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폴 버호벤, 2015

by.장영엽(씨네21 편집장) 2017-01-20조회 9,696
엘르 스틸이미지

2016년은 내게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기억될 한해다. 현실 세계에서건 극장에서건, 그동안 발화되지 않았든 혹은 쉽게 간과되었던 여성의 목소리들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울림으로 다가왔고 이러한 흐름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나에게도 큰 감흥을 주었던 것 같다. 2016년 한해 사사롭게 마음에 품었던 영화 중 많은 작품이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주거나 여성의 서사에 보다 주목한 작품들이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엘르>와 <아쿠아리우스> <아가씨>와 <줄리에타>가 그런 작품들이다. 다시 한번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호흡을 맞춘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호연이 인상적이라는 점에서 <퍼스널 쇼퍼>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와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 그리고 <곡성>은 불균질한 요소들의 충돌과 결합으로부터 생성된 미스터리한 기운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이었다. <패터슨>은 영화의 리듬감이, <룸>은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였고 드라마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은 아이디어와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것만 같은(그러나 쉽게 일어나지 않는) 불길한 무드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사롭게 고백하자면, 리스트를 꼽기 전에 <비밀은 없다>를 보았다면 나는 주저 없이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대신 이 영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손예진의 폭발적인 연기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한국 여자’에 덧씌워진 이미지를 사정없이 깨부수는 동시에, 한국 여성 캐릭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멋진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지면에서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인 영화들 중 가장 과격한 영화라고 할 만하다. 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중 최고의 논쟁작이었던 <엘르>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이 할리우드에서 자국으로 돌아가 만든 <블랙북> 이후 10여 년 만에 연출한 장편영화로도 화제를 모았다. 영화 <베티 블루 37.2>(1986)의 동명 원작을 집필한 프랑스 작가 필립 지앙의 소설 「오...」(2012)를 영화화한 <엘르>는 폴 버호벤이 원래 미국에서 촬영하려 했던 작품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투자자이든 배우이든 이 영화에 참여하는 데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버호벤은 유럽으로 눈길을 돌려 원작의 무대이기도 한 프랑스에서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엘르>를 보면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다. 불륜, 강간, 관음, 사도마조히즘, 폭력. 온갖 종류의 금기에 노골적으로 현미경을 들이대는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모험심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여주인공이 괴한에게 광폭하게 강간당하는 첫 장면부터, 시나리오를 덮어버린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엘르>는 미쉘(이자벨 위페르)의 비명으로 포문을 연다. 그녀는 복면을 쓰고 집으로 침입한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한다(사건은 암전된 화면 속에서 진행되고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괴한은 유유히 사건 현장을 떠나고, 남겨진 미쉘은 잠시 몸을 추스르더니 의연한 얼굴로 입었던 옷을 쓰레기통에 넣고 깨진 접시를 치운다. 그리고 목욕을 하며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피가 섞인 거품을 바라본다. 이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는 하나의 질문을 제기한다. 누가, 왜 그녀에게 그런 짓을 했는가? 아직도 미쉘의 곁을 맴도는 전남편, 미쉘과 불륜 관계에 있는 친구의 남편, 미쉘에게 자꾸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는 옆집 남자, 게임 회사 대표인 미쉘에게 사사건건 불만을 털어놓는 부하 직원. 모두가 조금씩 의심스럽다. 미쉘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엘르>의 초반부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띤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누가 범인일지 짐작해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범인의 정체를 추리하는 건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엘르>의 핵심은 ’그 여자’라는 제목의 의미처럼, 미쉘이라는 인물의 욕망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쉘의 삶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연쇄살인범이고, 어머니는 철이 없다. 전 남편은 제 앞가림을 못 하고 어리숙한 아들은 여자친구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에게 집착한다. 불륜 관계에 있는 친구의 남편은 직장에서건 밖에서건 발정 난 동물처럼 추근대고 회사의 남자 직원 중 누군가는 미쉘이 게임 캐릭터에게 강간당하는 영상을 단체 메일로 뿌린다. 어쩌면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는 다양한 시련들 사이로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걸어나가는 미쉘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엘르>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이유다. 

무엇보다 미쉘은 선택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사회가 부여한 역할은 온갖 괴물이 출몰하는 1인칭 게임 속 주인공이지만, 그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게임의 콘솔을 잡은 플레이어가 되길 욕망하는 느낌이랄까(그런 점에서 시나리오 에이전시의 대표였던 원작 소설 속 미쉘의 역할이 게임 회사 대표로 바뀌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일례로 이 영화에서 미쉘이 가장 먼저 내리는 선택은 경찰에 성폭행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다. 기겁하는 친구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경찰하고 엮이기 싫어. 이 얼간이 때문에. (‘연쇄살인범의 딸’이라는 오명 때문에) 내 인생을 재건하려고 정말 힘들게 싸웠어.” 그리고 덧붙인다. “미친놈은 잡아야지. 미친놈 해결하는 건 내 전공이야.” 그렇게 미쉘은 시스템보다 손도끼와 스프레이의 힘을 더 신뢰하는 여자다. 그 선택이 때로는 비윤리적이고 상식과 동떨어져있다 해도, 중요한 건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길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임을 깨부수고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믿는 폴 버호벤의 고약한 취향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다. 성모상을 옮기는 옆집 남자를 창문으로 엿보며 자위를 하고, 성폭행범이 밝혀진 뒤에도 그와 은밀한 게임을 벌이며 사도마조히즘적인 욕망을 펼쳐 보이는 이 여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금기시되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펼쳐 보이며 관객을 난감한 상황으로 밀어 넣는 폴 버호벤의 장기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미쉘로 분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그녀의 근작 가운데서도 최고다. “이처럼 변태성을 탐험하는 작업을 하려면, 기쁨과 창의성을 가지고 (감독과) 저 멀리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이런 악보에 장단을 맞출 수 있는 배우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처럼, 이자벨 위페르는 스릴러와 블랙코미디를 오가며, 냉철한 커리어우먼과 비밀스러운 욕망을 지닌 여성을 넘나들며 폴 버호벤의 변화무쌍한 장단에 기꺼이 ‘놀아’난다. 비틀린 욕망을 지녔다는 점에서 <엘르>의 미쉘은 역시 그녀가 주연을 맡았던 <피아니스트>의 에리카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도 있는데, 하네케의 영화가 에리카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면 버호벤의 <엘르>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미쉘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느낌이다. 

한편 <엘르>는 게임의 규칙을 아는 이들만이 헤아릴 수 있는 은밀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화다. 미쉘과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빠르게 습득한 뒤, 그녀가 매 순간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과 나누는 시선의 교환을 좇는 재미가 이 영화엔 있다. 특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미쉘의 초대로 한자리에 모이는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이 압권이다. 이 부르주아들은 점잖게 차려입고 샴페인 잔을 부딪히지만,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들의 정체가 불륜남, 얼뜨기, (아마도) 강간범-정체가 밝혀지기 전이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우스꽝스러운 난장의 한복판에서 오직 미쉘만이 고고하다. 파티의 기저에 은밀하게 흐르는 욕망과 비밀스럽게 구축된 관계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각자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미쉘의 장단에 놀아난다. 이토록 야심만만하게 게임의 완전한 지배자가 되려 하는, 지배자가 되기 위해 때로는 괴물이 되기도 서슴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또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 폴 버호벤의 다음 영화는 <블랙북>과 <엘르>만큼이나 간극이 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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