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하는 거대 얼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1999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23-10-11조회 2,416

<여고괴담> 연작은 한국영화사의 독보적인 공포영화 프랜차이즈다(이하 <여고괴담> 프랜차이즈는 ‘여고괴담’으로 기입). 1998년 <여고괴담>(박기형)의 예기치 못한 흥행(서울관객 약 65만 추정)에 힘입어 시작된 이 프랜차이즈는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모교>(이미영, 2021)까지 24년에 걸쳐 총 6편이 제작되었다. ‘여고괴담’은 여고라는 장소, 자살로 추정되는 학생의 죽음,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원혼, 여학생들 사이의 다채로운 감정을 반복한다. 제작사 씨네2000은 프렌차이즈를 유지시키며 여고 공포영화라는 서브장르를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큰 흥행을 하지 못할 때조차 프랜차이즈의 브랜드 파워로 주목 받으며 신인 여성 배우와 감독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플랫폼 역할을 했다. 

해당 프랜차이즈를 론칭한 작품은 1편이지만, 그 정체성을 구축한 것은 2편인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이다. 특히 학교라는 제도적 공간을 억압적 기제로만 한정하지 않고 여학생들 간의 그리고 교사와 학생 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상업영화로서는 다소 실험적인 연출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시청각적인 연출뿐 아니라 서사구성에서도 흥미롭다.
 

영화는 효신(박혜진)이 학교 옥상에서 자살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그린다. 그날 아침 민아(김민선)는 수돗가에서 우연히 효신과 시은(이영진)의 교환일기를 줍고 그들의 관계에 깊이 빠져든다. 교환일기에는 효신과 시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갈등을 빚게 된 과정에 대한 각자의 내밀한 목소리가 적혀 있다. 민아가 읽어 내려가는 페이지는 주로 효신이 쓴 일기로 민아는 효신에 동일시하며 중성적인 외모와 태도를 가진 시은에게 서서히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민아는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게임의 아이템을 먹는 것처럼 효신이 시은을 위해 넣어 둔 별사탕을 먹는다. 효신에 따르면 그 사탕은 독약이다. 효신의 일기는 시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죽게 될 것이라 말한다. 민아는 강렬한 호기심과 불길함을 동시에 느낀다. 

영화는 효신과 시은의 사랑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민아의 눈, 동일시 과정, 상상력을 통해 액자형 구조로 구성한다. 민아의 다양한 강도의 몰입은 영화보기, 등장인물을 깊게 이해하기, 2차 창작이라는 관객 행위로 연결해 볼 수 있다. 민아의 친구이자 효신을 향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는 연안(김재인)과 지원(공효진)을 비롯한 학생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반응과 담론을 은유한다. 효신이 자살한 뒤 학생들은 효신의 죽음으로 휴교령이 내려지면 좋겠다는 식의 극단적인 냉소를 보이거나 효신을 위한 추모 공연을 준비하는 식의 갑작스러운 동정을 보이며 양분된다. 그 어느 쪽도 효신이 왜 자살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거리를 두고 외면하고 혐오하거나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그를 동정할 뿐이다.
 

민아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영화에 감응하는 능력을 가진 관객이다. 몰입을 통해 효신과 시은을 이해하게 된 관객으로서 민아는 교육적 역할을 수행한다. 적극적으로 둘의 관계를 탐사하고 자신이 효신의 처지에 있다면 어떠했을 지를 상상하며 심지어는 그 감정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효신은 스스로를 교육할 뿐 아니라 친구들의 태도도 바꿔보려 노력한다. 효신과 시은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효신이 자살한 당일에 지속적으로 침투하지만 그것이 교환일기를 읽는 민아의 상상인지, 효신이나 시은의 주관적인 회상인지, 아니면 전지적인 카메라의 과거 시간의 묘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영화에의 몰입과 동일시는 자아와 타자, 등장인물과 관객, 텍스트와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몰입과 동일시의 감각은 효신, 시은, 민아가 서로 텔레파시를 통해 소통하는 것처럼 ‘다르게’ 보고 듣는 방법을 일깨운다. 효신이 신체검사 하는 날 자살을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수치와 규격 속에 고유한 신체와 욕망을 맞추며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방식을 효신은 견디지 못한다. 

영화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해서도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한다. 청각적인 측면에서 보면, 난청인 시은에게 효신은 ‘들을 수 있다/들을 수 없다’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깨며 시은이 다르게 들을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시은만이 효신이 줄을 끊어낸 피아노 건반의 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 주파수의 채널이 다를 뿐이다. 한편, 민아는 신체검사에서 청력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시은을 기지개를 펴는 제스처로 도우며 함께 듣기라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시각적 연출은 보기와 기록하기의 다채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효신은 시은과 교환일기를 쓰자고 제안한 첫 만남에서 눈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효신은 주체의 눈동자에 비친 타자의 이미지를 눈부처라고 한다고 말한다. 타자(의 이미지를) 눈에 담는다.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는 문자 그대로 타자의 이미지를 자신의 신체에 각인하고 포괄하는 실천이다. 비록 그것이 찰나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과 영사되는 스크린을 하나의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끊임없이 옮긴다. 연안이 학교에 가져온 비디오카메라는 연안에게서 지원으로, 지원에게서 자신의 수업을 감시한다고 생각해 카메라를 빼앗은 교사에게로, 교무실에서 카메라를 훔친 효신에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제 3자에게로 이동한다. 연안과 지원의 카메라가 비난하고 고발하는 카메라라면, 효신이 옥상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함께 했던 카메라는 소수자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기록하는 카메라이다. 

관객을 대표해 서사적 시점의 상당부분을 점유하는 민아는 텍스트를 통해 효신과 시은을 이해할 수 있는 적극적인 매개자의 역할을 하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스크린이 곧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둘은 상호영향력을 갖지만 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효신의 자살 후 교사와 아이들은 이상한 현상을 겪고 학교에 갇힌다. 이것이 그저 공포와 죄책감이 전염된 단체 패닉에 의한 주관적 현상인지, 아니면 정말로 효신의 유령이 그들을 학교에 가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관객들은 강당에서 효신과 시은을 환영하고 그들의 관계를 축하해주는 학생들의 모습을 본다. 효신에 대한 혐오를 가장 크게 드러냈던 연안이 케이크를 든 모습을 보며 민아는 안도한다. 그러나 곧 이어 연안은 케이크를 효신의 얼굴에 던지고 이것이 모두 민아의 환상이었음이 드러난다. 텍스트의 주인공에게 동일시하며 스스로 변화를 경험한 관객은 자신과 함께 현실도 변화했을 거라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텍스트로 안전하게 소비되는 동성애, 여학교라는 한정된 장소에 갇혀 나가지 못하는 폐쇄된 동성애라는 영화 스스로의 한계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아의 바람 혹은 환상이 깨지고 난 뒤 스크린은 다시 눈부처가 각인된 눈동자, 유리천장, 천창 밖으로 보이는 효신-유령의 거대 얼굴로 이동한다. 학교에 갇힌 아이들은 패닉에 빠지고 혼란 속에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친다. 민아는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에 밀려 넘어지고 학교의 유리 천창에 각인된 거대한 효신의 얼굴을 본다. 유리 천창은 눈동자가 되고, 효신의 거대 얼굴은 눈부처가 된다. 효신은 상대방의 신체가 포용하는 눈부처가 되길 원했지만, 아이들로부터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시은으로부터 끝내 거부당한다. 마지막 안식처였던 시은마저 자신을 창피해하면서 등을 돌리자 효신은 자신을 담을 스크린을 잃는다. 클로즈업은 카메라와 대상의 거리가 가까운 쇼트이다. 그 거리는 또한 눈부처를 볼 수 있는 친밀한 관계의 거리이다. 시은을 포함해 다른 아이들이 다가서지 않으며 혐오의 거리를 만들자, 효신은 스스로 거대해지며 그들에게 다가가 눈부처가 된다. 효신은 이해를 원하지만, 그의 클로즈업은 비율이 맞지 않아 낯설고 기이하기만 하다. 그래서 스스로 감응하는 거대 얼굴이 된다.  
 
효신은 자살을 통해 학교를 탈출하고, 학교도 외부도 아닌 옥상에서 시은과의 즐거웠던 한 때로 돌아간다. 둘을 기록하는 제 3자의 시점은 물리적 거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약간의 흔들림과 비디오카메라의 질감을 유지하며 친밀성을 표현한다. 민아, 연안, 효신 그 누구의 시점도 아니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기록하려는 태도는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도 둘의 감정과 세계를 지지하고자 하는 영화 그 자체의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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