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키아코 아나 엘레나 테헤라, 2020

by.박인호(영화평론가) 2021-02-02조회 4,308
세발도 데 레온 스미스가 죽을 자리

<판키아코>(2020)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배우로 활동하던 파나마 태생의 아나 엘레나 테헤라가 만든 첫 장편영화다. 그는 인터뷰에서 <판키아코>를 배우로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연기하듯이 찍었다고 밝혔다. 이 말은 단순히 직업적으로 익힌 기량이나 연기하면서 배운 것의 응용에 관한 문제나 연기 연출의 방법론만은 아니다. 배우에게 감정은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길어올려지고 표현되지만, 배우의 육체를 통과하면서 추상적인 감정의 상태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표정과 제스처와 인상으로 변형되지 않는가. 아나 엘레나 테헤라는 세발도(세발도 데 레온 스미스)의 여행이라는 이야기와 세밀하면서도 풍부한 이미지와 구나 얄라 부족의 실제 기록이 뒤섞인 형식의 근간을 ‘변형’에서 찾은 것 같다. 이 영화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될 때 실험영화라고 스스로를 규정했지만 그보다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이라는 형식이 섞이고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실제의 삶과 꿈의 조각이 부지불식간에 찾아들고, 육체의 여정과 영혼의 여정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토착민과 이방인의 정체성 차이로 인해 변형되기를 거듭하는 픽션이라고 부르는 데 어울릴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다큐멘터리이고 또 어찌 보면 에세이영화의 모습도 보이지만 이 영화는 경계를 모호하게 흐리는 픽션이다. 

세발도는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난 후 67세가 된 지금까지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온 것 같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그리움과 우수와 노스탤지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가 고양이 밥을 주고 갈매기에게 생선을 던져주고 복권을 긁으며 맥주를 마시거나 주크박스에서 음악을 고르는 모습을 보자면, 그가 부재하는 대상에 대해 지니고 있는 짙은 회한을 느낄 수 있다. 그는 현재의 삶과 과거의 기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고, 구나 얄라 부족민이라는 정체성과 백인 사회의 이방인이라는 현재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며, 포르투갈어와 부족의 언어인 둘레가야語 사이에서 차라리 입을 다물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그가 낡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고향의 말을 들으며 비로소 유년 시절의 꿈을 꾸게 된다. 어둠 속에서 절구질하는 할머니의 얼굴, 골목을 달리는 아이(어린 세발도일 것이다)의 뒷모습, 아이의 환하고 천진한 웃음, 푸른 잎들이 떠 있는 욕조에 들어가 몸을 씻고 풀잎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모습이 이어진다. 풀벌레 소리와 욕조 물에 떠 있는 초록색 이파리와 물을 관통하는 햇살은 즉자적이어서 너무 생생하고, 어느 날의 정경은 풍요롭고 평화롭기만 하다. 하지만 불행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세발도가 술집에 앉아 맥주를 마실 때 웬 백인 남자가 다가와 페르난두 페소아의 “선원”의 내용을 읊어대고 사라진다. 어린 시절의 꿈(어쩌면 기억)과 고향에 갈 수 없는 자가 새롭게 만든 머릿속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세발도를 각성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 ‘사일라(구나 얄라 부족의 전설과 설화를 구술하고 전승하는 지도자로 부족민에게 조상의 말을 전달하고 해석한다)’이기도 한 페르난두 페르난데스가 세발도를 찾아와 “언젠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고 말하고 떠나면 파나마에서 카누를 타고 먼 바다를 향해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판키아코>의 1부에 해당된다. 
 
판키아코, 영화 스틸1

 2부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고향집과 교회를 둘러보고 아버지 무덤을 찾아가 술을 올리고 공동체의 각종 제의(장례식, 탄생식, 혁명 기념일)에 참여해서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나눠 마시고 마을을 행진하는 무리에 섞인 세발도를 보여준다. 감독은 영화 첫 장면에 자막으로 코기족의 창조설을 보여줬고, 이어 구나 얄라 부족에게 전해지는 ‘판키아코’ 설화를 보여준다. 아나 엘레나 테헤라는 고향을 떠난 세발도와 백인에게 태평양을 보여줌으로써 백인의 침략에 빌미를 준 판키아코가 비슷한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바다라는 거대한 ‘물’과 고향 땅, 부족민의 생활과 언어, 구전되는 설화와 전설, 조상들의 방식 즉 그의 뿌리를 찾는 것이 세발도와 판키아코가 (두 바다 사이를 떠돌)저주받은 운명을 짊어질 유일한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발도의 몸은 고향에 와 있으나 그의 영혼은 판키아코처럼 카리브해와 ’남쪽 바다‘(태평양) 사이를 떠돌고 있기에 “제 자리에 있지 않은 기억”을 찾아야 하며, “진정 머물고 싶은 곳”과 “눈 감고 싶은 곳”이 어딘지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판키아코>는 세발도가 물로 몸을 씻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의 육신이 준비하고 실행하며, 원망과 저주를 통과해야만 새롭게 열릴, 영혼의 정화 과정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페르난데스는 “약초가 우러난 물로 목욕을 하면 혼이 씻기고 (병이) 깨끗이 낫게 되고 (영혼을 되찾을)여행을 채비”하게 된다며 그의 여정을 위해 기도하고 노래한다. 이 영화에서 물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다양하게 포착된다. 포르투갈의 항구로부터 시작해 파나마의 햇살에 표면이 산란되는 물과 욕조에 찰랑거리는 물살, 바위를 휩쓸고 지나가는 파도의 포말, 산의 푸른빛을 담아낸 웅덩이의 거울처럼 빛나는 표면, 잔잔한 강의 수면은 세발도의 발길이 닿은 곳이자 구나 얄라 부족의 터전이다. 특히 자신의 모습을 강물에 비쳐보고 형제임을 알게 된 남자의 설화가 지시하는 것처럼 “영혼이 남아 있는” 수면은 망각으로부터 기억을 되살리고, 아픈 몸과 영혼을 낫게 만들며 마침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되찾아준다. 이때 카메라는 표면에 머물면서 프레임 전체를 물의 부드러운 흐름이나 힘차게 요동치는 운동으로 꽉 채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세발도의 목욕은 첫 장면의 목욕과 판이하게 다른 형상이다. 포르투갈에서 세발도는 샤워기에 몸을 적시는 정도지만, 이 장면에서의 물은 그의 영혼을 되돌리기 위한 제의이기 때문에 다양한 크기의 숏으로 분절되고 초록색 약초가 물살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 물은 욕조를 벗어나 바다로 향하듯 휩쓸려가는 물살을 만들며 흘러간다. 이 영화의 마지막 숏은 마침내 죽을 자리를 찾은 세발도의 데스마스크와 같은 얼굴이다. 그의 육체적 호흡이 끊어짐으로써 그의 영혼은 회복되고, 그가 죽음으로써 그의 영혼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판키아코, 영화 스틸2
   
<판키아코>는 파나마의 지리적 환경과 그 땅에서 자생하는 식물과 동물, 풀벌레와 산의 모습과 소리들로 채워진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파나마의 바다는 물론이거니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사각거리는 소리, 깊은 산 속에서 자라나는 다양한 약초의 모양새, 약초를 채집하고 보관하는 장면, 마른 잎사귀를 불태우는 장면도 <판키아코>라는 영화의 몸체를 구성하고 있다. 게다가 구나 얄라 부족 여인들의 화려한 전통의상과 주름진 얼굴들, 붉은색 머리 수건을 덮어쓴 채 울고 애도하는 모습, 어둠 속에서 모여들어 원형을 이루는 춤 동작, 독립된 영토권과 자치권을 획득한 1925년 혁명의 재현 장면 등은 감독이 인류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채집한 귀중한 기록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파마나의 토착민을 향한 감독의 관심은 자신이 이방인임을 자각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부족민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들의 몸짓과 감정을 토로하는 소리를 듣고 있어도 카메라가 절대로 토착민을 앞서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그들의 지척에 있되 그들의 제의를 방해하거나 요란한 관심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세발도의 과거는 슈퍼8 카메라와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되고 현재의 장면은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되어 기억과 과거와 영혼의 여정과 공동체의 제의를 각각 다른 질감과 색감, 화면비율로 포착하는 방식도 눈에 띈다. 과거는 흔들리고 유동적인 익명의 시선(조상의 영혼이거나 세발도의 영혼 같기도 하다.)이 바라보는 것 같고, 현재는 대개 고정된 프레이밍을 유지함으로써 감독의 시선을 부각시킨다. 아나 엘레나 테헤라는 이산으로 인한 부재와 고립, 잃어버린 정체성을 픽션의 형식에 담아내고 구나 얄라 부족의 제의와 풍습은 다큐멘터리의 태도로 접근한다. 세발도라는 개인의 여정은 판키아코의 이야기와 이어지고, 구나 얄라 공동체의 희로애락이 담긴 삶의 태피스트리가 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일화를 소개한다. 아나 엘레나 테헤라는 2017년에 인류학자이자 포르투갈 대학에서 ‘판키아코’ 전설과 연관된 연구를 하며 어시장 보조 일도 하고 있는 세발도 데 레온 스미스를 만났다. 그가 파나마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감독은 이미 썼던 시나리오를 폐기하고 그가 영혼의 여정을 떠나는 내용으로 바꾸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난생 처음 ‘세발도’라는 자신을 연기하게 된 세발도와 그의 실제 삶이 반영된 이야기와 이방인인 감독이 구나 얄라 공동체에 8주간 머물며 카메라에 담아낸 바다와 물살과 햇살과 식물과 사람들의 얼굴은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서로에게 스며듦으로써 새로운 형식이 출현하는 현장이되었다. <판키아코>는 생성과 변형의 기록이자 죽음과 탄생의 서사시이며 구나 얄라 사람들의 존엄성이 담긴 집단초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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