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욕망의 얼굴 야행, 1977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4-02-02조회 2,918
화면 너머를 응시하는 윤정희와 신성일

얼마 전 작고한 김수용 감독의 <야행>은 1974년 제작됐으나 사전검열과 영화법 4차 개정에 따른 제작사의 등록취소 문제로 1977년이 돼서야 개봉했다. <야행>은 김수용 감독의 전작 <안개>(1967)와 공통점이 많다. 두 영화 모두 김승옥 원작에 윤정희와 신성일이 주연을 맡았다. 두 영화는 급변하는 20세기 모던한 서울에서 삶의 방향을 잃은 주인공이 고향을 방문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구조를 갖고 있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서울에서 중산층 이상의 계급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예정된 권태로운 삶에 무의미함을 느낀다. 두 주인공의 방황은 자의식적인 내레이션, 플래시백, 꿈과 환상의 장면으로 표현된다. 권태로움을 깨고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규범적인 중산층의 삶에서는 꺼내놓을 수 없었던 성적 환상의 실현이 된다. <안개>는 윤기준(신성일)이라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제약회사 전무 자리를 꿰찬 남자의 시점으로, <야행>은 은행에서 일하며 이제 막 신축한 강남 반포 아파트에 살고 있는 현주(윤정희)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두 영화 모두에서 도시와 농어촌인 고향의 대비, 도시에서의 경쟁적인 삶과 신분상승의 욕망, 중산층 정상성에의 압박,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같은 국가적 트라우마의 영향이 희미한 배경으로 처리된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도시화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이 쟁점들은 그 원인과 효과가 날카롭게 파헤쳐지기 보다는 개인의 방황을 정당화하는 동기 정도로 차용된다. 

<안개>와 <야행>은 공통점이 많지만 동시에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점도 두드러진다. <안개>에서 윤기준이 무진에서 잠깐 만나는 젊은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을 포함해 아내, 옛 애인, 술집작부 등 여성 인물들은 그의 남성적 수치심, 혼란, 열패감, 권태로움을 반영하거나 보상하는 정형화된 약호들로 기능한다. 무진에서 서울로 가고 싶어했으나 금방 마음이 바뀐 하인숙을 이해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반면 <야행>의 현주(윤정희)의 방황하는 행동은 단순한 변덕이나 모순보다는 도시 신흥 중산층 여성의 내적 풍경으로 이해된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예술 영화를 표방했던 영화와 마찬가지로 <야행>의 현주(윤정희)는 도시 생활의 최첨단에 있다. 그리고 그 최신의 세련됨은 자본주의의 숙성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 된 반포주공아파트에 산다. 영화는 도시화와 더불어 지루함과 혼란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고속도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 고속버스 터미널, 서울의 빌딩을 오프닝의 설정 쇼트로 보여준다. 지방에 있는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은행에 취직하고 이제는 숙련된 직장인으로 일하는 현주처럼, 서울 역시 어느 정도의 도시화와 근대화가 숙성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설정 쇼트에 이어 영화는 은행의 일상 업무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이제 인프라를 쌓고 직접적인 노동을 통해 성장하는 것에서 돈이 돈을 버는 금융자본이 중요해지고 지대수입을 통해 부를 증식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부의 증식은 계층 격차를 벌어지게 만든다. 영화는 그러한 현상을 강조라도 하듯 현금과 금고를 클로즈업 몽타주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정치의 개입이든 경쟁에서의 도태든 탈락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동방상사의 사장이 오래된 부잣집에서 부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과 남자 주인공인 박대리(신성일)가 동방상사를 부도처리하는 장면이 바쁘고 역동적으로 교차편집 되는 와중에 안경을 쓴 현주는 돈다발을 응시한다.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남자들이 몰입해 일을 하는 동안 거리를 두고 약간은 지루하게 응시하는 현주의 모습은 흥미롭다. 영화는 여성인 현주의 관점에서 근대화, 도시화, 자본주의의 숙성을 다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조금은 뒤늦게 밝힌다. 현주 역시 도시 자본주의를 충분히 누리고 있지만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혼란을 느낀다. 영화는 현주가 결혼을 통해 규범적인 중산층 가족을 이루지 못한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묘사한다. 동료와 상사는 ‘노처녀’ 현주가 자기보다 어린 여직원이 결혼을 하는 것에 질투하고 있는 것처럼 몰아간다. 실제로 젊은 여직원들은 뒤에서 현주를 욕하고, 남직원들과 남자 상사들은 대놓고 그녀를 동정하며 비웃는다. 아무리 ‘안경만 벗으면 미인인’ 현주라도 나이가 들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녀를 대한다. 현주도 여기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불만은 훨씬 더 모호하고 복잡하다. 

신식 강남 아파트에서 동거를 하고 있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는 박대리에 대한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현주 역시 그와 정말로 결혼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결혼은 그저 그의 욕망을 찾기 위한 여정을 추진하는 기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현주는 과거로 돌아간다. 휴가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현주의 회상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선생님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베트남전에서 죽고 만다. 그녀의 아파트가 자신의 첫사랑이 묻혀 있는 현충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최신식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 자본주의적 현대성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대가로 사들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국가가 오염되어 있는 것처럼, 결혼은 이제 중산층이라는 계층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현주의 욕망은 급작스럽게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알레고리가 된다. 그러나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과시하는 김수용 감독답게 영화는 그 알레고리를 끊임없이 개인의 성적인 방황과 모던한 아파트의 스펙터클로 재치환 한다.

1974년 제작된 영화는 1973년 처음 공급된 당시 반포주공아파트의 실내 구조와 창밖 전망을 스펙터클화 한다. 영화 속 아파트는 은밀하게 섹스를 하는 에로틱하고 모던한 공간이자, 창밖으로 대단지 내 다른 아파트만 보이고 허허벌판인 황폐하고 삭막한 신도시 공간으로 묘사된다. 아파트 근처에는 베트남 전쟁 중 죽은 옛 연인이 묻혀있는 국립현충원이 있다. 현주는 현충원의 헌병 앞에서 스타킹을 올리며 유혹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한다. 이 장면은 강남개발과 베트남 참전이 모두 국가 주도의 근대화 프로젝트 영향 하에 있음을 은유하는 동시에, 신흥 중산층에 진입했지만 결혼 같은 규범은 원치 않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다. 지난 50년간 강남 중상층 욕망의 상징이 되어온 반포주공아파트는 2023년 재건축 진행으로 사라졌지만, <야행>은 그 욕망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하고 기억한다. 
 

박대리는 뒤늦게 현주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지만, 자신을 성적 도구로만 여기는 그에게 현주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현주는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성적 방황의 여정을 시작한다. 근대화, 도시화, 자본주의의 숙성을 통과하는 여성의 혼란스러움은 성적 불만족으로 환원된다. 서울로 돌아온 현주는 은행이 내려다보이는 다방에 앉아 박대리와 나눈 대화를 복기한다. 그리고 박대리가 했던 대사를 돌려준다. 박대리는 “우린 안 해?”라고 묻고 현주는 “시시해, 결혼식 같은 건”라고 답한다. 낯선 남자와 총질하는 환상이 삽입되면서 이제 현주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은유화 한다. 남은 휴가를 보내던 현주는 도심의 육교 위에서 느닷없이 수갑이 채워져 여관방으로 끌려가 강제로 관계를 맺고, 이때 첫사랑과의 첫날밤 장면까지 교차되며 그녀의 환상은 극에 달한다. 이 장면은 여성 시점의 강간 판타지를 위험하게 보여준다. 

아파트에 갇혀 사는 중산층 여성의 권태로움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근대화에 대한 불만족을 성적환상으로 대치한 현주는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환상은 환상일 뿐 그녀의 일상은 다시 반복된다. 하지만 박대리와 결혼하는 안일함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주의 눈치를 보는 박대리에게 단호하게 ‘휴가는 끝났다’는 쪽지를 보내고, 자신을 성희롱하는 남자고객을 뒤에서 욕하며 퇴근하는 현주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표명으로 보인다. 특히 나이에 따라 여성들의 가치를 매기는 가부장적 결혼제도로는 걸어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현충원을 지나 양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아파트 사이의 소실점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현주의 뒷모습을 점프컷으로 보여준다. <야행>은 중산층이라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 결혼이라는 규범을 거부하는 자본주의 근대 도시 여성의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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