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의 신-신 극단>에 대한 몇 개의 코멘트 쓰촨의 신-신 극단, 2021

by.김영우(서울독립영화제 프로그래머) 2021-12-13조회 3,701

장소로서의 쓰촨/사천(四川)
<쓰촨의 신-신 극단>의 원어제목은 초마당회 椒麻堂会, 영어제목은 A New Old Play.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영문타이틀과 원어제목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 해보면, 초마(椒麻)는 산파와 파 따위를 버무려 만든 양념으로, 특유의 매운 맛으로 명성이 자자한 쓰촨 지역요리에서 주로 쓰이는 양념이다. 즉, 원제는 초마파티 정도의 뜻인데, 쓰촨지역을 대표하는 맵고 강렬한 초마맛으로 가득한 축제라는 뜻일게다. 제목대로, 쓰촨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역적 특색과 상징들이 곳곳에 담겨있다. 

나날이 새로워짐을 의미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명한 신-신 극단은 쓰촨 지역의 전통극인 천극을 공연하는 극단이다. 중국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극 형태들이 존재하는데,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북경을 중심으로 해서 발전해온 경극, 장쑤성의 곤극, 그리고 쓰촨을 대표하는 천극 등이 있다. 각기 다른 매력과 레퍼토리, 그리고 특징들이 있지만, 천극은 한 갈래인 가면극 변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변검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영화로는 중국 5세대 감독의 대부로 불렸던 우티엔밍(오천명)감독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연출한 <변검 The King of Masks>이 떠오르는데, 전통극에 등장하는 광대의 인생사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관통하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쓰촨의 신-신 극단> 역시 중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한 광대의 삶과 죽음 이후의 과정을 따라가는데, 시기적으로는 1920년대 국공합작부터, 항일전쟁,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과 대기근,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패왕별희>와 거의 동일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신화에는 인간의 몸에 소머리(牛頭)와 말얼굴(馬面)을 한 저승사자가 망자를 지하세계로 안내하는데, 이들은 중국 전통극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들이라고 한다. 우두와 마면은 지하세계에서 염라대왕이 보낸 관료로 등장해 이 영화의 시작을 여는 역할을 한다. 막 죽은 주인공 치우푸를 지하세계로 안내하는 역할과 함께, 영화 중간중간 사람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마다 주변에 나타나기도 한다. 우두와 마면이 찾아온 망자는 40년 넘게 신-신 극단에서 광대로 활동해온 치우푸. 공연을 통해 익숙하게 봐온 우두와 마면을 이내 알아본 치우푸는 두 저승사자와 함께 망자들이 모이는 고스트 시티를 향해 길을 떠난다. 그곳에는 모든 기억과 과거를 사라지게 만들 '망각의 수프'가 치우푸를 기다리고 있다.
 

수도호손산(樹倒猢猻散)-큰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은 흩어진다
1920년대, 중국 쓰촨성. 북방 군벌과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국공합작의 시기. 천극의 광팬이자 이발사였던 리우/포키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우연히 장군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그 공으로 고위간부로 승진한다. 그리고 평생 꿈꾸던 극단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름을 신-신 극단이라 짓는다. 새롭게 문을 연 극단은 단원들을 모집하는 오디션을 열고, 거기엔 무리들 사이로 몰래 숨어든 일곱살 난 치우푸도 있다. 치우푸는 천극 아티스트이던 아빠가 죽고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버려져 갈 곳이 없고, 작은 덩치로 인해 성인들 사이에서 끼니도 챙기기 힘든 상황. 하지만 아버지가 취했을 때 늘 부르던 노래 소절들을 계기로 극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그렇게 일곱 살의 나이에 운명처럼 광대의 인생을 시작한다. 중일 전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는 리우/포키와 함께 성장하던 치우푸와 신-신 극단은 국공 내전이라는 대혼란을 겪으며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움을 느낀다. 내전의 혼란에서 극단은 문을 닫게 되고, 치우푸는 아편에 빠져 들고, 극단의 스승들은 제 갈길을 찾아떠나고, 단원들은 모두 거리에서 노래로 구걸하는 신세가 된다. 큰 나무가 쓰러지면 나무 아래 원숭이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법. 이후 공산당의 승리와 함께 극단은 다시 문을 열게 되지만, 인민극장이란 간판을 달게 된 극장에서는 인민을 위한 예술과 공연을 강요받게 된다. 하지만 신-신 극단은 대약진 운동이 초래한 극한의 빈곤과 기아, 문화대혁명이 강요한 자아비판과 광기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나가고, 치우푸와 그의 가족도 극단과 함께 모진 인생을 살아낸다.
 

펠리니적인 세계, 조루즈 멜리에스, 그리고 무성영화의 아름다움
영화를 연출한 치우지옹지옹 QIU Jiongjiong은 화가, 비주얼 아티스트,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주목을 받아온 아티스트. <쓰촨의 신-신 극단>은 감독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프로젝트이기도 한데, 치우푸의 삶은 천극 아티스트로 활동했던 할아버지로부터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저예산과 독립적인 방식으로 제작되었고, 6개월에 걸쳐 쓰촨에 2개의 스튜디오를 만들고 모든 소품과 무대를 혼자서 제작하고 직접 무대 배경을 그렸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4개월에 걸쳐 그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는데, 수공업적인 제작방식으로 구현해낸 독창적이고 몽환적인 무대배경과 어우러지는 배우들의 유려하고 우아한 움직임들은 무성영화의 아름다음을 떠올리게 하고, 멜리에스의 세계와 제작방식을 상기시킨다.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환상과 기억, 그리고 이승과 저승이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는 세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인지 상상인지 확실하지 않은 이미지들의 향연. 만화가이자 마술사이기도 했던 멜리에스가 촬영스튜디오를 만들어 스크린으로 보여지는 모든 미장센을 통제하며 상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창조했듯이, 감독은 여러 겹으로 배치된 공연/연극적인 장치들을 통해 평면적인 공간을 입체적이고 깊이감 있는 영화적 공간으로 창조해낸다. 이미지와 상상력으로 재창조해낸 초월적이고 환영적인 세계. 

<쓰촨의 신-신 극단>은 20세기 천극을 대표하는 한 광대의 삶을 통해 시공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현실과 저승이 서로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는 세계를 구현해내고 있으며, 한 극단의 연대기를 통해 중국 역사의 한 챕터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역사의 소용돌이와 부침을 따라 부유하는 민중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중국 근현대사를 함께 횡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역사의 암흑기를 살아낸 한 광대의 이야기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다. 인생은 희노애락으로 구성되기 때문일거고, 재미와 유머를 강조하는 천극의 매력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광대의 삶을 살았던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가장 영화적인 방식의 헌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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