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에로티시즘의 대명사: <애마부인> 프랜차이즈 연대기 ⑵ 80년대 한국영화, 카오스의 이색지대 ⑨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8-06-21조회 24,866
애마부인

3편이 끝난 후, <애마부인> 시리즈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영화제작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정인엽 감독은 ‘두손필름’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고 <파리 애마>와 <짚시 애마>(1990. 이석기)를 내놓은 것. 판권이 연방영화에 속해 있기에 ‘애마부인’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못했고, 캐릭터 이름도 애마 대신 오해리(유혜리), 필라 김(이화란) 등으로 설정해야 했지만, 이 두 편의 외전은 이후 이어지는 정전보다 오히려 더 ‘애마 정신’을 구현하는 작품이었다.
 
<파리 애마>의 유혜리, <짚시 애마>의 이화란
<파리 애마>의 유혜리, <짚시 애마>의 이화란
 
두 영화는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이라는 이국적 배경 속으로 들어간다. 1~3편에서 정인엽 감독과 호흡을 맞춘 이석기 촬영감독은 <파리 애마>에서도 기존의 애마 시리즈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화면을 선보였고, <짚시 애마>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이 영화들은 나름 당대의 파격이었다. <파리 애마>의 설정은 오해리가 이혼한 남편을 찾아 파리로 찾아간다는 이야기. 외국에서의 낯선 성적 경험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강한 남자’였던 전남편(현석)에게서 벗어난다. <짚시 애마>의 필라는 나이 많고 남편 몰래 짚시 남자와 욕정을 불태우지만 결국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패션 모델 출신의 이국적 외모를 지닌 여배우를 캐스팅해 당시로선 이례적이던 유럽 로케이션을 감행한 이 영화들은, 내용보다는 비주얼의 업그레이드를 노렸고, 두 편 모두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며 성공했다. 여기서 ‘애마 프랜차이즈’의 연대기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애마부인 계보
 

애마의 남편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애마의 남편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의 현우(임동진), 2편의 현우(최윤석), 3편의 노 박사(이정길) 그리고 <파리 애마>의 장석환(현석). 특히 장석환은 가장 강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편이었다.
 
1편의 문호(하명중)와 2편의 성현(신일룡). 애마의 옛 애인과 현재 애인.
1편의 문호(하명중)와 2편의 성현(신일룡). 애마의 옛 애인과 현재 애인.
 
1편과 2편의 동엽(하재영), 4편과 5편의 호진(김호진). 애마를 사랑하는 연하남들.
1편과 2편의 동엽(하재영), 4편과 5편의 호진(김호진). 애마를 사랑하는 연하남들.
 
3편에서 애마의 첫사랑과 현재 애인, 1인 2역으로 등장한 장승화. 11편과 12편의 김주철. 그들은 13편의 이대준과 함께 <애마부인> 시리즈의 ‘헝크’(몸 좋은 남자) 계보를 잇고 있다. 장승화는 외전인 <겨울 애마, 봄>(1991)에도 출연했다.
3편에서 애마의 첫사랑과 현재 애인, 1인 2역으로 등장한 장승화. 11편과 12편의 김주철. 그들은 13편의 이대준과 함께 <애마부인> 시리즈의 ‘헝크’(몸 좋은 남자) 계보를 잇고 있다. 장승화는 외전인 <겨울 애마, 봄>(1991)에도 출연했다.
 
‘<애마부인> 2기’는 1990년에 시작된다. <은하에서 온 별똥동자> 시리즈(1987~88)의 석도원 감독이 <애마부인 4>(1990)의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후 그는 10편까지 총 6편의 <애마부인> 시리즈 정전과 외전인 <드라큐라 애마>(1994)를 연출한다. 석도원 감독이 등장하면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진화를 일단 멈추고 불균질적인 시기를 맞이한다. 어떨 땐 황당할 정도로 급진적이고(5편의 남편(최동준)은 하나코(민희)라는 정부에 의해 일본도에 찔려 살해된다), 어떨 땐 1960년대 신파 멜로를 연상시킬 만큼 보수적이었다(7편의 애마(강승미)는 성불구 남편(이무정)에게 돌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의 에로 영화는 극장이 아닌 비디오 대여점에서 경쟁하고 있었고, 흥행 성적도 서울 관객 5만 명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에로 영화 지형도에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어느새 ‘올드 스타일’로 밀릴 상황이었다. <복카치오> 시리즈(1991~94) 같은 새로운 감각의 프랜차이즈가 등장했고, <애마부인> 시리즈도 경쟁을 위해 변해야 했다. 
 
석도원 감독의 뮤즈들.
석도원 감독의 뮤즈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4편의 주리혜, 5편의 소비아, 6편의 다희아, 7편의 강승미, 8편의 루미나, 10편의 오노아. 소비아는 이후 비디오 영화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배우 임옥경의 동생인 주리혜는 이후 비디오 영화 <쌍파울로 애마 신바람 났네>(1996. 유진선)의 주연을 맡았다. 소비아는 ‘10대 애마’ 진주희와 함께 <애마 섹시 월드>(1998. 조명화)에 출연했다. 오노아는 역시 석도원 감독이 연출한 <드라큐라 애마>(1994)에 출연했다.

이때 석도원 감독이 끌어들인 것이 바로 퍼포먼스다. 애마나 그녀가 우연히 만나는 남자들의 직업적 설정(행위예술가, 현대무용가 등)을 통해 구현되는 스테이지는, 전체적인 스토리와 분리되면서도 이 시리즈가 지니는 에로틱한 면모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때론 섹스 신에 실제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편엔 사도마조히즘 섹스 컨셉트가 도입되는데, 이때 아티스트 원석(원석)은 애마를 묶으며 “이것도 예술입니다”라고 말한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티스트 그룹의 토론 장면엔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과 아르토의 잔혹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거론된다). 5편에서 시작되는 퍼포먼스의 전통은 이후 김성수조명화로 감독이 바뀌어도 유지된다. 여기서 하나의 혐의는, 잘만 킹 영화의 영향력이다. <애마부인> 1편에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면,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에선 당시 한국 에로 콘텐츠 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레드 슈 다이어리>(1992. 잘만 킹) 스타일의 에로틱 느와르 톤이 묻어나며, 이것은 다소 난폭한 섹스와 결합된다. 
 
퍼포먼스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행위이자 모티프다
퍼포먼스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행위이자 모티프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7편에선 바닷가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가 퍼포먼스를 한다. 6편엔 4대 애마 주리혜와 5대 애마 소비아 그리고 6대 애마 다희아가 자매로 나온다. 영화 초반부, 그들은 철로 위에 눕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8편엔 밴디지 컨셉트가 등장한다. 11편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공연 장면.

조금은 장황한 모놀로그나 대사를 통해 영화의 테마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영화의 감성적 측면을 고려한 석도원 감독의 의도로 여겨지는데, 그 의미가 모호하여(게다가 비문이 많다) 그다지 효율적이진 않았다. 6편은 ‘말 잔치’인데 애마(다희아)는 언니(소비아)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지금의 언니의 모습은 정상궤도를 이탈한 빗나감이며, 사랑의 배신에 대한 반항이고, 결국은 후회하게 될 독선의 모습이야.” 이후 이혼을 결심한 애마의 독백은 이렇다. “순수와 영혼의 진한 사랑의 연습이, 크고 작음을 모두 잉태해낸 너는, 이제 허공에 익숙해진 사랑의 노래다. 높은음 외마디 끓어오르는 진실, 사랑의 한 맺힌 신음으로 고뇌하는 아픔, 네 귀를 후려치는 듯한 울음소리로, 울음소리로, 사랑의 바람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슬픔이여, 내 앞에서 그대 눈물이었다. 어떤 고통의 미움이 들었나. 독하디독한 미움을 마시고 보면 새까만 허공, 침묵의 계절. 무거운 돌 바위 무너져 내리듯 슬퍼하자, 슬퍼하자.” 영화의 시작이나 끝은 선언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문장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8편은 “에로티시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에로티시즘은 우리들을 착각적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 또 다른 활력소일 수도 있다”는 문구로 시작해 “시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시를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시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사람이든 시든 모두가 사랑이었나”라는 자막으로 끝난다. 이외에도 “우리의 사랑은 짧게 빛나는 불협화음이었나.”(4편) “그대 영혼으로 그리움 엉기어 우리의 사랑은 눈꽃이 되었나.”(5편) 같은 한탄조의 대사들이 영화를 마무리한다.
 
김성수 감독이 발굴한 9대 애마 진주희. 최연소 애마였다. 이후 그녀는 소비아와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김성수 감독이 발굴한 9대 애마 진주희. 최연소 애마였다. 이후 그녀는 소비아와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이때 등장한 김성수 감독은 <애마부인 9>(1993)을 연출하며 혁신을 일으킨다. <색깔 있는 남자>(1985)로 유명한 그는 ‘최연소 애마’ 진주희를 캐스팅하는데, 그녀는 기존의 애마들과 다른, 차라리 하이틴 아이돌이나 로맨스 히로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범죄 스릴러 요소와, <색깔 있는 남자>의 반전 엔딩을 장식했던 레즈비어니즘의 터치가 결합되면서, <애마부인 9>는 석도원 감독이 이식한 사변적 톤을 걷어내며 “몸은 주더라도 마음은 주지 마라? 그따위 논리가 어딨어!”라는 직설법으로 승부한다. 특히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애마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라는 자막이 뜨는 대목은, ‘애마 프랜차이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엔딩일 것이다.

조명화 감독의 11편에 출연한 이다연과 12편에 출연한 서지은.
조명화 감독의 11편에 출연한 이다연과 12편에 출연한 서지은.

10편으로 다시 석도원 감독에게 메가폰이 넘어간 시리즈는 11편과 12편에서 조명화 감독을 만난다. 액션 요소를 대거 도입한 조명화 감독은(그는 <우뢰매>와 <슈퍼 홍길동> 시리즈의 연출자 중 한 명이었다) 아마도 가장 거친 스타일의 <애마부인> 시리즈를 연출한 감독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 이 시리즈는 에로 비디오 시장에 거의 잠식 당한 상태였고, 마지막 13편은 김성수 감독이 돌아와 대미를 장식했다. 1990년대 중반은 ‘애마 프랜차이즈’의 대혼란기였는데, 1995년을 보면 11편과 12편이 나왔고, 외전인 <애마와 변강쇠>(김문옥) <애마와 백수건달>(김문옥)이 등장했으며, 비디오 시장엔 <적도 애마>(김인수)와 <빨간 애마>(유세기)가 출시되었다. 정전과 외전과 비디오 시장을 아우르는 상황. 이후 그 주도권은 완전히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갔지만 대세는 진도희의 <젖소부인> 시리즈였고, 1998년 이후 ‘애마’라는 이름을 붙인 영화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가 2016년 <애마부인 2016>이 나왔다. IPTV 시장의 확산을 통해 18년 만에 애마가 부활한 셈이다.
 
외전의 여주인공들.
외전의 여주인공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겨울 애마, 봄>의 애리(박엘리자), <애마와 변강쇠>와 <애마와 백수건달>에서 애옹(애마+옹녀)과 애미/미치코 역을 맡은 박양희, <빨간 애마>의 설희(정세희), <애마부인 2016>의 은혜(류현아).
 
애마 프랜차이즈의 조연들.
애마 프랜차이즈의 조연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독고영재는 6편에서 주희(주리혜)의 전남편으로 등장하고, 이후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원석과 유병완은 석도원 감독의 단골배우였다. 그들은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원석은 종종 애마의 애인으로 등장했다. 맹찬재와 노현우는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와 외전에서 남편 역할을 주로 맡았다. 4편에서 에리카의 결혼 파트너였던 신성하는 12편과 13편에 남편으로 등장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 ‘애마 프랜차이즈’의 역사는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테마와 스타일과 산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여성들이 절규하듯 내뱉었던 대사들은, ‘에로 영화’라는 장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때론 강렬한 울림을 주었다. <애마부인 9>에서 강희가 애마에게 던지는 충고는 아마도 프랜차이즈 전체의 테마를 요약할 것이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애마에게 강희는 말한다. “진정 네가 필요한 남자를 선택해. 윤리, 도덕, 이런 거에 얽매일 필요 없어.” 그리고 못을 박는다.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최초로 ‘진솔한 욕망’과 ‘원초적 본능’의 세계를 가져왔던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 한국영화의 ‘위대한 유산’까지는 아니라도, ‘역력한 흔적’ 정도로는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연관영화 : 파리애마 (정인엽 , 1988 )

연관영화 : 짚시애마 (이석기 ,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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