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신사동제비 박세민, 1989

by.허경(정발산 영화거구) 2013-09-17조회 12,526

영화가 시작되면, 박영규의 눈이 익스트림 클로즈 업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흐르는 내레이션. 

“본시 제비란 봄과 따뜻함을 의미하는바, 외로운 여성에게 춤으로 위안을 주고 그 대가를 받는 직업인데 요즘 본질을 잃은 제비가 있어 가정파괴마저 불사하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익스트림 클로즈 업과 오프닝 타이틀
익스트림 클로즈 업과 오프닝 타이틀

<신사동제비>가 개봉된 1989년 11월은, 1990년에 있을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을 목전에 두던 때였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집창촌 집중 검문을 통해 실종 처리되었던 많은 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인신매매에 대한 괴담이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남자는 봉고차에 끌려가 팔다리가 잘려 앵벌이가 된다는, 여자는 온갖 수모를 당하고 집창촌에 팔려간다는 등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들렸었는데, 결국 수사를 통해 괴담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이러한 인신매매의 주범으로는 조직폭력배들이 주로 지목된 까닭에 그들을 소재로 하는 에로영화와 다찌마리 영화가 상당수 제작되었지만, 어릴 적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다는 당시의 톱스타이자 영화광(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안봐도 비데옵니다’의 박세민은, ‘제비’를 소재로 한 인신매매 영화를 제작한다. 그것도 무려, 제비들을 질타하기 위해.

서두에 언급한 내레이션은 제비 도사 박영규가 한 말이다. 그는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져 금품갈취와 인신매매를 일삼는 사파 제비들에게 진절머리가 나, 모든 것을 접어두고 산속에서 원숭이를 키우며 소일하는 은퇴한 제비왕이다. 아내(원미경)가 인신매매를 당해 실종된 상태에서 ‘아내는 제비에게 납치되었으니 제비가 되어야만 찾을 수 있다.’는 점쟁이의 말만 믿고 찾아온 동준(강남길)을 받아들여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던 댄스 중의 댄스, ‘세게하면 고통을 주고 살살하면 쾌락을 주는 급소댄스’를 가르친다. 제비 도사는 제비의 정도를 세우는 사업을 동준에게 맡기며 이를 위해 모아둔 ‘적금 통장’을 전달한다. “제비가 되기 위해선 신사가 되어야 한다. 신사가 곧 제비다. 신사동(同)제비니라. 자. 신사동에 가서 너의 실력을 뽐내 보거라.”
 
급소 댄스 전수 과정
급소 댄스 전수 과정
적금 통장 전달 '실력을 뽐내 보거라'
적금 통장 전달 '실력을 뽐내 보거라'

이 부분은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신사동제비’인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1주년 결혼기념일 날 나이트클럽에서 파티를 연 동준과 미영 부부. 우연찮게 같은 클럽에 있던 제비들에게 타깃이 되어 납치된 미영(원미경)과 그녀를 찾기 위해 제비 도사를 찾아 ‘급소 댄스’를 전수받고 아내를 찾아 헤매는 동준(강남길)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나가고 있으니, 잠깐 열거를 해보자면



1. 미영을 납치한 제비들은 여자들이 쌓이자 ‘전국인매대회’(‘전국인신매매대회’의 준말이며, 식전 행사로 ‘먼저 간 제비 선배들에 대한 묵념’을 행하고 있다.)를 열고 전국의 포주들을 불러 경매를 한다.

2. 바다에 빠져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미영은 우연하게 잠수부들에게 구조되고, 도사의 외모를 가졌으나 스스로를 ‘이 시대 마지막 내시’라 칭하는 노인에게 ‘약간의 공격술’과 ‘폭발물 제조’를 배우게 된다. 미영은 묻는다. “할아버지는 취미가 뭐예요?” “오로지 폭발물 제조지. 내시가 된 것도 테스트를 하다가 그만...” 가엾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미영

3. 노인과 헤어진 미영은 람보 비슷한 옷을 입고 원수들의 사진을 아지트에 붙여놓고 하나씩 X표를 쳐가며 살해해 나가는데, 밑에는 붉은 페인트로 ‘여보! 용서해줘요!’라고 쓰여 있다. 

4. 동준은 제비 도사가 키우는 원숭이를 약 올리다가 그를 원숭이로 오해한 사냥꾼들의 총에 얼굴을 맞게 된다. 위독한 상황에서 수술을 받게 되는데, 제비 도사의 집에 남아있던 유일한 사진인 나쁜 제비 보스, 박세민의 얼굴이 동준의 얼굴이라 오해 한 의사는 동준을 박세민의 얼굴로 성형해 버린다. 믿기지 않겠지만 동준은 원숭이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저 고릴라(!) 인형을 들고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었을 뿐인데, 사냥꾼들은 그를 원숭이로 오인해 사격해 버린 것이다. 

이 정도만 봐도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아찔함이 몰려오지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인 개드립이 영화에 촘촘히 박혀있다. 당시 어린이 영화, 에로 영화에 대거 등장했던 개그맨들의 영화 진출로 기획되었던 탓인지, 정재환, 정재윤, 김상호 등 당시의 인기 개그맨들이 총출동하여 틈 나는 대로 본인의 유행어 캐릭터를 뽐내는 통에 이게 <유머 1번지> 녹화 본인지 영화를 보는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할 지경이다. 영화가 이 모양인 까닭에, 과거의 자료를 뒤져본 들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억지로 찾아보자면, “퇴폐조장 영화제목 여과장치 필요하다”라는 동아일보 기사에 언급되거나, “개그맨 탈 안방극장 러시”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사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사라져 가버릴 운명이었던 영화가 몇몇의 변태 영화팬들에게 알려진 것은, 하필 개봉 10주년인 1999년에 발표된 가수 유희열의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에 실린 한 편의 글 때문이었다. 스스로 비디오 가게의 협객이라 밝히고 있는 유희열은 어느 날 비디오 가게 아저씨에게 “제일 후진 걸로 주세요.” 라는 주문을 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인의 손에 들려있던 비디오 테잎이 바로... <신사동제비>였다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영화로 <토마토 공격대>와 바로 이 <신사동제비>를 꼽았다. 과연 감성 변태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유희열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
유희열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

재미있는 점은 또 있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은 ‘민성욱’이다. 민성욱...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어 찾아보니, 현재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며 백제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신 바로 그분이시다. 긴가민가할 것도 없다. 본인이 JIFF 블로그에 밝혀 놨으니까. 당시 인기몰이 중이던 ZAZ사단 (<에어플레인>, <총알 탄 사나이>)류의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민성욱 (당시) 작가는 충무로 최고의 고료를 받고 <신사동제비>를 썼다고 한다. 제작사에서 내건 조건은 단 두 개. 아내가 인신매매 당해야 하며, 아내를 찾기 위해 남편이 제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본인의 우상(이라고 본인이 밝힌) 박세민을 찾아가 감독직을 부탁했고... <신사동제비>는 완성된 것이다. (원글을 읽고 싶으신 분은 14회 JIFF 홈페이지를 가보시기 바란다.) http://goo.gl/1NopXM

이렇게 전사를 알아보니, <신사동제비>는 당대의 사회상을 베이스로 유행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버무려 최고의 흥행을 했어야 하는 영화였다. 하지만 검열과 제작사의 횡포로 영화 만들기의 어려움이 최고조에 달했던 80년대 말에 제작된 <신사동제비>는 해도 해도 너무한 몰골로 나타나, 그런 억압과 제한 속에서 비굴하게 타협하는 당대의 영화들을 의도적으로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괴작이 되고 만 것이다.

박세민 감독은 제비들에게 정도를 걸으라 영화로 일갈하고, 민성욱 (당시) 작가는 오우삼보다 무려 10년이 앞서 ‘페이스오프’라는 소재를 영화에 가져온 것으로 만족하며,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막 나가는 영화에 관객은 즐거우니 결국 제작사만 눈물을 흘린 것인가. 감독 박세민은 <신사동제비> 이후 에로영화 팬들 사이에 나름 회자되고 있는 조루증 환자의 고군분투기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새벽까지>를 2탄까지 찍고, 2000년 <타가킹>을 어려움 끝에 제작, 연출하지만 제작사에 뒤통수 맞고, 홍보사에 등짝스매싱 당한 뒤,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개그맨 박세민은 최근 ‘냉장고를 녹이는 남자’라는 미묘한 수식어를 달고 재기의 청신호를 밝히고 있는 중이라 한다.
 
통장을 건내주는 제비왕의 자상한 눈빛
통장을 건내주는 제비왕의 자상한 눈빛

P.S : 올해 1월 박영규는 영화 <남자사용설명서> 출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며 뜬금없이 “돈에 눈이 멀어 <신사동제비>에 출연했다. 후회한다.” 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알았으면 좋겠다. 강남길에게 급소 댄스를 전수하던 당신의 강렬하면서도 온화한 그 눈빛과 제비들이 정도를 걷게 하는 사업에 쓰기 위해 초가집에 살며 어렵게 모은 적금 통장을 강남길에게 던져주던 그 알뜰한 자상함을 기억하는 팬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 글: 허경(정발산 영화거구)

강남길
원미경
박세민
박영규

감독 박세민
각본 민성욱
촬영 신옥현
개봉극장 서울극장, 롯데(서울)
개봉일 1989-11-04
관람인원 17,748(서울)명

 
신사동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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