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90 조나 힐, 2018

by.남다은(영화평론가) 2020-01-14조회 6,332
미드 90 스틸

“우리가 왜 이 판자 쪼가리에 미치는지 알아요?” “fuck shit!”을 입에 달고 살아 그것이 별명이 되어버린 한 소년(영화 안에서 그의 별명은 ‘존나네’라고 번역되어 나온다.)이 스케이트보드를 응시하며 말한다. 공터에는 그와 같은 소년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고, 노숙자로 보이는 이들이 무료하게 햇볕을 쬐며 그 광경에 어우러진다. 나른한 오후의 장면이지만, 이곳은 법원 앞, 그러니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일이 금지된 제도와 규율의 장소다. 경찰들이 들이닥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평화는 이내 깨진다. 소년들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뿔뿔이 흩어지는데, 더러는 달아나는 데 성공하고 더러는 붙잡힌다. 신기한 건 이 대목이 불러일으키는 감흥이다. 강제적이고 다급한 도주의 순간이 어쩐지 유희의 리듬으로 충만하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소년들에게는 경찰에게 쫓기는 한바탕의 소동도 스릴 넘치는 놀이와 다름없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영화가 이 순간을 그렇게 찍었다. 영화는 내화면의 소란스러운 노이즈를 외화면의 경쾌한 음악으로 침묵시키고 아수라장이 된 공간 속 충돌들을 부드러운 운동으로 다시 표면화한다.   

<미드 90>(조나 힐, 2018)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장면들과 자주 마주한다. 이를테면 ‘땡볕’이라 불리는 스티비(서니 설직)가 가족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낙담한 장면에서 그가 줄곧 동경해온 레이(나 켈 스미스)는 자신과 친구들의 만만치 않은 가정사를 언급하며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둘은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양쪽으로 차들이 달리는 도로 중앙의 경계선 위를 스케이트보드에 올라선 두 소년이 화면 후경으로부터 전경 쪽으로 유영하듯 점차 가까워지다가 곧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감행하는 위태로운 행동이지만, 차들의 소음 대신 음악의 활기로 채워진 장면 안에서 두 소년의 움직임은 공간의 한계를 자체적인 리듬으로 유연하게 돌파한다. 그들이 도심의 텅 빈 공원에서 오직 스케이트보드 하나와 자신의 육체만으로 곳곳을 오르내리며 묘기를 부릴 때, 그것이 쇠락한 공간을 독창적으로 다시 감각하며 그곳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 장면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스케이트보드 위에 오른 소년들의 운동은 물론이고 <미드 90>이 그 순간을 ‘영화적으로’ 가공하는 방식은 섬세하게 아름답다. 도시의 보잘 것 없는 풍경들과 그곳에서 근근이 버티는 청춘들의 빈곤한 시간이 이 매끈한 움직임들로 인해 잠시나마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는 데 성공하며 빛날 기회를 갖게 된다. 물론 이 순간이 자아낸 감상이 실은 환상에 빚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이 장면들은 현실의 시간을 중지시키고 풍경의 얼룩과 충돌을 미학화한 결과물일 것이다. 대다수의 하위문화가 결국 체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저 체제 안에서의 또 다른 소비양식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스케이트보드의 운동성으로 유려하게 구축한 장면들은 적어도 ‘존나네’와 같은 청춘들이 “판자 쪼가리”에 거는 마음의 풍경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소년들이 법원 앞 공터에서 만난 어느 노숙자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거리에서 탈출하려고 노력 중이야. 이 거리가 나를 먹어버리기 전에.” 그는 거리로 내몰린 자신이 거리의 죽은 사물이 되어 더 이상 어떤 가능성도 없이 붙박인 채, 그곳의 가난과 폭력과 체념에 ‘먹히는’ 상태를 염려하고 있다. 그는 거리를 사는 주체가 아니라 그 거리에 잡아먹히는 대상이 될 위험을 감지한다. 그와 같은 맨몸의 노숙자들에게 이 거리는 오직 생존의 문제와 결부된다. 그러나 적어도 스케이트보드를 가진 소년들에게 이곳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절실한 문화와 취향의 공간이다.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육체가 (아마도 그 거리를 설비한 자들보다 더) 거리의 구조와 생리와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자연스레 터득하고 이해한다. 그들에게 그 거리는 가정, 학교, 사회 등과 같은 ‘중심’ 혹은 ‘내부’의 균열을 고스란히 외면화한 바깥이지만, 그들의 열악한 현실을 상기하는 동시에 그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육체의 활력을 키우는 유동적이고 모험적인 바깥이기도 하다. 
 

레이는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 중인 스티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처럼 세게 부딪치는 놈은 처음 봐. 그럴 필요 없어.” 형 이언(루카스 헤지스)이 일상적으로 가하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온 이 작은 소년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종종 일삼는 방식으로 현실을 견뎌왔다. 그러나 레이의 말대로 거리의 스케이트보드와 함께라면, 소년은 더 이상 갑갑한 집 안에서 세게 자학하지 않고도 삶을 버티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상처 입은 소년들은 총 대신 스케이트보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매일 거리로 나온다. 이 영화는 주인공 스티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소년들의 암울한 집으로 카메라를 들이지 않는다. 대신 이들이 바깥의 폭력에 잠식되지 않고도 바깥의 리듬을 자기 식대로 체화해가는 순간들에서 분노나 좌절과는 다른 감정적 교류를 응시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위험한 농담을 나누고 서로 치고받으며 치기어린 사고를 내고, 결국 죽음 문턱에까지 접근해도, 어찌되었든 이들이 이룬 공동체의 풍경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는 묘한 안도를 안긴다. 자동차 사고 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스티비가 입원한 병원 휴게실 의자에서 상처 난 얼굴로 널브러져 잠이 든 소년들의 모습이 그 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 공동체의 일부가 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영화에서 퇴장하는 스티비의 형 이언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좀 다른 맥락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영화 속에서 상스러운 말과 행동들을 일삼으며 자신을 과시하는 그 어떤 소년들보다도 음산한 기운을 퍼뜨리며 스티비의 장면을 찢고 들어온다. 

요컨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언은 좁고 긴 복도에서 스티비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이후에도 우리는 이언이 스티비를 무시하고 이용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스티비가 몰래 훔쳐보는 이언의 방에는 최신 음악 씨디들과 옷, 모자 등 당대의 유행품들이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안이 그 문화를 향유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혼자다. 집에서 혼자만의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몸은 스케이트보드와 하나가 된 소년들의 육체와 확연히 달라 보인다. 그것은 거리와 호흡하며 끊임없이 놀이를 고안하는 생기로운 몸이 아니라, 자기방어를 위해 단련하고 공격을 준비하는 것만 같은, 우월감에 도취된, 실은 불안을 은폐하는 몸이다. 우리는 이안의 폭력성이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기인한다고 짐작하지만, 영화는 그에 대한 그 이상의 관심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은 동생을 그토록 때리던 이안이 ‘존나네’ 무리들과 맞닥뜨린 장면에서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할 때인데, 이안과 관련된 일련의 장면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미국사회가 낳은 특정 유형의 인물을 상기시킨다. 섣부른 일반화가 망설여지긴 하지만, 그는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소외시켜 폭력을 내면화하며 결국 왜곡된 방식으로 분노를 폭발하고 마는 이들의 기운을 잠재한다. 더욱이 그가 빌 클린턴의 얼굴 캐리커처가 그려진 가면을 쓰고 혼자 밥을 먹거나 한밤 중 자고 있는 스티비를 급습해서 구타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 난데없는 풍경의 기괴함과 끔찍함은 그저 무의미한 장난으로 치부해버리기 어렵다. 이런 설정을 당대 정치사회에 대한 영화의 코멘트로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이 장면들에서 우리는 그가 키워가고 있는 망상의 그림자를 예감할 수밖에 없다. 극우주의, 백인우월주의 등과 같은 혐오의 단어가 이 장면을 무섭게 스쳐간다.  
 

영화의 후반, 이안이 온 몸에 깁스를 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스티비를 말없이 지켜보다 음료수 두 개 중 하나를 나눠주는 장면이 있다. 둘에게 주어진 짧은 휴전의 순간인지, 사과와 용서의 순간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장면은 별다른 대화나 감정의 해소 없이 금세 끝나버리고 이안이 사라진 자리는 어느새 거리의 친구들로 꽉 채워진다. 다정한 친구들의 왁자지껄함으로 가득한 장면은 이안의 부재를 개의치 않는다. 그들이 함께 보낸 날들이 비디오로 상영되는 동안, 이안은 그 화면 속 거리의 추억에도, 화면 밖 병실의 친구들 틈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두드러진 인물이지만, 그 존재감이 가장 미약한 자다. <미드 90>은 그 시절, 거리의 유희와 청춘의 리듬을 탐색했던 사고뭉치 소년들의 유일무이한 시간과 함께, 그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어느 소년의 스산한 시간 또한 기억에 남겨 두려한다. 찬란하고 아련하지만 암울하고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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