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클린트 이스트우드, 2016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7-01-24조회 9,619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스틸이미지

이 영화를 말하는 건 여러모로 난감한 일이다. 다수의 한국 관객은 다른 영화를 보듯 이 영화를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나도 그러했다. 기장 설리가 사고 직후 반복적으로 되뇌던 155라는 숫자가, 우리에게는 악마적 완강함으로 끝내 바뀌지 않은 채 화면 상단 오른쪽에 고착되어 있던 304라는 2년 9개월 전의 숫자를 곧바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삶의 숫자이고 후자는 죽음의 숫자라는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이 영화에 비판적 거리를 갖기 어렵도록 만든다. 

다른 하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정치적 선택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고 그의 당선 직후에 “우리는 당신을 사랑한다, 대통령 트럼프”라는 축하 인사를 SNS에 남겼다.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그 선택 때문에 이 영화를 더 냉정하게 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두 번 봤지만 두 번 다 실패했고, 거의 탈진한 상태로 극장 문을 나섰다. 이 영화를 2016년의 리스트에 올리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분석적으로 말할 자신이 아직 없다. 

걸작에는 대개 모종의 비밀이 있다. 그런데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하 <설리>)에는 비밀이 없는 것 같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가장 극적 사건 가운데 하나를 다루면서, 이스트우드는 별다른 극적 조작이나 특별한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트우드답다고 말해야겠지만, 그 반대에 가깝다. 몇 차례의 플래시백이 등장하지만 특별한 장치라고 보기 힘들며 극적 순간조차 지나칠 만큼 과묵하게 묘사한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이 과묵함과 연관된 것들 한두 가지 정도일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들의 표정, 특히 설리를 연기한 톰 행크스의 표정이 뇌리에 남는다. 기적적인 사건을 다룬 영화에서 사건과 행위가 아니라 배우의 표정이 관람자의 감각에 더 깊이 새겨진다는 건 드문 일이다. 먼저 톰 행크스의 얼굴에 대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배우는 기묘하다. 미남이 아닌 건 말할 것도 없고 할리우드의 기라성 같은 성격 배우의 개성도 지니지 않은, 이토록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가 그토록 오랫동안 스크린의 주인공으로 사랑받아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비슷한 사례를 떠올려보면, 할리우드에서라면 20세기 전반의 윌 로저스, 20세기 후반의 더스틴 호프만 정도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의 도라 상을 맡은 아츠미 기요시, 한국에서는 안성기를 그와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톰 행크스는 가장 개성이 약한 얼굴을 지녔다. 

그의 이런 비개성의 개성을 가장 잘 활용한 감독들이 스티븐 스필버그(<라이언 일병 구하기> <캐치 미 이프 유 캔> <스파이 브릿지> 등)와 스필버그 사단의 우등생 로버트 저메키스(<캐스트 어웨이> <포레스트 검프> 등)였을 것이다. 이 영화들에서 톰 행크스는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곤경에 처한 전형적인 미국 소시민의 표상에 가까웠다. 스필버그와 저메키스가 소박한 선의의 미국적 ‘리틀 가이’ 캐릭터를 완성한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적 후예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은’ 배우가 이스트우드의 남성적이고 육체적인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는 걸 <설리> 이전에 상상할 수 있었을까.(내가 기억하는 한, 톰 행크스의 연기 중에서 가장 어색했던 것은 <그린 마일>에서 간수로 나온 그가 죄수의 마법으로 전립선염을 치료받은 뒤, 아내와의 섹스에서 괴성을 지르는 장면이었다.) 

솔직히 말해야겠다. 나는 <설리>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 같다. 달리 말해 <설리>를 만든 이후라면 <스파이 브릿지>가 이스트우드의 영화라고 해도 믿었을 것 같다. 이건 폄하의 표현이 아니다. 두 감독이 놀라울 정도로 서로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런 상상을 피할 수 없다. 21세기의 스필버그는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속도를 배운 것 같다. 한 템포 늦추는 것만으로, 혹은 약간 느리게 걷는 것만으로 어떤 감정 표현과 사건 묘사도 해내지 못하는 육중한 기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스필버그는 이스트우드의 2부작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프로듀서였다.) 반면 21세기의 이스트우드는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리틀 가이’의 얼굴을 만난 것 같다. 가혹한 운명을 짐 지고 자기 파괴를 향해 돌진하는 육체적 영웅의 신경증이 아니라, 소박한 선의의 작은 인간이 지닌 불안과 피로를 그의 용기와 함께 본 것 같다. 

그 가운데 톰 행크스가 있다. 이스트우드와의 첫 작업인 <설리>에서 톰 행크스는 거의 연기를 하지 않는다. 허드슨 강에 불시착한 직후 외에는 언성을 높이는 일도 서두르는 법도 없다. 종종 멈춰서 물끄러미 대상을 쳐다보며, 수시로 습격하는 악몽과 환영을 묵묵히 집어삼킨다. TV 출연 때 말고는 웃지도 않는다. 어떡하다 내가 지금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라고 그는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것 같다. 클로즈업이 많지 않은데도 그의 얼굴의 잔영이 오래 남는 건, 아마도 카메라가 사건이 아니라 그의 연기 아닌 연기, 무표정의 표정, 사소한 움직임을 어느 대상보다 오래 지켜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모든 영웅들의 소란이 지나간 뒤, 이제 자신의 일터에서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사라져버린 세계의 우수가, 아마도 이스트우드의 말하지 않고 삼킨 영웅시대에 대한 향수가, 이 작은 사내의 표정에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리를 둘러싼 인물들도 그러하다. 개성 강한 주변 인물들이 거의 없는데도, 이 영화에는 극의 진행과 무관한 단역들이 모종의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개인적으로는, 설리가 회상을 시작하는 술집의 바텐더와 건너편에 손님으로 앉아있는 세 사내를 잊을 수가 없다. 뜻밖에 영웅을 만난 그들은 환대의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TV를 보며 “저기도 설리, 여기도 설리가 있네.”라며 웃는 그 일그러진 얼굴엔 웃음으로 지워지지 않는 비애가 있다. 아니 비애라고 단정 짓기 힘든 피로와 우울이 있다. 그리고 그 변방의 얼굴들과 영웅 설리의 얼굴에는 피로와 우울의 연대라고 부르고 싶은 우정의 관계가 있다. <설리>는 오늘의 평범한 미국인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희귀한 미국 영화다. 주변 인물들로부터 영화의 공기를 빚어내는 이스트우드의 다른 영화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설리>는 이스트우드의 영화라기보다 톰 행크스의 영화이며, 사건의 영화라기보다 표정의 영화이고, 기적의 영화라기보다 우수의 영화다. 누가 만들었다 해도, 이런 영화를 거부하기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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