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의 역사, 현존 가장 오래된 영화관: 애관극장

by.조현나(씨네21 기자) 2023-06-14조회 4,260

한국영상자료원이 2022년부터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국영화 문화와 산업,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입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기록을 잘 보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는 아카이브 기관이 해야 하는 역할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미래에 역사가 될 현재의 자료들을 기록하고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일 역시 아카이브 기관의 중요한 임무라고 할 것입니다. 최근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의무제출제도를 통해 자료원에 보존되고 있지만, 그 외 다양한 한국영화와 영상의 자료들은 여전히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영화가 기획되고 만들어지며 논의되고 보여지는 곳, 그 장소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에 영상자료원은 2022년부터 “한국영화현장기록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첫 해에 허리우드극장, 오오극장(대구), 미림극장(인천), 애관극장(인천), 명동CGV씨네라이브러리, 아카데미극장(원주), 스튜디오 CELL 등 8개의 장소들과 관련된 분들의 증언을 기록하였습니다. 첫 해 사업이다보니 사라질 위기에 있거나 기록화가 시급하다고 판단된 (단관)극장들이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오늘 한국영화 산업과 문화의 다양한 공간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획·진행: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895년에 개관한 극장

1895년에 개관한 애관극장은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자 13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한국 근대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조선 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공연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란 점에서 애관극장의 연혁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895년, 인천의 사업가인 정치국이 애관극장의 전사인 협률사를 설립했다. 협률사는 서울 정동에 지어진 동명의 공연장인 협률사보다 7년, 종로의 영화관인 단성사보다 12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극장이다. 정치국은 현재의 애관극장 터에 벽돌 건물을 쌓아 올렸고 협률사를 <박첨지> <흥부놀부전>과 같은 인형극부터 창극, 신파연극, 남사당패 등의 공연을 올리는 공연장이자 영화관으로서 활용했다. 이곳을 중심 무대로 활동했던 배우 서일성은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에서까지 명성이 자자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7면 구락부’는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그리고 연출가 정암을 배출했다.
 

애관극장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통로

1911년, 협률사는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에 맞춰 잠시 축항사로 이름을 바꿨다가 1921년경에 애관으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애관은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으로 탈바꿈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애관극장 부근의 경동거리는 ‘시네마 천국’과 다름없었다. 1927년 애관극장은 관객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증축됐으며 이 건물에서 1930년, 인천 최초로 발성영화인 <야구시대>가 상영되었다. 1935년에는 애관극장의 한 해 입장객이 총 15만 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사격으로 인해 인천의 경동 일대가 폐허가 됐다. 경동에 위치한 애관극장 또한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은 극장이 무너진 자리에 임시 건물을 올려 영화를 계속 상영했고, 1960년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애관극장이다. 

1972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의 부친 탁상덕 전 대표가 애관극장을 인수했다. 1989년에는 인천 최초로, 그리고 전국에서 네 번째로 70mm 상영관이 개관했다. 이는 현재 애관극장의 1관이다. 1관은 영화 상영관인 동시에 나훈아, 하춘화 등 유명한 가수들이 돌아가며 공연을 펼친 무대였다. 당시 애관극장에 걸린 공연과 영화를 보고 박정자, 한명숙, 최불암, 전무송 등의 가수와 배우들이 꿈을 키웠다. 2000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가 극장을 인수했다. 탁경란 대표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대항할 목적으로 2004년 5개관으로 증축했다. 

접근성이 좋은 극장

동인천역에서 신포역 방향으로 15분 정도 걸어 내려간 뒤 개항로로 좌회전해 올라가면 좌측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구조물이 번갈아 놓인 애관극장이 나타난다. 애관극장의 본관 입구로 들어서면 1관과 휴게실, 작은 매점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애관극장은 본관과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관에는 1관, 신관에는 2~5관이 위치한다. 특히 1관은 공연장처럼 1, 2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스크린 아래에 큰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한때 공연장으로도 활용됐던 애관극장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본관과 신관은 긴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다. 해당 복도에는 애관극장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연표, 신문 기사, 포스터, 사진 등의 자료가 걸려있다. 한때 오락기가 놓여있던 신관의 휴게 공간도 현재는 오락기를 빼고 그 자리에 극장 관련 자료를 걸어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2층으로 구성된 애관 1관 내부

1895년 인천 중구 개항로에 신설된 애관극장은 계속 같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 극장 근처엔 인일여자고등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송도중학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등 총 6개의 학교가 있으며 극장의 오른편에 인천중구청, 차이나타운, 동인천역부터 답동사거리까지 길게 뻗은 동인천 지하상가가 위치한다. 애관극장은 접근성이 좋은 극장이다. 동인천역과 인천역, 신포역에 둘러싸인 모양새인데 1호선 동인천역과 분당선 신포역에선 극장까지 도보로 10분, 1호선 동인천역에선 버스로 10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또한 840m 떨어진 곳에 인천항이 있어 애관극장 옥상에 오르면 바다를 볼 수 있다. 항구 근처에 자리한 경동은 오래전부터 인천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교통의 요지이자 답동성당, 능인사 등의 종교 시설도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동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인형극장, 동인천극장, 동방극장, 키네마 등 한때 동인천 일대에 19개의 독립예술극장이 자리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전부 문을 닫고 애관극장과 미림극장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미림극장은 애관극장에서 약 7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한국영화사의 과거와 현재가 오롯이 기록된 공간으로서, 애관극장은 128년째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존을 위한 움직임

2017년, 애관극장에 관한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를 촬영할 당시 윤기형 감독이 탁경란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극장의 매각 소식을 전해 들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게재하면서 애관극장의 경영난 소식이 처음 알려졌다. 인천 시민들과 인천시의 움직임으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2021년 애관극장의 매각 가능성이 다시금 거론됐다. 극장을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지난 2022년 4월 18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이희환 대표가 모여 ‘애관극장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상호 협약’을 맺었다. 하나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인천광역시장이 바뀌었고 애관극장의 향후 향방에 관해선 현재 명확히 정해진 바가 없다.
 

"We ♥ 애관"이 적힌 현수막. 현수막에는 애관의 공공매입과 공공적 활용을 후원하는 개인 및 단체의 이름이 적혀있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인천 중구 개항로 63-2
2. 설립일: 1895년
3. 대표자: 탁경란
4. 규모: 264.4m² (스크린 크기 1관 16.4*7m, 2관 7.5*3.2m, 3관 8.5*3.5m, 4관 6.7*3.8m, 5관 6.3*3.3m)
5. 극장 구성: 총 5개관 (좌석수 1관 403석, 2관 114석, 3관 112석, 4관 98석, 5관 81석)
6. 운영시간: 평일 10:00~23:00 금토 9:00~23:00 (금, 토 심야 상영 있을 경우 9:00~2:00)
7. 입장료: 조조, 경로 5,000원, 학생 7,000원, 일반 8,000원
8. 공간 구성: 상영관 5관, 매점 1개, 휴게실 3개 (1관 휴게실 50석, 2~3관 휴게실 26석)


인터뷰: 윤기형 감독(<보는 것을 사랑한다> 연출)


윤기형 감독

조현나_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윤기형_안녕하세요. 저는 윤기형 감독입니다. 인천에서 태어났고요. 얼마 전에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조현나_<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윤기형_애관극장이 1895년에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요. 최초의 극장인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잘 모를까.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5년 정도 극장에 관해 공부하고 관련 자료들을 준비하며 만들었습니다.

조현나_애관극장에 관한 자료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윤기형_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지금의 극장 바로 위였어요. 다른 길이 없었고 서울로 가려면 무조건 이 도로로 가야 했기 때문에 그 길목에 극장이 설립됐어요. 당시 개항장 쪽은 일본인 마을, 지금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곳엔 중국인 마을, 여기는 조선인 마을이 있어서 이곳에 조선인이 극장을 세운 거였죠. 1928년 <별건곤>이라는 대중잡지에 이 외리에 관한 묘사가 재미있게 돼 있는데요. “쨍쨍거리는 불당소리, 땡땡거리는 성당 소리와 기생의 장구 소리, 그리고 극장에서 관객들을 모으는 악대의 소리가 어우러진 곳이 이쪽 외리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옆에 능인사라고 절이 있거든요. 또 옆에 답동성당이 있고요. 그리고 인천 중구 용동 일대엔 기생집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또 극장이 있었고. 극장에서는 관객들을 모으려고 밥을 팔고 했거든요. 불당과 성당과 기생집과 극장이 한 거리에 어우러져 당시의 모습이 굉장히 재밌게 묘사가 됐던 거죠. 

조현나_애관극장은 인천 신포역과 동인천역 사이에 있고 근처에 학교나 상가도 많습니다. 인천의 번화가에 자리한다는 점으로 인해 생긴 특성도 있을까요?
윤기형_동인천역, 신포동, 경동 이쪽이 인천의 명동이었죠. 현재는 옮겼지만 전엔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10여 개가 근처에 다 몰려 있었어요. 그러니까 늘 사람이 바글바글했죠. 인천에 70mm 상영관을 설립한 극장도 애관극장이 최초입니다. 서울에서 좌석제를 실시할 때 인천은 아직 좌석제를 실시하지 않았었거든요. 관객들이 하도 많아서 자리를 잡으려고 영화 끝나기 5분 전에 극장에 들어가고 그랬어요. 간신히 자리를 잡고 보면 이제 영화 결말을 두 번 보는 관객도 있었죠.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어요. 서서 보는 관객들이 앉아서 보는 관객의 두 배는 됐으니까요.
 

애관극장 4, 5관 영사실과 조상열 영사기사

조현나_애관극장의 실내 시설에 관해서도 취재를 진행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인상적이던가요?
윤기형_지금의 극장은 1950년대에 실추된 뒤, 1960년에 새로 지어진 거거든요. 옛 극장의 흔적이 사라진 게 좀 아쉬워요. 여기 영사실에 옛날 35~70mm 겸용 영사기가 있어요. 영사 기사님께서 아직 잘 돌아간다고 한번 보여주셨거든요. 디지털 영사기 옆에 옛날 아날로그 영사기가 있으니까 그런 점도 되게 신기했죠.
 

애관극장 1관 영사실에 보존되어 있는 필름 영사기

조현나_다큐멘터리를 위해 100여 명 정도를 인터뷰하셨죠.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 있거나 애관극장에서 영감을 받아 꿈을 키운 영화인들이 영화에 등장하는데요. 어떤 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셨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윤기형_박정자 선생님은 어릴 때 극장 근처에 사셨고, 당시 극장에서 공연을 보며 감동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한명숙 선생님은 인천의 태양 악극단에서 활동하며 첫 데뷔 무대를 애관극장에서 올리셨죠. 전무송 선생님은 애관극장에서 간판 그리는 일을 하셨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조현나_관객의 경우 주로 어떤 분들이 애관극장을 찾으시던가요.
윤기형_젊은 사람들은 드물고 저같이 추억이 있거나 저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주로 오시죠. 제 아이가 여기에 왔을 때 극장에 대한 느낌을 들어보니 '매우 낡았다, 오고 싶지 않다, 여기서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조현나_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어떤 공간인가요?
윤기형_제 나이 또래의 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당연히 한 번쯤은 와봤던 극장입니다. 안 와볼 수가 없는 극장입니다. 저 역시도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연애 시절, 결혼 후에도 와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봤으니까요. 그러니까 인천 시민이라면 마음 속에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나 사연 하나씩은 무조건 있다고 보면 돼요.

조현나_애관극장 말고 미림극장도 같이 취재를 하셨잖아요. 두 극장의 특성은 어떻게 다른가요?
윤기형_애관극장은 최초의 극장이고 미림 극장은 1957년도 전쟁 이후에 생긴 극장입니다. 전쟁 후에 극장들이 동네마다 들어섰는데 그때 송현동에 들어선 게 평화극장이고, 1958년에 평화극장의 이름이 바뀌어서 미림극장이 됐습니다. 미림극장도 잠시 폐관했다가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했으니까 그런 걸 따지고 보면 대단한 극장이죠.
 

애관극장 1관 로비 전경

조현나_탁경란 대표 취재를 하면서 애관극장의 매각 소식을 접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쓰면서 해당 내용이 대대적으로 알려졌죠. 이후로 극장을 돕기 위한 활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윤기형_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 관객이 점점 줄어드니 경영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죠.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가 결성이 돼서 많은 분들이 애관극장을 살리고자 했고 인천시에서도 협상에 나섰습니다. 현재로선 인천시가 극장을 매입해 기증하는 방법이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현나_그밖에 애관극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윤기형_가장 좋은 건 관객들이 많이 찾아주는 거죠. 근데 젊은 사람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하고, 나이 드신 분들이 추억 삼아 오시니까 그런 것들이 안타까운 거죠.

조현나_애관극장은 어떤 의미를 지닌 그장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윤기형_유일무이입니다. 다른 극장이랑 비교할 수가 없어요. 고일 선생님의 <인천석금>이라는 책 그리고 최성연 선생님의 <개항과 양관역정>이라는 책에서 '1894년~1895년 청일전쟁 때 정치국이 벽돌로 극장 협률사를 지었다'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애관극장의 기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축항사, 애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극장입니다.

조현나_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기형_아직 애관극장이 오랜 역사가 있는 최초의 극장인 걸 모르시는 분들도 많아요. 애관극장에 많이들 오셔서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애관극장이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극장이구나 같이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이희환 교수(인천대학교,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대표)
 

이희환 교수

조현나_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희환_저는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의 학술연구교수로 연구 활동하고 있는 이희환이라고 합니다.

조현나_애관극장에 관해 오랜 시간 연구를 이어오셨는데요. 이를 토대로 애관극장의 변천사 그리고 역사에 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희환_사실은 개항장이 제일 먼저 생긴 곳이 바로 인천이거든요. 또 조선인이 극장을 만든 것도 인천이 최초이고 그것이 바로 애관극장의 전신이었던 협률사라는 극장입니다. 협률사라는 극장은 청일전쟁 전후에 만들어졌다는 회고록이 남아있습니다. 1900년대 넘어가면서 여러 가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처음에 극장을 만들었던 정치국이라는 사람이 매각을 하면서 축항사로 이름이 바뀝니다. 거기서 이제 일본에서 유입돼 들어오는 신파 연극이 공연됐던 장소가 되는 거죠. 축항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신파 공연장으로 많이 활성화됐던 이 극장은 1910년대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무단 통치 속에서 많이 위축됩니다. 1920년대 새로운 인수자에 의해 지금의 애관이라는 이름이 극장명으로 사용되고, 애관극장이 조선 식민주의 시대에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문화시설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때 영화의 전신인 활동사진도 상영하고 때로는 학생들의 학예회, 정치적인 집회도 열리고 공간을 변형해 권투 시합도 하고 무용 발표회도 하고,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식민지 시대 내내 담당했던 극장인 셈이죠. 그래서 애관극장이야말로 살아있는 인천 근대 문화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인천의 문화, 조선인의 문화를 일구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됐던 곳이 바로 애관극장입니다.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까지도 굉장히 많은 공연들이 여기서 펼쳐졌습니다. 전쟁 때 일부 피해를 받기도 했습니다마는, 1960년대 이후에는 극장도 새로 신축해서 더 확장되고 영화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풍성한 시기를 거쳐 온 것 같습니다.
 

로비에 전시된 애관극장 연표 사진

조현나_최초 애관극장이 경동의 현재 자리에 건물을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희환_애관극장 앞의 길이 인천 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육로였어요. 그리고 일본 조계와 조선인 조계의 경계가 바로 극장 앞의 도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일본이 전관 조계지역에 극장을 만들었고 정치국이라는 사업가가 ‘극장이 흥행이 되겠구나’라는 사업적 발상에서 시작해 조선인 조계에다 극장을 만든 겁니다. 이 거리를 사리재라고 하는데, 사리재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상권과 연결되어 있는 조선의 상권 지역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 의미가 있고, 1899년에 경인선이 만들어지고 전철역과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에 극장이 위치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극장 바로 앞에 프랑스 성당도 있고 또 길 건너에는 미국의 감리 교회가 있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조현나_애관극장이 한국 영화사, 한국 극장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희환_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극장으로서 전통 연희 공연을 시작으로 근대 공연장, 근대 영화관으로 바뀌어 간 극장, 식민지 시대 우리 극장의 역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극장이 애관극장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인들이 1883년 인천을 개항시킨 다음에 인천을 교두보로 삼아서 경성으로 진출하려는 목적 하에 자기들의 극장 문화를 가져왔는데, 이것에 맞서서 조선인이 조선인 극장을 만들었다는 게 아주 실험적이면서도 획기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근대 문화를 만들어 나가려고 했던 그 움직임이 애관극장의 전신인 협률사로부터 시작해 126년이 넘는 역사가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도 이 단관극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굉장히 소중하고 귀중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애관극장 2관 내부

조현나_과거의 애관극장은 여러 공연을 올리고 다양한 영화를 상영할 만큼 번영했지만, 현재는 운영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선 현재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의 대표를 맡고 계시기도 한데, 애관극장을 위해 모임 차원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희환_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 극장에 밀려서 복합상영관 형태를 만든 것까지는 지켜봤지만, 자주 오진 못했죠. 그런데 4년 전쯤 갑자기 매각 소식이 들려왔어요. 그렇게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나서기도 하고 또 인천시도 나서서 사정을 알아보면서 상황이 가라앉았었는데, 2021년 3월에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을 받아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죠. 다시 2차 애사모 모임을 갖고 기자회견도 하면서 나서게 됐고요. 이번엔 극장주 개인에게 손해 보면서까지 이 극장의 역사를 유지하라고 해서는 안 되겠다, 인천시가 나서는 방법밖에 없겠다고 주장하면서 인천시와 민관협의체도 구성하고 협의를 계속 벌여왔죠. 그래서 이번 4월 즈음에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님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과 모여서 애관극장이 역사를 이어나가도록 서로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노력하자는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조현나_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이희환_바뀐 시장님께서 꼭 애관극장을 인처의 소중한 문화공간으로, 공공 공간으로, 역사의 자부심을 지닌 공간으로 발전시켜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민들도 애관을 더 많이 찾아주시고, 영화 관람과 더불어 근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명소로 애관극장이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필자: 조현나(씨네21)
사진촬영: 최성열(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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