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낙훈 - 배우 - 아형을 생각하며

by.김기덕(예술원회원) 2008-11-11조회 1,683

세월의 흐름의 무상함을 모든 사람이 말하고 있지만 유명을 달리한 친지를 다시 떠올려 생각할 때만큼 절실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 자신 원고 청탁을 받고 나서야 그이가 내 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란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이와의 첫 만남은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차태진 사장과 극동흥업이라는 영화제작사를 창업하고 전속감독 겸 전무이사라는 이름뿐인 직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주로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작품을 주로 만들고 있었으며 예술성이 높은 문예물을 외부에서 감독을 초빙하여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몇 친구 중에 군에 장교로 몸담고 있는 괴상한 청년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 회사로 왔을 때 복도에 걸린 스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한 듯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은 연기자가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이낙훈'' 아형이다. 당시 그이는 한운사 선생 원작,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 중이었다. 그이의 존재를 내게 알려준 그 청년장교는 군인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문화예술 부문에도 전문가 이상의 혜안을 갖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이낙훈이란 배우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연기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한 지붕 아래에서 작품을 함께 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업을 같이 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러한 엄청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으며 그 부끄러움은 커다란 관심으로 바뀌어 그이를 가까이 만나보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을 급속도로 가깝게 만든 것은 같은 K고등학교 동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봉건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 사상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다. K고를 나와서 무엇이 할 일이 없어 연극쟁이나 탈렌트 또는 영화판에 몸을 담아야 하느냐고 주위의 멸시와 냉대를 받아야 했던 그런 세상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나이는 필자가 두 살이 위였고 학년으로는 그이가 나보다 하나 아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직업상으로만 가까웠던 것이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친형제 이상의 교분을 유지하며 상호 간의 집안 대소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돈독한 관계를 지키는 사이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두 사람은 신혼초였고 우연히도 안사람들의 나이가 동갑내기여서 안사람들끼리의 교분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능가할 만큼 돈독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하여 그이가 신혼초에 함께 모시고 살던 홀어머니의 소천시에는 ''호상''이라는 중책(?)을 맡아 모든 제의를 주재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필자는 그이의 친가 쪽뿐만이 아니라 처가댁의 여러 친척분들과도 친족 이상의 관계를 맺고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었다.  ''이낙훈'' 아형은 필자가 감독한 많은 작품에 출연해 주었다.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기꺼이 출연하여 직간접적으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 하나하나 모두 연대별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늦어도 그날까지는>, <친정어머니>, <용사는 살아있다>, <결혼반지>, <원죄>, <동과 서>, <그대 이름은>, <섬마을 선생> 등등이 주요 작품들이다. 그이는 참으로 만능의 연기자였다. 라디오 연기(성우)로 시작하여 연극, TV드라마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매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 특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기를 개발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이의 연기력이 얼마나 원숙하였는가 하는 것은 제1회 동아연극상 주연상 수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 연기상, TV부문 수상, TBC연기대상 주연상 수상, KBS연기대상 수상 등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이는 고교 재학시절부터 연극활동을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에 진학하여서도 그의 연극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미국의 MIAMI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면서도 연극에 대한 집념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특별한 경력이 그로 하여금 원숙한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는 토양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이와 함께 한 작품 촬영중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원죄>라는 작품의 촬영중이었다. 주인공 역으로 연기와는 거리가 먼 신인 0군을 발탁하여 썼을 때의 일이다. 장면의 내용은 여름 장면이었고 촬영 시기는 한겨울이었으며 장소는 난방이 전혀 안된 세트장에서의 일이다.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런닝셔츠만을 입은 상태로 촬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등장인물은 이낙훈 씨와 신인인 0군이었는데 0군의 연기가 너무 미숙하여 도저히 그대로 촬영할 수가 없었다. 리허설을 거듭하고 거듭해도 0군의 연기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모든 스탭들도 기다리기에 지쳤고 그날의 촬영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감독인 필자도 체념을 하고 현장을 떠나 대기실로 물러났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낙훈 씨만은 포기하지 않고 현장에 남아 0군의 연기를 차근차근 지도하여 몇 시간 후에는 촬영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끌어갔다. 덕분에 이낙훈 씨는 심한 감기에 걸려 상당기간 고생을 했다. 연기자의 처지와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그이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그후 신인 0군은 그시대를 대표하는 주연급 스타로 성장하여 팬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이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후덕한 인품을 지닌 그런 사람이었다. 그이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기지에 찬 유머 감각은 항상 주변의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특히 그의 팔도 사투리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달인의 경지에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기지에 찬 유머와 팔도사투리는 필자를 포복절도케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단편이 되었다. 그이는 팝송에서 프로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북창동에 ''MEXICO''라는 조용하고 아늑하고 정겨운 살롱이 있었는데 우리 두 사람은 그곳 분위기가 너무 좋아 자주 찾곤 했었다. 당시 그곳에서는 ''코코부러더스''라는 이름으로 장우 씨와 박상규 씨가 라이브로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갈 때마다 그이는 두 사람의 권유로 무대 앞에 나가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세 사람이 빚어내는 하모니의 앙상블은 그곳을 찾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연속적인 앙콜을 유발하기도 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포근한 추억의 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적으로나 개인 활동에 있어서 그이처럼 행복한 나날을 즐겼던 사람은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그이에게는 오랜 동안 고통을 주었던 지병이 있었다. ''당뇨병''이 그것이다. 불치의 병이라는 ''당뇨병''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용하다고 이름난 의사는 다 찾아다녔고 병에 좋다는 처방을 다 써보았으며 효험이 있다는 민간요법을 찾아 전국의 방방곡곡을 누비다시피 했다, 병마를 이기고자 하는 그의 투병 모습은 옆에서 지켜 보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해의 추석 무렵으로 기억된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의 부고가 내게 날아든 것이다, 아연실색한 필자는 곧바로 그의 영전으로 달려 갔다. 유족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간단한 검사를 받겠다고 제발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 눈깜짝할 사이에 의식을 잃고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노릇이다.

62세 한창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만큼 귀여운 딸 정화 양과 아들 상구 군을 남겨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등질 수 있단 말인가? 그이는 한 사람의 연기자이기데 앞서 종교적으로 신앙심이 두터운 가톨릭신자였다. 그이의 친가나 처가댁 모두가 독실한 신자 집안이다. 천주님께서도 너무나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이제 정말 뭘 좀 알고 일할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그이를 천주님 곁으로 불러간단 말입니까? 망연한 허탈감과 그동안 그이에게 너무나도 무심했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나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큰 별을 잃은 것이다. 앞에서 나의 친구가 단언했듯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커다란 연기자를 잃은 것이다.  중후하고 품위있는 그의 외모와 원숙한 연기력, 정답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포근하고 따뜻한 그의 마음씨 이 모두를 우리는 그이와 함께 잃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이가 남기고 간 사랑하는 유족들은 그이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그이가 다 이루지 못한 유업을 잇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부인 최윤주 여사는 불우 이웃을 돕는 사회봉사로 눈코 뜰새없이 바쁘시고 딸 정화 양은 뉴욕대학에서 컴퓨터 아트를 전공하고 돌아와 아티스트로의 길을 다지고 있으며 아들 상구 군은 미국대학에 유학하여 연출을 전공하고 돌아와 현재는 단국대, 순천향대, 경인대, 한국사이버대학 등에서 후학지도를 하는 한편 한양대 박사 과정을 이수하느라고 여념이 없다고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이들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유명을 달리한 고인에게는 두 손 모아 명복을 빈다.
 
김기덕(예술원회원) / 2003년




<프로필>

1936년 3월 27일 서울 출생
1998년 10월 7일 타계 
1954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 2년 수료 후 도미
1961년 미국 마이애미 유니버시티 사학과 수료 
1965년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 데뷔

<주요 경력>
탤렌트 협회회장, 제11대 국회의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주)범진흥업 대표이사 등

<수상 경력>
동아연극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연기대상, 공로상, 특별상 
제11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공로상수상 등 다수 수상 

<주요 작품>
갯마을, 용사는 살아있다, 돌의 초상, 돌종, 목소리, 연합전선, 꽃네, 동과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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