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 린 다 케브라다 이야기

by.박진형(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19-01-16조회 2,591
걸

1.

미셸 푸코가 이야기했듯이, 내 몸, 그것은 나에게 강요된, 어찌할 수 없는 장소다. 몸은 감각의 원천이자 세상을 받아들이는 영도(point zero)의 장소 그리고 ‘나’라는 환영이 생성되는 물리적 공간이다. 동시에 몸은 내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흔적들로 내 앞에 나타난다. 몹쓸 주름과 벗겨지는 머리, 못생긴 코. 현존하는 몸과 내가 상상하는 몸 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존재하며,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몸을 가꾸거나 다른 몸을 꿈꾸거나 혹은 몸을 넘어서는 영혼과 같은 무언가를 소환한다.

이런 방식으로 순화되고 훈육되어 규범화된 몸과 달리, 퀴어한 몸들은 그 간격을 있는 그대로 전시한다. 현존하는 몸과 상상된 몸, 그리고 그사이를 길항하는 가치와 규범, 욕망과 불안은 안전하게 봉합되지 못한 채 몸을 구성하는 물질적, 비물질적인 네트워크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성애중심주의의 규범 바깥의 몸이라는 맥락에서, 퀴어한 몸은 성적 주체의 불안과 공포를 현시하는 철창으로 재현되기도 하지만 또한 그 철창 바깥으로 몸을 탈출시킬 수 있는 역능을 갖기도 한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가 환기하는 것은 결국 온전히 자유롭게 사유 되고 경험될 수 있는 몸이라는 상상력이다.

2.

라라는 발레리나를 꿈꾸는 10대 소녀다. 여느 10대 소녀와 마찬가지로 라라 역시 집에서 간단히 옷핀으로 귀를 뚫어버리는 성마르고 조급한 소녀다. 또래보다 늦게 시작한 발레지만 프리마돈나가 되기 위한 집념은 누구보다 강하다.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 뒤에는 열정 못지않은 끈기와 성실함이 있다. 라라가 다른 소녀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다리 사이에 달린 자지뿐이다.

가끔은 귀찮게스리 아침이면 커져 있기도 한 자지는 라라의 제일 큰 골칫거리다. 발레 수업을 위해서 매일같이 그녀는 강력테이프로 자지를 다리 사이에 단단히 고정한다. 그래서 그 주변은 출혈을 동반하는 상처가 나기 일쑤다. 라라의 가족은 그 누구보다 라라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차근차근 밟고 있는 그녀의 성전환수술 준비를 함께 한다.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뒤쳐져 있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인 라라는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도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라라는 빨리 실력을 키워 프리마돈나가 되고 싶은 것만큼이나 얼른 이 귀찮은 자지를 없애고 싶다.

루카스 돈트의 <걸 Girl>은 <나의 장미빛 인생 My life in pink>(1997)이나 <톰보이 Tomboy>(2011)같은 영화들과는 달리 수술 전(pre-op) 트랜스젠더의 외부와의 갈등과 이성애 규범적 폭력, 혹은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윤리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보다 영화는 의지와 희망, 집착과 불안 같은 라라의 내면과 그녀의 몸이 맺고 있는 역동적인 관계,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카메라와 관객의 시선을 조직하는 어떤 논리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르덴 형제의 관찰적 자연주의를 떠올리는 영화의 카메라는 라라의 얼굴과 몸을 그녀의 환경 안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다양한 내적 긴장의 순간을 담아내는 고전적인 핸드헬드로 그녀의 불안한 심경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돈트의 카메라는 춤을 추는 라라의 몸을 보여줄 때 가장 빛을 발하는데, 요동치는 그녀의 내면과 발레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정교하게 계획된 자연스러운 촬영을 통해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런 카메라의 시선을 관통하는 것은 ‘바라보임(to-be-looked-at-ness)’에 대한 라라의 반응이다. 트랜스젠더 주체에게 있어 자신이 바라보이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은 불안을 야기하는데, 이는 자신이 자신의 젠더로 바라보여지는 데 성공하고 있는가라는 패싱(passing)의 문제에 기인한다. 트랜스젠더 주인공을 다루는 대부분 영화들의 서사적 긴장은 이 패싱이 실패했을 때 규범적 사회가 자행하는 폭력과 그로 인한 주체의 좌절에서 발생한다. 한편 <걸>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라라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의 주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에 대한 끊임없는 통제와 자각이라는 긴장 상태에 놓인 라라를 계속 함께 보여준다. 이 시선이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관심을 패싱이라는 규범적 서사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에 대한 라라의 관찰, 집착, 태도와 같은 반응에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수영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네가 우리의 벗은 몸을 보았으니 너의 몸도 우리에게 보여줘’라며 짓궂게 그녀를 몰아세우는 친구들 앞에서 곤란해하거나, 라라가 타인들과 함께하는 많은 순간 영화는 그 안에 놓여 불안한 듯 시선을 떨구거나 어딘가 화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라라의 모습을 담아내며 이러한 라라의 불안한 시선은 곧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과 마주한다. 이 관음적이지 않은 시선은 관객으로 하여금 라라와 그녀의 몸 그리고 그녀의 몸이 처해있는 상황들과 그녀의 반응에 매 순간 적극적으로 그리고 성찰적으로 반응하게끔 한다.


걸


3.

발레는 라라의 몸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치다. 극도로 엄격한 몸의 관리와 움직임을 통해 그 형식미를 획득하는 발레는 라라의 몸에 많은 훼손의 흔적을 남긴다. 발레리나의 서명과도 같은 붓고 무르고 찟겨지고 피 흘리는 발은 그 대표적인 신체 훼손의 이미지다. 이미 신체적 변화를 겪고 있는 청소녀 라라의 몸은 발레로 인한 극도의 통제와 고통, 몸과 마음의 젠더 불일치, 당혹스러운 성적 흥분 등 그녀의 욕망과 기원, 아름다움과 불쾌가 공존하며 경합하는 전장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전장의 주된 적으로 자지를 내세우는데 불편해하지 않는다.

영화의 중반 등장하는 라라의 나체와, 상이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라라의 최종선택 중간에는 자지가 있다. 대범하게도, 영화는 자지를 여느 신체의 부분과 다를 바 없지만 귀찮고 얼른 없애버리고 싶은 살덩이로 치부한다. 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지에 긴 인류 문명 동안 남근 이미지가 보유해온 이성애 규범의 상징적 무게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누군가 <걸>이 라라의 젠더순응적인 태도나 혹은 자칫 성기 결정주의로 간주될 수 있는 서사의 흐름을 통해 성적 주체와 몸이 맺는 관계를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불평한다면, 그 시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라라가 발, 귀, 종아리, 자지, 엉덩이 등 그녀 몸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반응하고 감각하려 애쓰는 순간들이다. 영화가 담아내는 라라의 여정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녀가 ‘온전한 여성이 되기 위해 겪는 고군분투’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애적이지도 규범적이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은 몸의 다중성을 자각하는 그 순간들이다.

린다케브라다이야기
<린 다 케브라다 이야기>
 
라라가 그렇게 없애고자 애를 썼던 쓸데없는 자지는 키코 고이프만과 클라우디아 프리실라의 다큐멘터리 <린 다 케브라다 이야기 Tranny fag>(2018)의 린 다 케브라다를 떠올린다. 수술 전 트랜스젠더 펑크 아티스트인 린의 이야기는 어두운 밤 브라질 뒷골목의 린과 “내 안의 무엇이 너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거야?”라고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공연과 라이오 토크쇼 형식, 영상 일기가 이어지는 75분의 러닝타임동안 린은 다양한 정체성, 감정, 규범, 가치들이 경합하는 적극적인 도전과 질문의 장소로서 자신의 몸을 제시한다. 섹스, 피부색, 게이성(gayness), 여성성, 마초, 항문 등 대담한 소재들로 풀어내는 린의 퍼포먼스는 유색인종으로서의 차별과 가난을 경험한 가족, 암 투병으로 인한 몸의 또 다른 자각을 들려주는 사적 고백이나 자지에 립스틱을 바르는 신체 유희 같은 행위와 병치 되면서 ‘자지 달린 여자’의 몸을 정치화한다. 젠더규범, 성기의 의미, 성별 정체성 등이 끊임없이 교란되고 도전받는 린의 몸은 퀴어 정치학을 교과서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이한 방식이지만, 자신의 몸을 탐색하고 몸이 이성애 규범이나 젠더 정체성과 맺고 있는 관계를 도전하고 있는 라라와 린은 성적 관계들과 그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폭등한 나머지 또 다른 성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 어떤 몸의 정치가 요구되는지의 고민으로 우리를 이끄는 주목해야할 여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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