억을 삭제한 상황이라 말할 수 있다. <이터널 선샤인>의 인물은 실패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과거를 반복하기를 선택하지만,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콤은 두 사람의 우정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관계를 끝내려 한다. 이를 알지 못하는 패드릭은 교류의 중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패드릭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라는 가정도 어느 정도 말이 된다. 플로리안 젤러의 <더 파더>(2021)에서 치매 환자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시점을 체감하게 만든 것과 유사하게 <이니셰린의 밴시>는 거의 패드릭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패드릭은 기억 상실증에 걸려 콤과 절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계속 콤에게 다가간다. 이를 받아주던 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제까지 해오던 연극을 끝내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영화를 두고 이런저런 해석을 덧붙여보게 되는 건 콤의 갑작스런 절연은 패드릭에게도 관객에게도 납득하기 힘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이야기 

전쟁은 단지 바다 건너편에서 희미하게 비쳐오는 사건이 아니다. 패드릭과 콤의 절연 역시 전쟁이다. 각각이 기르는 반려동물은 전쟁의 정찰병이다. 콤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패드릭에게 콤은 만약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그 때마다 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를 망설임 없이 실행한다. 패드릭이 규칙을 어기고 술에 취해 말을 걸어온 다음 날 콤은 집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라 패드릭의 나무문을 향해 던지고는 말없이 떠난다. 잘린 손가락이 문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잘린 손가락은 광적인 자해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갈기는 총알처럼 여겨진다. 그 이후에도 패드릭은 무심결에 콤에게 말을 걸고 손가락은 가차 없이 잘리며 콤은 더 이상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두 친구의 절교가 초래한 가장 잔혹한 결과는 잘린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당나귀 제니가 죽음을 맞은 사건이다. 영화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죽음이 묘사될 때 이것이 주인공의 변화를 위한 도구이거나 하나의 상징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당나귀의 죽음이 패드릭을 각성하게 함에도 그것이 도구이거나 상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패드릭의 복수 방식에 있다. 패드릭은 더는 콤의 총알(손가락)을 외면하지 않고 콤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패드릭은 복수를 위해 콤의 반려견을 해치는 식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쓰지 않는다. 패드릭은 콤의 반려견이 주인을 구하려다 화마에 휩쓸리지 않도록 따로 보호해준다. 반려동물을 상실하는 슬픔을 똑같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은 거꾸로 반려동물에 대한 패드릭의 사랑을 드러낸다. 패드릭의 복수에는 그가 품어온 다정함이 최소한의 경계선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위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감정이다. 콤 역시 패드릭의 당나귀가 죽게 된 상황에 충격을 받으며 복수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두 친구가 사는 마을은 커다란 바다와 맞닿아 있고, 바다 건너 본토에는 장기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음악만이 아니라 전쟁도 있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지만, 전쟁 이후 평화라면 모를까 지속하는 평화는 보통 역사로 기록되거나 회자되지 않는다. 이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인간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는 것은 좋았던 순간보다는 누군가와 갈등하거나 괴로운 순간인 경우가 많다. 콤이 패드릭과 절연한 이유는 패드릭과의 지속하는 일상을 보존하기 위해서 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하고 두뇌 회로 하나가 잘린 것처럼 관계를 끊어내지 않는 한 일상은 여간해서는 각인되지 않는다.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 이야기의 세계에도 영향을 준다. 실제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의 소재가 평화보다는 충돌과 갈등이 많은 것도 전쟁의 역사가 이야기의 세계에 미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친구의 이야기는 영화화될만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으로 이끈다. <이니셰린의 밴시>의 세계는 켈리 레이카트의 <퍼스트 카우>(2019)가 서부극의 세계 속에서 나란히 죽음을 맞은 두 친구의 우정을 그려낸 것과 통한다. <퍼스트 카우>에서 주인공의 우정은 활극으로 기억된 세계 안에 새로운 리듬을 새긴다. <퍼스트 카우>가 보여준 것이 정공법이라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반어법을 쓴다. 영화에서 타인이 타인에게 혹은 타자에게 발휘한 선의가 무가치하다고 말할수록 어쩐지 선의와 일상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하여 바다를 마주한 채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기묘한 결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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