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브릿지 스티븐 스필버그, 2015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5-12-14조회 11,625

1.

<스파이 브릿지>에는 스파이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스파이 활동이 없다. 첫 시퀀스에서 그림이 취미인 듯한 소련 스파이 루돌프 에이블(마크 라일런스)이 브루클린 다리를 그리면서 암호 쪽지를 전달받지만, 그 내용은 관객으로선 알 수 없다. 영화는 그의 이전 첩보활동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또 다른 주인공은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인데 그의 변호사 활동도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치열한 법정공방 같은 건 아예 등장하지 않으며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의 법정 발언은 헌법재판소에서의 마지막 변론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스파이와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놓고 놀랍게도 그들의 본업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별로 많은 관객이 보지 않은 건 이 선택의 의외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두 주인공의 심리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형당할 위기에 놓인 에이블은 시종 태평스런 표정으로 아주 적게 말하고, 적국 스파이 변호라는 고약한 일을 떠맡은 도노반은 자주 말하지만 고뇌와 갈등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역시 약간 찡그린 듯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다. 도노반은 CIA 국장으로부터 소련과의 스파이 맞교환 협상가 역할을 제안받는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조건이므로 그는 공식적인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고, 협상 장소는 동서 장벽이 막 세워지기 시작한 혼란과 위험의 도시 베를린이다. 이건 목숨이 걸린 일이다. 국장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요?”라고 묻자 도노반은 약간 찡그린 얼굴로 별 망설임 없이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앞서 소련 스파이 변호라는 불명예스러운 역할이 주어졌을 때에도 심드렁하게 수락했지만, 이 장면에서 도노반은 도대체 고민이라는 게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옳은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감행하는 영웅적 캐릭터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충분하지 않다. 영화의 서두에서 우리가 본 건 능변의 보험전문 변호사였을 뿐이다. 보험전문 변호사에서 목숨을 건 영웅적 협상가로의 이행에 단 하나의 번민의 쇼트도 할애하지 않은 건 스티븐 스필버그의 결정이다. 영화는 고뇌 따위를 다루는 매체가 아니라는 듯 말이다. 

<스파이 브릿지>가 뭔가 다루는 게 있다면 그것은 협상이다. 영화의 3분의 2는 도노반의 협상 활동으로 채워져 있고, 그 활동은 결국 성공한다. 이 영화를 장르적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면 협상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협상은 말의 활동이다. 협상의 말은 (정보)전달이나 (감정)표현과 무관한, 무기로서의 말이다. 법정드라마에서도 많은 말이 쏟아지고 격돌하지만 법정의 말은 사건의 실체라는 기원을 벗어날 수 없고 법이라는 이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협상의 말은 목표만 있을 뿐 기원 없는 말이고 규칙 밖의 말이며, 오직 말 자체의 활동성으로 상대방의 말과 겨루어 자신의 목표에 이르러야 한다. 이 점에서 협상의 말은 검과 동질적이다. 

그러니 <스파이 브릿지>는 차라리 말의 활극이다. 스파이 활동도 법정 공방도 영웅의 고뇌도 삭제되고, 오직 말의 민첩함과 유연함과 강인함에 이야기의 대부분이 걸려있다면, 그런 영화를 말의 활극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도노반은 오히려 말을 아껴 상대방의 말을 베야 할 때 비로소 입을 여는 말의 고수다. 대본을 쓴 코엔 형제는 대사만으로도 한 편의 활극을 완성할 수 있는 재능을 과시한다. 이런 영화야말로 진정한 토키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과장해선 안 된다. 도노반의 말의 우월함은 그의 협상 성공이라는 결과로 인해 거슬러 추인되는 것이다. 그의 말은 강하지만 진정한 적을 만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상대들이 고수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의 말은 유연하고 민첩하며 너무도 상식적이어서 차라리 아름답지만 새롭거나 심오한 말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오히려 소련 스파이 에이블의 것이다. 

에이블은 면회실에서 도노반에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의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눈여겨보라고 했다. 그를 지켜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국경수비대가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부모를 때리고 아버지의 친구도 때렸다. 그런데 그는 맞고도 일어났다. 계속 때려도 또 일어났다. 그러니까 더 이상 때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일어서는 사람(standing man. 개봉판 자막에는 ‘오뚝이’)이라고 불렀다. 당신을 보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 

에이블이야말로 진정한 말의 고수다. 진술의 면에서만 보면 그의 말에는 아버지의 한 친구가 맷집과 배짱이 좋았다는 것 사실 외엔 없다. 거의 텅 빈 그의 말이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와 ‘맞아도 계속 일어섰다’ 사이의 아득한 간격에 있다. 어떤 설명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간격이 넓어 보이는데도 앞 문장은 단숨에 뒤 문장에 도달한다. 그냥 코엔 형제의 터치가 담긴 시적인 대사라고 말하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다르게 보고 싶다. 에이블의 말은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한 자기 언급일 뿐만 아니라 간격의 문제와 연관된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자기 언급으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2.

영화는 간격을 다루는 예술이다. 모든 예술이 자기 질료들의 간격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카메라와 대상, 대상(인간, 사물, 풍경)들, 움직임들, 소리들 사이의 물리적 간격, 말들과 사건들 사이의 의미론적 간격, 그리고 쇼트들과 시퀀스들 사이의 시간적 간격, 다시 말해 거의 모든 국면에서 물리적, 의미론적, 시간적 간격이라는 문제가 출현하고 여기에 더해 그들 사이의 간격 다시 말해 간격들 사이의 간격이라는 문제가 가담한다. 영화가 사건과 심리를 충실히 묘사해야 한다는 고전적 계율에 따른다면 간격은 묘사의 효율성에 봉사해야 한다. 이때, 간격은 존재하지만 간격의 문제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스필버그의 21세기 영화는 고전적 계율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데서 시작했다. 인물들은 갑자기 말수가 줄었고 움직임도 느리거나 단조로워졌다. 물론 전략적 난해함이나 의도된 모호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 달리 말하면 서사의 경제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할리우드적인’ 작가다. 하지만 사건과 심리 묘사라는 계율을 의심하면서 그의 영화가 자기만의 간격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에서 간격의 문제를 남김없이 해명할 수 있는 언어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특징적 간격들의 일부를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간격의 문제가 특별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무대인 ‘브릿지’가 이쪽과 저쪽, 우리와 그들, 아(我)와 타(他)의 물리적 정치적 정신적 간격의 연결과 분리가 동시에 이뤄지는 장소, 그러니까 간격의 장소라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고 건널 수 없는 다리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파이 브릿지>는 스파이의 영화가 아니라 브릿지의 영화다. 

앞서 에이블의 대사에서 두 문장 사이의 의미론적 간격을 언급했다. 이 간격은 다른 간격들과 연쇄되거나 간섭하거나 충돌하며 <스파이 브릿지>라는 영화의 속도와 톤과 표정을 만들어나간다. 에이블의 육체적 움직임은 그의 대사에 담긴 의미론적 간격과 연관된 모종의 간격을 빚어낸다. 지하철에서 FBI 요원들이 에이블을 미행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요원들은 민첩하게 에이블을 뒤쫓지만 어느 순간 에이블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다음 장면에서 알 수 있는 건 요원들이 너무 빨라 느린 에이블을 앞질러 버린 것이다. 지하철로 황급히 다시 돌아가려는 요원들 앞으로 에이블이 느긋하게 걸어온다. 그다음 장면. 요원들은 다급한 동작으로 에이블의 방을 급습한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도주한 것으로 생각되는 순간, 에이블이 화장실에서 팬티 바람으로 눈을 껌벅이며 태연하게 걸어 나온다. 

두 장면은 느림이 빠름을 제압한다는 식의 그럴듯한 수사와는 전혀 무관하다. 일반적인 영화의 미행과 추격에서 도망자와 추격자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임시적이다. 그 거리는 좁혀져 사라지거나(체포의 완수), 넓어져 사라지거나(도주의 완수) 둘 중의 하나다. 어느 쪽도 물리적 간격은 사라지기 위해 한시적으로 설정된 것이다. 에이블과 FBI 요원들의 경우는 어떤가. 요원들은 그와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해 부산을 떤다. 반면, 에이블은 그 거리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결과는 두 장면에서 모두 민망한 조우다. 물리적 거리가 좁혀져 사라졌는데, 추격자의 승리가 아니라 민망한 조우가 남는 것이다. 

에이블은 요원들과 같은 물리적 거리의 평면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 평면 위에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체포된 뒤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회유와 사형의 위협에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에이블이야말로 ‘일어서는 사람’이다. 추격자는 물리적 거리를 제로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도망자(로 간주된 사내)와의 또 다른 층위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다리를 건넜는데, 건널 수 없는 또 다른 다리가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초월적 간격 혹은 정신적 간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후자의 간격을 영화에서 제시되지 않은 심리적 동기로 설명하려 드는 건, FBI 요원들의 소동만큼 헛된 일이다. 스필버그는 이 간격을 해명하지 않고 다른 속도, 다른 간격의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조우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순간을 진정한 영화적 유머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3.

<스파이 브릿지>에는 또 다른 간격의 작동이 있다. 에이블의 초월적 간격을 알아차리는 유일한 인물은 도노반이다. 그런데 두 사내는 첫 대면에서 마주 본 뒤 다시 마주 보지 않는다. 여기에 시선의 간격이라는 문제가 있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마주 본다는 것은 대결을 뜻한다. 두 인물이 마주 볼 때, 그들은 말의 승부를 벌이며 카메라는 관습적인 쇼트-리버스쇼트를 택한다. 도노반이 벌이는 여러 인물들과의 말 대결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찍혀 있다. 하지만 에이블과 도노반은 교도소 면회실에서 처음 만나 마주 보고 대결과도 같은 첫 대화를 나누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주 보지 않는다. 이건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만들 때 스스로 정한 규칙 같다. 두 사내만은 최초의 만남 외엔 시선을 교환하지 않는, 다시 말해 쇼트-리버스쇼트로 잡을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도록 할 것.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두 인물이 마주 볼 때, 상대방은 대개 제거의 대상이거나 합일의 대상이다. 어느 쪽이든 둘 사이의 거리는 이미 삭제되어 있거나 곧 삭제된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두 사내가 마주 보지 않도록 한 선택의 효과는 비상하다. 사건을 다루지 않고 내면을 다루지 않는 이 영화에서 유일한 감정적 교류가 두 사내 사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첫 만남 뒤로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도 시선 교환도 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는 부정적 선택을 통해 그와의 감정적 유대가 표현된다는 역설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 쇼트-리버스쇼트가 아니라 시선 교환 없는, 그러니까 시선의 간격이 유지되는 투쇼트로 우정이 표현되는 것이다. 도노반이 에이블을 정면으로 보지 않는 것, 즉 간격의 시선을 선택한 것은 에이블의 초월적 간격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두 인물의 시선의 간격이 사라지는 건 마지막에 이르러서다. ‘스파이 브릿지’의 경계를 건너 마침내 소련 쪽으로 넘어간 저쪽의 에이블과 이쪽의 도노반이 차폐물을 사이에 두고 멀리 나누는 짧은 시선 교환의 순간이다. 스치듯 지나가는 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마주 보기가 감동적인 것은, 시선의 간격이 마침내 사라졌을 때 그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물리적 정치적 간격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서로 염려하며 다시 마주 보는 순간 이 영화에서의 카메라 워크의 규칙상 그들은 다시 적이 된 것이다. 물리적 간격, 정신적 간격, 시선의 간격이 각기 다른 층위에서 교차하며 작동하는 이런 장면들은 영화의 간격들을 조율하는 스필버그의 비상한 능력을 보여준다. 

아마도 시선의 간격이라는 문제가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감각 어딘가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면 협상이 끝난 뒤 귀국행 비행기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도노반의 놀라움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초상화는 에이블이 남긴 선물이다. 거기에는 얼굴은 약간 비스듬하지만 시선은 정면을 향하는 도노반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첫 장면에서 우리는 에이블이 거울을 세워놓고 자화상을 그리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 자화상에도 에이블의 얼굴이 같은 방식으로 그려져 있었다. 

전자는 후자를 연상시키고 두 그림의 이미지는 겹쳐진다. 도노반이 자신의 초상화를 볼 때,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만 동시에 에이블을 본다. 그림 속 자신의 시선과 화가 에이블의 시선은 에이블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어쩌면 정면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마지막에 그려졌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마주 보기조차 최후의 순간에야 이루어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림 속 도노반의 시선은 동시에 에이블의 시선이기도 하다. 지금 도노반은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해 또한 에이블이 아닌 그림 속 자신의 시선을 통해, 그러니까 이중적 매개를 통해서야 비로소 에이블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영화에서 아무렇지 않게 수시로 등장해온 합일의(정확히 말하면 합일처럼 보인) 마주 보기가 실은 이토록 어려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타인을 마주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철학적이면서 가장 영화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찍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마주 보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쇼트-리버스쇼트는 이 무능력을 위장하는 기법일 뿐이다. 스필버그는 간격들 앞에서 지금 영화의 능력과 한계를 숙고하고 있다. 영화가 건널 수 없는 다리를 숙고하며 그는 또 다른 간격들을 등장시킨다. 
 

4.

에이블의 자화상과 도노반의 초상화를 다시 떠올려보자. 두 그림의 구도는 같다. 그런데 두 얼굴은 왜 정면이 아닌가. 이 질문은 시선의 간격과 연관되어 있다. 에이블이 자화상을 그리는 첫 장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울과 캔버스가 나란히 놓여 있고 그는 캔버스의 정면에 가까운 각도로 앉아 있다. 모든 자화상이 이런 방식으로 그려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구도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구도에서는 거울과 얼굴 정면 사이에 약간의 각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보이는 대로 그리려 할 때 화가는 결코 자기 얼굴의 정면을 그릴 수 없다는 뜻이다. 초상화 속 에이블은 고개를 약간 돌린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정면과 비스듬함, 그사이에는 작아 보이지만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각도 차이 혹은 간격이 있다. 

도노반의 초상에 대해서도 비슷한 성격의 물리적 조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에이블은 도노반의 얼굴을 첫 대면 이후로는 정면으로 본 적이 없다. 시선의 격차 속에서만 그들은 만났다. 도노반의 얼굴은 에이블에게 늘 비스듬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영화의 서사 내부에서 에이블은 자신의 얼굴도 도노반의 얼굴도 정면을 그릴 수 없다. 정면의 불가능성, 그 제거될 수 없는 간격이 두 초상에 미묘한 애조와 무력감의 기운을 빚어낸다. 처음엔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영화적 재현의 한계와 은유적으로 연관된 이 간격은 뒤에 다른 장면들을 통해 상기된다. 

<스파이 브릿지>에는 두 주인공의 시점 쇼트가 아주 적고, 시점 쇼트와 반응 쇼트의 매치는 거의 없다. 두 인물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점 쇼트는 있지만, 도노반이 말의 대결을 벌일 때를 제외하면 두 사내가 대상을 유심히 바라보고 반응하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 촬영 방식은 앞서 말한 대로 심리 묘사를 파기한 스필버그의 선택이지만, 서사 내적으로는 두 주인공이 운명처럼 맡겨진 ‘할 일’ 외엔 현실에 무심한 인물, 마치 서부사나이처럼 초월적 태도를 지닌 인물로 보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예외적인 장면들이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도노반의 초상화와 놀라움의 표정의 매치다. 이 장면의 특별함에 대해선 이미 언급한 대로다. 나머지 두 장면은 똑같은 구도로 찍혀있다. 하나는 도노반이 전철로 베를린의 동서 경계를 지날 때 보게 되는, 동독 청년들이 장벽을 넘어가려다 일부가 경비대의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협상에 성공하고 돌아온 도노반이 전철로 출근할 때 담벼락을 넘어가려는 빈민가 10대들의 장면이다. 두 장면에는 모두 도노반의 놀라움의 표정이라는 반응 쇼트가 뒤따른다. 두 장면을 두고 전자가 국제적 이념 갈등의 현장, 후자가 국내적 계급 갈등의 현장이며 도노반이 두 현실의 동일성 혹은 연관성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는 건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두 장면은 이야기 전개에 불필요한 전적인 잉여다. 없어도 되는 장면에, 스필버그는 왜 굳이 다른 장면들에선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응시-반응의 매치컷을 예외적으로 사용한 걸까.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이미 알려져 있는 현실의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현실을 보는 방식이다. 우리는 도노반이 ‘충격적 현실’을 그 충격이 관객에게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는 현장 속에서가 아니라 열차 안에서 목격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엔 두 층위의 간격, 혹은 건널 수 없는 두 다리가 있다. 첫째는 도노반의 시선과 두 장면의 현실 사이엔 지상과 전철의 다른 높이, 그리고 유리창이라는 이중의 물리적 간격이 있다. 도노반은 이중의 물리적 간격을 통해서만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물리적 간격이 안전한 이쪽과 위험한 저쪽이라는 구도를 보장한다. 이 구도는 두 장면의 이중의 물리적 간격을 관객과 영화를 존재론적으로 격리하면서 연결하는 스크린의 은유로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두 번째, 두 번의 목격-충격이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 즉 서사 내부에서 목격-충격의 경험이 발생 즉시 소멸한다는 것은, 두 장면과 이야기 사이에 메워질 수 없는 의미론적 간격이 있음을 뜻한다. 이 간격은 정확히 극장 안과 밖의 간격에 대한 은유다. 

영화는 현실을 보고, 관객은 영화로 현실을 본다는 말은 거짓이다. 정면으로, 존재론적 격리 없이, 본 경험의 즉각적 무화 가능성 없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파이 브릿지>를 보고 모종의 현실을 본 것처럼 말해선 안 된다고, 스필버그는 지금 우리에게 집요하고도 간절하게 청하고 있다. 
 

5.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고 건널 수 없는 다리가 있다. 스파이는 천신만고 끝에 다리를 건넜지만, 어떻게 해도 건너지지 않는 다리가 있다.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는 “그들이 다리를 건너자, 그때 유령들이 다가왔다”는 문장이 인용된다. 그 다리는, 건넜지만 유령 없이 건너편에 이를 수 없는 다리, 목적지에 결코 온전히 이를 수 없는 다리, 달리 말해 결코 건널 수 없는 다리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자화상에서 정면과 비스듬한 얼굴의 제거될 수 없는 각도 차이, 목격자와 목격되는 현실 사이의 이중의 물리적 간격, 목격-충격이라는 장면과 이야기 사이의 의미론적 간격은 나와 영화와 현실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다리들이다. 이 다리들은 두 사내의 시선의 간격, ‘나’와 가장 친밀한 ‘당신’ 사이에도 놓여 있는 건널 수 없는 최초의 다리의 변주들이다. <스파이 브릿지>는 그 다리들을 중첩시키며 자신이 다른 무엇도 아닌 영화일 뿐이라고 고집스럽게 반복한다. 

물론 <스파이 브릿지>가 그 자체로는 새롭지 않은 이 간격들의 발견을 새삼스레 외치고 있는 건 아니다. 스필버그는 늘 그래 왔듯 실재했던 현실의 사건을 오밀조밀한 영화 서사로 들려주려는 이야기꾼의 자세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그 다층적 간격들을 경유하지 않고는 현실을 영화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 같다. 나지막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는 그 다짐은 그러나 무척 강인하기도 해서 영화의 한계지점까지 울려 퍼진다. 이런 ‘할리우드 영화’를 2015년에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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