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과 <드라이브 마이 카>

by.남동철(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2021-12-01조회 2,054

1. 대사
“구로사와 기요시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감독이라면 에릭 로메르는 흉내를 내보고 싶은 감독이라고 할까? 영화를 구상할 때 대사를 많이 쓰는 식으로 하다 보니 이것이 나의 약점이라 생각했는데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서 이런 식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진행된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에서 하마구치 류스케는 자신의 영화와 에릭 로메르의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의 가장 특징이 대화 장면이 많고 대화 장면이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언급이다. 하마구치의 스타일을 각인시킨 <해피 아워>부터 <드라이브 마이 카>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대화 장면을 빼놓고 성립하기 어렵다. <우연과 상상>은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단편영화 셋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인데, 전체가 일종의 대화극으로 이뤄져 있다. 둘의 긴 대화를 어떻게 끌고 가는지, 그들의 말에 어떤 숨은 의미가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숨기면서 때론 진실을 때론 거짓말을 한다. 봉준호는 하마구치 영화의 대사가 “무언가를 설명하는 대신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하마구치 류스케도 에릭 로메르 영화에서 대사가 설명이 아니라 캐릭터를 보여주는 장치라는 점에 주목했다며 봉준호의 언급에 동의했다.

여기서 하마구치가 대화 장면을 만드는 방식에 관해서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대사의 양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우연과 상상>의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여자를 보자.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수줍게 고백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친구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하다 그 대상이 자신의 옛 남자친구임을 알게 되는 여자 사이에 작은 틈이 갈라진다. 이어 여자는 자신의 옛 남자친구를 찾아가 사라진 감정과 남아있는 감정 사이에 위험한 줄다리기를 한다. 대사들은 그들이 언제 어떻게 만났고 어쩌다 헤어졌는지 같은 명백한 정보를 주는 대신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지금 그들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이야기의 결말도 예상할 수 없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여인의 대화 역시 진실과 거짓이 밀고 당기는 가운데 현재 두 여인의 삶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다.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다는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둘의 대화는 오해를 정정하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쳐갔던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들의 삶이 마음에 만들어놓은 무늬들이고 대화는 그들의 쓸쓸함, 외로움, 허전함을 온전히 드러낸다. 말이 캐릭터를 성립시키는 사례는 <우연과 상상>의 두번째 에피소드에도 있다. 에로틱한 소설을 낭독하는 여자와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남자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폭발 직전까지 고양되지만 상상할 법한 성적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엔 그저 말이 있을 뿐이고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말의 강력함은 어떤 노출도 없이, 비견할 데 없이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형상화한다.
 

때로 하마구치의 대사는 사람의 폐부를 느닷없이 찌르고 들어오는 비수가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죽은 아내와 섹스를 했을 거라 의심하는 남자에게 어떤 말을 듣는 순간을 보자. 주인공 가후쿠는 섹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습관을 지녔던 아내가 자신에게만 들려줬다고 믿었던 이야기를 아내의 숨겨둔 애인에게 듣게 된다. 그것도 자신이 몰랐던 후속 이야기까지. 차 안에서 이뤄지는 이 대화 장면은 가후쿠에게 칼로 베이는 듯한 아픔을 준다. 영화가 가후쿠의 리액션 같은 것을 강조하지 않는데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후쿠가 아내의 외도를 눈 앞에서 목격했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비교가 안되는 충격이 대사를 통해 전해진다. 이것이 가후쿠가 그토록 대면하기 두려워해왔던 진실이다. 하마구치 영화의 대화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을 졸이는 이유는 인물의 내면에서 어떤 진실이 드러났다 사라지는 마법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이다. 때로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때로 요염한 모습으로 하마구치 영화의 매혹이 생겨나는 지점이다.

흔히 좋은 영화는 말로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을 ‘대사가 많은 영화는 좋지 않다’는 일반론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보다 간접적인 표현이 더 영화적이라는 통념과 달리 하마구치의 영화는 많은 대사가 오가는 대목에서 ‘영화적’이 된다. <우연과 상상>의 세 에피소드에서 디테일로 가득 찬 대화 장면 없이 인과 관계의 액션과 리액션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TV 드라마와 다를 게 없다. 에릭 로메르나 하마구치에겐 대사가 곧 영화다.
 

2. 연기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박유림, 진대연, 안휘태 등 한국 배우 몇 명이 출연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들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실제 영화를 준비하면서 <드라이브 마이 카>에 나오는 연기 연습 장면처럼 시나리오 읽은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출연 배우들이 모두 한 공간에 둘러앉아 대사를 읽어가는 것인데 영화에서처럼 감정을 빼고 읽다가 일정한 궤도에 돌입한 뒤에 감정을 넣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하마구치의 영화처럼 대사가 많은 작품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하마구치의 연기 연출론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연기를 어떻게 연출하는가에 관해 그가 쓴 책이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하마구치는 대사를 온전히 배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합쳐질 때 뭔가를 이뤄내는 순간이 도래한다. <해피 아워>에서 사람이나 사물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작업처럼 연기에도 그런 최선의 지점이 존재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공원 리허설 장면을 보자. 가후쿠는 물론 함께 연습을 했던 모든 배우들이 함께 ‘뭔가 달라진 연기’를 경험한다. 연기에 대한 가후쿠의 이론이 하마구치와 유사한 것이라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에 대한 영화, 연기에 관한 영화로도 읽힌다. 가후쿠의 이론은 현실의 사람들과 교감을 하면서 더 발전한다. 윤수가 자신의 아내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가후쿠는 윤수의 아내인 배우 윤아로부터 배우들한테도 칭찬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가후쿠도, 배우들도, 미사키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시작점이다. 공원 리허설 장면과 같은 마법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과 반복된 연습과 적절한 자극이 합쳐졌을 때 그런 순간이 온다. 심지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배우들 사이에도 진심 어린 교감이 이뤄진다.

영화에서 가후쿠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과 너무 가까워서 대면하기 두려워한다. 그가 연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사키와 함께 홋카이도까지 갔다 오는 것이다. 미사키가 갖고 있는 죄책감의 근원을 함께 발견함으로써 자신도 내면의 어두움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원작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리면 타인을 통해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과정인 것이다. 미사키를 통해 가후쿠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바냐 아저씨>와 정면 대결을 한다. 가후쿠의 여정은 연기와 현실이 하나가 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삶도 연기처럼 숙성의 시간을 지나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가 생기면 예상치 못한 어떤 순간에 기적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3. 비밀
<드라이브 마이 카>는 내내 외면하다 마침내 자신을 정면으로 들여보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배역에 도전하는 배우의 얘기이기도 하고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 남자가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얘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누가 가르쳐준다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엔 연습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마구치의 연기론은 어느 정도 삶에 적용해도 좋은 원칙이다. 대사를 연습하는 사람처럼 남의 대사를 듣고 정확한 타이밍에 자기 대사를 내뱉고, 처음엔 그냥 하던 것을 나중엔 감정을 넣어 하고 마침내 사람들 사이에 교감이 이뤄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 생겨난다. 여기엔 말할 준비 못지 않게 들을 준비가 됐는가가 중요하다. 상대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는 것. 하마구치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중심에 ‘관심’이라는 주제가 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알 수 없던 것들을 작은 관심을 가지면서 통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관심의 힘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의 마음을 여는 과정은 관심에 관한 감독의 생각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하마구치는 이처럼 삶의 비밀스런 양상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든다. <우연과 상상>에서 우연이 어떻게 우리 삶의 모습을 바꿔 놓는지 보여준 데 이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선 묻어놓은 과거, 억눌린 욕망, 피하고픈 죄책감 같은 것들이 삶에 새겨놓은 흔적들을 보여준다. 영화 속 대화를 통해 짐작하게 되는 비밀의 조각들, 수면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진실의 파편들이 어느 순간 거대한 벽화가 되어 두 눈을 사로잡는다. 하마구치가 그려내는 ‘마음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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