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데오 카우보이 클로이 자오 , 2017

by.남다은(영화평론가) 2019-02-11조회 7,221
로데오 카우보이

<로데오 카우보이 The rider>(클로이 자오, 2017)를 보는 동안 몸이 아팠다. 이건 영화의 인상에 관한 수사가 아니라, 물리적 경험의 차원에 대한 표현이다. 그 감흥은 이 세계가 특별한 육체성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본 후에야 나는 인물을 연기한 이들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인공 브레디 블랙번은 실제로 로데오 카우보이로 활동하다 부상을 당했던 브레디 잰드로고, 그의 아버지와 여동생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잰드로 가족이며, 스타 카우보이였으나 낙마 사고로 장애를 입은 레인은 같은 과거를 가진 레인 스콧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연기에 모방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느껴진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느낌은 그들의 연기가 숙련되고 능숙하다는 평가와는 좀 다른 맥락의 문제다. 연기 경험이 없는 자가 영화 안에서 자신으로 분해 과거에 겪었던 사건을 재연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효과가 따르는 건 물론 아니다. 요컨대 브레디 블랙번과 브레디 잰드로가 동일 인물이라고 해서 실제 육체와 극의 육체가 완전히 일치하기는 불가능하다.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에 진짜가 들어오는 순간 오히려 둘 사이의 간극이 돌출된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캐릭터를 분석해서 서사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는 일반 배우들과 비교한다면 이 경우 ‘나’는 영화 안에서 ‘나’를 가장 어색하게 흉내 내는 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로데오 카우보이>가 성취한 자연스러움은 신기하고 기이한 것이다. 감독의 뛰어난 역량이나 이 영화로 데뷔한 이들에게 잠재된 배우로서의 재능 같은 것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앞서 말했던 <로데오 카우보이>의 ‘특별한 육체성’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이것이 이를테면 레슬러도 음악가도 무용가도 아닌 로데오 카우보이의 세계라는 점이다. 영화 속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현실을 재연하는 연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로데오 카우보이라는 그들의 실제 직업적 활동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감독은 로데오 카우보이라는 정체성을 영화의 몸으로 반복하고 싶어 한다. 

잘 알려져 있듯, 로데오는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나 소를 가장 잘 타는 사람을 선발하는 일종의 스포츠 혹은 엔터테인먼트다. 흩어진 소들을 직접 한 곳으로 모는 카우보이의 일거리가 점차 줄면서 로데오는 공식적인 경기가 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울타리가 쳐진 작은 공간에서 조련되지 않은 말 위에 올라 최대한 오래 버티는 행위. 그래봤자 몇 초 안에 승부가 판가름 나는 말과 인간의 싸움. 로데오를 보다 보면 개인적으로는 짜릿함보다는 씁쓸함과 비애감이 먼저 찾아온다. 그건 아마도 사라진 서부의 자리와 의미를 더없이 인공적인 행위를 통해 오직 육체만으로 가까스로 좇고 있다는 인상 때문일 것이다. 말을 타고 모뉴먼트 밸리를 달리거나 황야로 근사하게 사라지는 카우보이가 아니라, 저 비좁은 곳에서 오래 버티는 쇼로 단시간의 흥분에 도취된 카우보이의 형상. 말은 카우보이의 조력자가 아니라, 이겨야만 하는 대립항이 된다. 아니, 말은 가짜 적이 되어 카우보이와 함께 ‘서부의’ 연극을 수행한다. 로데오의 장소는 자기 죽음을 외면하는 서부의 시간이 극단적인 오락의 형태로 돌아온 곳처럼 보인다. 로데오 카우보이가 야생마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몇 초는 말하자면 그 환상이 유지되는 짧은 시간인 것이다.

로데오 카우보이 스틸

그런데...... 카우보이가 몸을 다쳤다. 몸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로데오 카우보이가 서부의 환상을 구현하거나 그 안에 남아있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물음이 <더 라이더>의 시작점이라고 짐작한다. 영화는 로데오 경기장에서 밀려난 그를 서부극의 행위자를 연기하는 장소로 부른다. 그곳은 고전적인 서부극을 지탱하던 장르적인 구조와 질서가 사라지고 다친 카우보이와 거친 말만 남은, 달리 말해, 실은 서부극이 성립되기 어려운 세계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미 사라진 서부의 시간을 영화의 몸으로 환기하며 불러내기 위해서는 로데오라는 환상만큼이나 간절한 환상의 활동이 필요하다. 현실의 로데오 카우보이는 육체적 충돌을 피해야만 그 환상을 유지할 수 있지만, <더 라이더>에서 그 환상은 육체적 충격을 통해서 지연될 수 있다. 그 사실이 이 영화에 고인 슬픔의 기원인 것 같다.

로데오 카우보이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들의 경기 장면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찍어둔 영상으로 나올 뿐이다. 그 영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몸은 로데오 쇼에 임할 수 없을 만큼 이미 망가진 상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우리는 그들의 육체적 상흔을 마주한다. 브레디는 머리 한쪽에 붕대를 감은 채 등장해서 붕대를 고정시키기 위해 박은 철심을 뜯어내는데, 수술 부위엔 피가 맺혀있다. 사고 후유증으로 그의 손가락에 마비가 와서 말고삐를 제대로 쥐지 못하는 장면들도 종종 보인다. 그를 찾아온 카우보이 친구들은 로데오를 하다 갈비뼈가 부러진 경험이나 뇌진탕이 일어난 순간들을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며 “고통에 굴복해서는 안 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웅과 다름없던 레인의 모습이 나올 때, 우리는 그 다짐의 비극적인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고 말도 하지 못하며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생각을 전달한다. 이전 장면에서 친구들은 그의 재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며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만, 레인의 장면은 그 염원을 아프게 무력화한다. 

그러니까 로데오의 활동이 아니라, 그것에 의한 육체적 충격의 결과, 혹은 여전히 진행 중인 충격의 잔상이 이 세계를 구성한다. 카우보이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환상을 지탱하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브레디가 데려온 아폴로는 조련을 거부하는 말이었지만, 점차 브레디의 손길에 익숙해진다. 더 이상 로데오 경기에 임할 수 없는 브레디에게 아폴로는 카우보이로서의 마지막 소망이 투영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말이 갑자기 사라지고 다리가 심하게 찢어져 피를 흘리는 상태로 발견된다. 아폴로가 탈출을 시도하다 철창에 다리를 찔린 것으로 생각되나, 영화가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대신 다리를 다친 말이 회생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히 상기시키고는 브레디의 아버지로 하여금 총을 쏴 죽이게 한다. 말의 급작스러운 부상과 영화가 멀리서 지켜보는 죽음의 광경은 말의 운명을 극화하며 그것을 서부극의 시간과 풍경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말이 달리며 생성하는 행로가 아니라 말이 쓰러진 자리에 생긴 구멍을 응시한다. 

로데오카우보이 스틸

어떤 가치나 사건이 아니라 충돌, 찢김, 구멍이 <로데오 카우보이>의 시간을 버티게 한다. 육체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한계에서 육체성을 체념하지 않기 위해 이 세계는 육체에 충격을 각인하는 방식으로 존립하려 한다. 이를테면 브레디는 로데오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한다. 그의 등 한가운데에 레인의 이름이 새겨지는데, 그건 회복할 수 없는 몸을 가진 로데오 카우보이가 육체적인 감각을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하고 막다른 방식이다. 로데오에 다시 도전하려던 시도가 좌절된 다음, 브레디는 레인을 찾아가서 그 문신을 보여준다. 그런 브레디에게 레인이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자 브레디는 휠체어 앞에서 레인의 손을 잡고 마치 말의 고삐를 쥐고 로데오 경기를 하는 것처럼 움직여본다. 그 간절한 동작에 담긴 마음을 실현해주듯, 영화는 하얀 말을 타고 벌판을 가로지르는 브레디의 장면으로 전환되며 끝난다. 

서로 마주 보며 과거의 육체적 기억을 함께 더듬는 두 남자의 장면에는 로데오 카우보이의 표식들, 이를테면 말도, 안장도, 로데오 경기장도, 무엇보다 육체적 부딪침의 격렬한 현재성도 없다. 오직 두 남자의 부자유한 몸과 서로의 몸을 주시하는 눈빛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과 인간이 공존하며 함께 운동하는 마지막 장면의 서정은 앞선 브레디와 레인의 경직된 몸의 장면이 꾸는 꿈일 것이다. 언젠가 도래할 미래도 실현될 희망도 아니라 불가능한 육체가 접속한 불가능한 환상. 이 끝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은 그래서 더없이 비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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