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2010, 이응일

by.허경(영화애호가) 2023-04-19조회 2,797

2010년, 제 14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한 저예산 영화가 상영되었다. 초저예산 영화로서는 생각보다 진지하게 구현된 CG, 당시로서는 그리 흔하지 않았던 인터넷 커뮤니티 담론을 전면 수용한 영화로 소소한 화제를 일으켰다. 이 바람을 타고 ‘장기하가 에드우드를 만났을 때’(영화평론가 이동진), ‘지구를 지켜라 이후 가장 발칙한 데뷔작(영화평론가 김도훈) 등의 평을 들으며 극장 개봉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B급 영화, 맛이 간 영화, 아무튼 뭔가 이상한 영화에 꽂혀있던 나는 그 실체를 확인하러 한 달음에..!는 아니고 버스를 타고 걸어서 이대 후문 필름 포럼에 갔던 것이다.

좌석에 앉아 있으니 불이 꺼졌고 영화가 시작하나 보다 싶어 시선을 앞에 두었던 그 때, 갑자기 스크린 옆의 문이 열리며 왼손으로는 턱 밑에 둔 핸드폰으로 플래쉬를 켜 얼굴을 비추고, 오른팔은 위쪽으로 쭉 편 채 스크린 중앙까지 말없이 걸어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졌다. 사내는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불청객을 만든 이응일이올시다.(‘이올시다’라고 하시지는 않았을텐데, 상황과 분위기가 너무 잘 어울려 그냥 그렇게 기억하기로 했다.)
 

갑자기 이 영화를 떠올린 이유는 역시 ‘삐용삐용 B무비 시즌 2’에 원고를 쓰기 위해서이다. 시즌 1을 할 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루한 영화만 잔뜩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옛날에도 지금은 흉내도 못 낼 ‘충분히 맛이 가버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박노식 감독의 <왜?>나 최영철 감독의 <삿갓 쓴 장고> 같은 영화들은 지금 생각해도 (두 영화는 정 반대 방향에 있긴 하지만) 매우 썩 훌륭하게 미친 그런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이 때 소개한 영화들은 영상자료원에 직접 방문하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그 땐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끝내주는 영화들이 있으니 영상 도서관에 오셔서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2023년에 다시 ‘삐용 삐용 B 무비’를 시작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도 아주 좋은 영화가 많이 올라가 있고, 여러 OTT를 통해서 영화를 접하기 매우 쉬운 환경이 된 지금,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라는 건 예전보다 마음의 거리가 훨씬 멀게 느껴진다. 이번 시즌에서 소개할 3편의 영화는 되도록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리라 마음을 먹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 바로 이응일 감독의 <불청객>이다. 이응일 감독은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영화 전편을 올려놓아서 누구나 손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서울시 관악구의 어느 자취방. 고시생 진식은 오늘도 공부에 여념이 없다. 함께 살고 있는 취준생 강영과 응일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빠져 자고 있지만, 시골에 혼자 계시는 홀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그는 오늘도 양치를 하며 민사소송법 제90조 소송대리권의 범위...를 중얼중얼 외우고 있다. 그 때 택배가 하나 도착한다. 택배에는 ‘개봉이파괘되면계약을성맆댄것으로간주함니다’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꺼림칙한 마음에 쉽사리 열지 못하던 그 때, 방금 잠에서 깬 응일이 방에서 나와 택배를 뜯어 버린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은하계 론리스타 금융그룹에서 포인트를 관리하는 ‘포인트맨’. 그는 진식, 강영, 응일의 수명을 지금 포인트로 적립하면 나중에 영원한 삶으로 전환하여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들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에 당황하며 거부한다. 이에 화가 난 포인트맨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라!’라고 일갈하며 이들의 자취방을 우주 어딘가로 날려버린다. 여기서부터, 이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SF를 독립, 아니 이 정도라면 개인 영화라고 부르는게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 규모에서 시도하는건 매우 드문 일이다. 개념이나 논리적인 부분으로 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눈으로 보이는 우주를 구현하겠다는 야심은 대단하다. 특히 영화의 가장 주요한 아이디어인 ‘자취방 창문 밖은 우주’라는 점을 쉽게 처리하고자 한다면 그냥 말로만 때웠으면 될 텐데 굳이 창문을 열고 우주를 보여주며 불사조 성운, 블랙홀까지 구현하고 있다. (우리 같은 백수가 밖에 더 있어! 라고 외치는 장면 뒤에 국회의사당이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이 붙어있다.) 상업영화에 비교할 수는 없는 CG이지만, 영화 전체의 톤앤매너와 착붙는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서 이 만듦새 자체가 영화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여러번 돌려볼 수록, 이상하게 촬영과 CG가 절묘하게 훌륭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데 이거 혹시 진짜 되게 잘한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글을 다 쓸무렵에는 아. 진짜 잘 만든거 맞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농담들이 정말 재밌어서 많이 웃었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괜시리 반복적으로 리코더를 찾는 강영이나(중반부 쯤에 왜인지 ‘울밑에 선 봉선화’를 연주한다), 포인트맨의 초능력으로 갑자기 영어만 사용하게 된 응일, 포인트맨과 싸우다가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해서...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 호강시켜드려야 되는데... 이젠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씁쓸히 되뇌이는 진식 등 전반적으로 뜬금없고 어설프며 지금 보면 예스러운 농담들이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고시생, 취준생이라는 신분으로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어색한 위치가 되어 곰팡이 가득한 자취방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청년들. 그들에게 ‘수명’을 강탈하려는 포인트맨. 그는 자취방 브라더스의 수명을 앗아가려는 명분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성공한 사업가와 정치인을 욕만 할 뿐. 그들을 따라잡려 노력할 의지도 없는 녀석들! 인구는 해마다 감소하는데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으며 산소와 영양분을 소비하며 지구의 공간만 차지하는 놈들! 너희는 잉여인간이야! 쓰레기 같은 쓰레기들! 빌어먹을 루저들! 내가 너희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을 할 기회를 주겠다.”
그 보람된 일은 수명을 포인트로 바꿔 미국 앨러배마에 거주 중인, 민간의료보험을 경영하며 국가에 헌신한 77세의 잭 도슨씨에게 넘기는 것이다. 너무 직접적이라 뭐 더 해설이 필요없는 정도의 직유다. 

마치 UCC를 보는 듯한 화질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2006년쯤부터 촬영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괜찮은 화질이었을 것이다. (SONY의 PD-150을 사용했다고 한다.) 4K, 8K도 접하기 쉬운 지금 본다면 아쉬울 순 있지만, 이 부분만 견딘다면 굉장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며 여러번 돌려보았는데, 묘한 것이 개봉 당시에 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재밌고, 이야기 또한 더욱 시의적절하게 느껴져 웃다가 괜히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나 꼭 한 번쯤은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2010년에 봤을 때보다 훨~씬 크게 들었다. 이응일 감독은 <불청객> 이후 몇 편의 단편, 웹드라마 등을 연출했고 현재는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신다고 한다. 언젠가의 그의 작품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이런 재능을 단 한편으로 갈음하는 건 관객으로서 정말이지 너무도 아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불청객>은 이응일 감독의 유튜브 채널 ‘토토모’에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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