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늑대의 피 시라이시 카즈야, 2018

by.김봉석(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2018-12-20조회 6,052
고독한 늑대의 피 스틸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을 처음 발견한 영화는 2013년작 <흉악-어느 사형수의 고발The Devil's Path>이다. 연쇄살인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남자가 형무소에 찾아온 기자에게 비밀을 말한다. 드러나지 않은 범죄가 있고, 다른 범인도 있다는 것. 세상에는 수많은 범죄가 있고, 다양한 악인이 있다. 그중에는 정말 끔찍한, 사악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흉악한 인간과 범죄도 있다. <흉악>은 기자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바닥까지 파고 들어간다. 인간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질문하는 영화였다.

2017년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을 보게 되었다. 45주년을 맞아 기획한 로망포르노 리부트 작품의 하나인 <암고양이들Dawn of the felines>(2016)의 무대 인사였다. 로망포르노 리부트는 소노 시온과 시오타 아키히코 등 일선에서 활발하게 영화를 찍는 감독들에게 핑크영화 연출을 의뢰한 야심 찬 기획이었다. <암고양이들>은 이케부쿠로의 유흥 업소에서 일하는 미혼모, 주부 등 세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암고양이들>은 다나카 노보루의 1972년작 로망포르노 <암고양이들의 밤 Night of the felines>의 리메이크작이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말부터 시작된 니카츠 로망포르노의 거장이라면 구마시로 다츠미가 해외에서 유명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실록 아베 사다A Woman Called Sada Abe>(1975)와 <유부녀 집단폭행치사사건Rape and death of a housewife>(1978)의 다나카 노보루도 상당히 지명도가 높다. 작년 로테르담 영화제에서는 다나카 노보루의 <암고양이들의 밤>과 시라이시 카즈야의 <암고양이들>을 이어서 상영했다. <암고양이들의 밤>은 격동의 시절인 1972년의 영화답게,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다. 여성에 대한 긍정적이고 관대한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흉악>을 워낙 좋아했던 터라 시라이시 카즈야가 핑크영화를 만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암고양이들>은 거리에서 떠도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건조하면서도 사회적인 이슈를 파고들며 잘 그려냈다. 이력을 찾아보니, 북해도 출신인 시라이시 카즈야는 핑크영화의 전설인 와카마츠 코지에게 사사했다고 나온다. 로망 포르노를 만들게 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된 시라이시 감독의 신작 <아무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Dare to stop us>(2018)는 와카마츠 코지 감독 사후 흔들렸던 와카마츠 프로(덕션)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영화다.

<흉악>과 <암고양이들>의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은 반드시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하고 싶은 감독이었다. 작년, 누마타 마호카루의 소설을 각색한 <이름 없는 새Birds without names>(2017)는 시기가 맞지 않아 포기했다. 올해는 <고독한 늑대의 피The blood of wolves>(2018)와 <써니를 찾아서Sunny / 32>(2018), 2편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시라이시 감독의 초청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독한 늑대의 피>에 비하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써니를 찾아서>는 인터넷 공간이 현실 이상의 리얼리티를 갖게 된 우리 시대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B급 감성으로 포착한 흥미로운 영화다.

<고독한 늑대의 피>는 히로시마 인근의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야쿠자 조직 간 항쟁을 그린 영화다. 히로시마, 라고 하면 후카사쿠 긴지의 <의리없는 전쟁Battles without honor and humanity>이 떠오른다. <의리 없는 전쟁> 시리즈의 무대가 바로 히로시마였다. 1973년 작인 <의리 없는 전쟁>은 일본 야쿠자물을 혁신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야쿠자물은 소위 ‘협객물’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회의 음지에 있지만, 정의와 의리를 지키는 아웃사이더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의리 없는 전쟁>은 협객으로서의 야쿠자를 전면 부정한다. 말로는 의리를 외치지만 야비한 술수와 음모를 꾸미고,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닌 듯 떠벌이지만 사실은 두려워서 벌벌 떠는 야쿠자의 진짜 얼굴을 그린 것이다. 치사하고 악랄한 범죄자로서의 야쿠자를 실록-다큐멘터리 스타일로 그려낸 <의리 없는 전쟁>은 야쿠자물의 전형을 바꾸었고,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후카사쿠 긴지는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와 〈의리의 무덤Graveyard of honor〉(19775), 〈도베르만 형사Detective Doberman〉(1977), <배틀 로얄Battle royale>(2000) 등의 걸작을 만들어내며 거장으로 평가받았다.

의리없는 전쟁
의리없는 전쟁

<의리 없는 전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영화 <고독한 늑대의 피>만이 아니다. 원작 소설부터 영향권에 있었다. 1968년생이며 기자로 일했던 유즈키 유코는 2008년 『임상 진리』를 발표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마흔 살이었다.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유즈키는 2015년 『고독한 늑대의 피』를 출간한다.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 〈의리없는 전쟁〉과 아사다 데쓰야의 소설 『마작방랑기』를 좋아했고, 이런 풍으로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 쓰고 싶었다던 꿈을 실현한 것이다. 치밀한 취재를 통해 『고독한 늑대의 피』는 21세기에 걸맞은 경찰, 야쿠자 소설의 걸작이 되었다. 여성인 유즈키 유코는 <의리 없는 전쟁>을 너무나 좋아하여 비슷한 스타일의 소설을 쓰고 싶었고 『고독한 늑대의 피』를 썼다. 그러니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의리 없는 전쟁>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설의 구성도 〈의리없는 전쟁〉의 ‘실록’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각 장마다 누군가의 보고서가 등장하고, 지워진 문장들이 있다. 지워진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보고서를 지운 인물이 누구인지는 소설의 마지막에 드러난다. 지워진 상황들은 각 장마다 드러난다. 누가 무엇을 지운 것일까,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기는 한데, 소설을 읽다 보면 궁금해할 여유가 없다. 상황들이 너무나 긴박하고, 인물들이 강렬하다. “맞아, 난 미쳤어. 수사를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거야.”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잘 알고 있는 오가미형사의 미래가 궁금해서 마지막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게 된다.

영화 〈고독한 늑대의 피〉도 충실하게 실록 스타일을 따른다. 잔인한 폭력이 나오는 첫 장면이 지나고, 오프닝은 슬라이드 사진의 바랜 듯한 화면으로 바뀐다. 야쿠자 조직과 인물들에 대한 나레이션이 이어지면서 배우와 스태프의 이름이 세로로 박힌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폭력단 대책법이 나오기 전 1988년. 야쿠자와 결탁한 부패 형사인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질 형사가 된 것인지 모호한 오가미 형사가 주인공이다. 신입 형사인 히오카는 오가미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히로시마 인근의 구레하라시에서 벌어지는 야쿠자 항쟁을 막으려는 오가미의 고군분투를 보여준다. 
 
고독한 늑대의 피
 
<고독한 늑대의 피>는 야쿠자물이지만 형사가 주인공이다. 형사물과 야쿠자물은 같은 류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범죄의 세계를 어떤 시점으로, 어떤 스타일로 그려지는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는 종이 한 장이다. 아니 동전의 양면일 수도 있다. 오가미 형사도 그렇다. 그가 악인인지, 선인인지 중반까지 종잡을 수가 없다. 범죄영화에 흔히 나오는, 악과 싸우다 결국 닮아가는 캐릭터 같기도 하다. 형사가 악이 되어가는 이유는 잡아야 하는 악당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이는지 알아야 단서를 포착하고, 증거를 찾아낼 수 있으니까 닮아간다. 하지만 닮아가는 것만으로 인간이 변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얕다.

처음에는 히오카도 오가미가 야쿠자를 닮아 변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가미는 고독한 늑대다. 철저하게 무리를 지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늑대라는 짐승. 그렇기에 무리에서 밀려난 늑대는 더욱 강인해져야만 한다. 투철한 각오를 해야만 살아남는다. 오가미는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신의 원칙을 세웠다. 무리의 규칙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야만 하는 규범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유는, 경찰도 야쿠자와 다를 게 없기 때문에. 야비하고 술수를 앞세우며,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다. 오가미는 야쿠자만이 아니라 동료인 경찰과도 싸워야 한다. 자신의 영역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한다. <고독한 늑대의 피>는 오가미라는 고독한 늑대의 일생을 히오카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매료될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아웃트로의 처절한 싸움을 그려낸다.

고독한 늑대의 피

<고독한 늑대의 피>는 시종일관 에너지가 들끓는다. <흉악>을 보았을 때부터, 시라이시 카즈야의 영화는 늘 그랬다. 결코 관조하지 않고, 결코 무르지 않다. 강인하게, 고독한 늑대처럼 이 세상을 차갑게 바라보면서 싸우고 있다. 소설과는 다르게,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각색을 통해 만들어진 시라이시의 고유한 장면이다. 격렬한 클라이맥스를 보고 있으면 시라이시 카즈야의 영화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일본 영화의 현재를 보고 싶다면 반드시 봐야 할 영화가 <고독한 늑대의 피>다.

연관영화 : 고독한 늑대의 피 (시라이시 카즈야 , 2018 )

연관영화 : 의리없는 전쟁 (후쿠사쿠 킨지 , 1973 )

연관영화 : 암고양이들 (시라이시 카즈야 , 2016 )

연관영화 : 흉악-어느 사형수의 고발 (시라이시 카즈야 , 2014 )

연관영화인 : Shiraishi Kazuya 1974 ~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