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참으세요 1981, 이형표

by.듀나(영화평론가) 2023-08-09조회 2,546

옛날 한국영화를 보려고 하는 현대 관객들의 발목을 잡는 것 중 하나는 이런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이 대부분 끔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형표의 <아가씨 참으세요>가 남자주인공 김민욱을 등장시키는 첫 장면을 보자. 조깅을 하고 있던 민욱은 여자주인공 진리화가 타고 있는 차를 아무 이유도 없이 가로 막는다. 항의하는 리화에게 리화의 폴크스바겐을 달구지라고 놀려대더니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리화의 차 지붕 위로 뛰어오른다. 여기에 어떤 이유가 있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남자주인공에게 이런 짓을 시키면 재미있는 놈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게 겨우 1981년 일이다.

이 ‘재미있는 놈’을 연기한 사람은 당룡이다. 본명이 김태정인,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의 대역으로 나왔던 배우다. 당룡의 캐스팅은 ‘홍콩영화’가 되려고 하는 이 영화의 욕망을 반영한다. 당룡의 무술은 이 영화의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렇다고 그게 영화에 엄청난 긴장감을 부여하는 건 아니다. 일단 이 영화는 코미디이고 둘째로 코미디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악당들이 너무 무능해서 주인공들이 잘못될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예를 들어 진리화와 리화의 친구는 둘 다 영화 초반에 납치되지만 모두 남자주인공의 도움없이 탈출에 성공한다. 리화의 친구는 태권도 유단자로 설정되어 있고 액션신도 많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그냥 남자주인공 없이 가도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진리화라고 하는 홍콩인 교환학생을 여자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홍콩영화’가 되려는 욕망의 또다른 표현이지만, 이 캐릭터를 연기한 사람은 당시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7,80년대 한국 여자배우 3대 트로이카였던 정윤희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정윤희의 ’외국인‘ 연기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그런 것에 신경을 썼던 시대가 아니다. 전문성우가 후시녹음을 하던 시절엔 언어의 사실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1981년작이니 정윤희의 두 영화 대표작인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와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같은 시기에 나왔다. 정윤희는 이 두 편의 영화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연달아 받았으니 배우로서도 절정기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정윤희의 연기는 대부분 명연기와 거리가 멀다. 나는 진리화가 친구 앞에서 태권도 도복을 입고 발레, 또는 발레라고 우기는 무언가를 하는 장면을 먼저 뽑을 거 같은데, 이건 어느 각도로 보더라도 그냥 유치원 재롱 잔치다. 정윤희는 그렇게까지 몸을 유연하게 잘 쓰는 배우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걸 코미디의 재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어떤 내용인가.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홍콩 재벌 딸인 진리화를 납치하려는 악당들이 있고 남자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이 리화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이 음모를 격파한다는 이야기다. 아, 그리고 <애마부인>으로 뜨기 직전인 안소영이 악당의 여자로 나온다. 아무도 신경 안 쓸 스포일러를 건드리자면 나중에 주인공들을 돕는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성폭행 회상 장면을 넣는다.

당연하지만 이 이야기는 코미디와 액션을 엮기 위해 간신히 존재하며 얼마든지 다른 무언가로 교체될 수 있다. 대부분 액션은 코미디에 휩쓸리며 코미디의 일부는 여장한 민욱이 악당들을 속이는 장면처럼 종종 보기 고통스럽다. 하지만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에서 악당들이 튕겨져 나가고 나중에 필름이 거꾸로 돌면서 함께 모두 다시 엘리베이터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처럼 초현실적인 개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가씨 참으세요>는 누가 봐도 정윤희의 영화이고 결국 이 배우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영화는 어떻게든 당대 최고 스타였던 주연배우의 외모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하는데, 당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액션 장면 중에 원피스를 찢어 배우의 엉덩이를 노출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토착 에로티시즘 영화들과는 다른 식으로 정윤희의 캐릭터와 몸을 바라보며 여기에는 여러가지 다른 가능성이 보인다. 그리고 현대 관객들은 왜 그 가능성들이 적극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는지, 왜 당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여자 몸에 대한 상상력이 딱 그 정도에서 멈추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