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뉴스를 통해 보는 남북 단일팀의 역사

by.공영민(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 2018-09-10조회 1852
시상대 위에서 한반도기를 바라보는 단일팀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개회식에 입장하는 한국 선수단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에서 개최되었던 제18회 아시안게임이 2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지난 9월 2일 폐회했다. 인도네시아는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이후 두 번째로 대회를 개최했다. 올림픽과 2년 차로 열리는 아시안게임인데 이번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은 그런 면에서 흥미롭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2년 후인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이 개최되었는데 이번에도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46년 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연이어 같은 개최지가 선정된 것은 우연일 것이다. 그런데 두 대회를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에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그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남북 단일팀 역사의 흔적이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과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진행된 남북 단일팀 협상은 2018년 현재 상황과 대비되어 더욱 흥미롭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개회식  & 1964년 도쿄 올림픽 폐회식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개회식(좌), 1964년 도쿄 올림픽 폐회식(우)

 
아시안게임은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6개국 대표가 아시아 선수연맹을 창설해 올림픽처럼 4년마다 국제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시작되었다. 1950년 제1회 대회가 준비 미비로 1951년으로 연기되어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제2회 필리핀 마닐라 대회부터 참가하기 시작했고, 1986년 서울, 2002년 부산, 2014년 인천 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1950~1960년대 저개발국 지원에 경쟁을 벌였던 미소 간 냉전정책으로 아시아 각 지역에서 다양한 국제행사들이 개최되었는데 스포츠 행사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반공연대로 묶여 정치‧사회 국제회의뿐만 아니라 서구의 행사들을 모델로 하는 영화제, 예술제 등의 문화행사까지 다양한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이러한 국제대회 참가 소식들은 당연히 프로파간다의 최전선에서 활용되었다.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대회 소식은 미국 선전기관인 미 공보원의 ‘세계뉴스’를 통해 전쟁 중인 한국에도 전해졌다.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지만, 이 시기 아시안게임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서야 독립된 나라들로서 신생의 국가기반을 수립하려 하였으나 또다시 뜻하지 않은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공동의 운명”1) 을 갖고 있는 참가국들의 ‘스포츠 민족주의’에 적극 활용되었다.

   제1회 뉴델리 아시안게임 현판 & 시상식에서 선수들을 축하하는 네루 수상
   제1회 뉴델리 아시안게임 현판(좌), 시상식에서 선수들을 축하하는 네루 수상(우)
 
그런 면에서 1962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대회는 냉전체제 하 열강 속 아시아의 위치를 잘 보여주는 대회였다. 아시안게임 뉴스는 대회의 위용과 스포츠 정신의 고귀함 그리고 한국 선수들의 선전을 위주로 대중에게 전달되었지만, 물밑으로는 대회를 둘러싼 정치적 이슈가 뜨거웠다. 이 대회에서 당시 중립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위치로 인해 중공과 중화민국,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남한과 북한의 갈등이 전면에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중공과 북한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가 중화민국과 이스라엘의 참가를 불허함에 따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비롯한 스포츠 세계 기구의 관여와 냉전의 양 진영에서 정치적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IOC는 아시안게임에 대한 후원을 철회할 거라고 경고했고, 자카르타 대회에 아시안게임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관해서도 결정이 번복되는 등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진통을 겪었다.

이스라엘 선수단 자리가 비어있는 개회식장의 모습
이스라엘 선수단 자리가 비어있는 개회식장의 모습
 

1962년 자카르타로 출발하는 한국 선수단
1962년 자카르타로 출발하는 한국 선수단

김포공항에서 한국 선수단을 배웅하는 시민들
김포공항에서 한국 선수단을 배웅하는 시민들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 스포츠대회의 남북한 단일팀 문제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북한의 참가 문제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북 단일팀의 문제는 남한과 북한 양쪽이 당시 확산되고 있던 각종의 국제 스포츠 행사에 참여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미소 양 진영이 ‘세계화’를 목표로 경쟁적으로 펼치는 국제 대회들에서 정치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는 남북한의 문제는 동서독의 문제와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포츠를 통한 세계 평화를 표방하는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남북한과 동서독의 단일팀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중에서도 남북한 단일팀 문제는 냉전체제 하 동아시아의 정세와 긴밀히 연관된 정치적 문제였기 때문에 도쿄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1964년 시민회관에서 열린 도쿄 올림픽 출정식
1964년 시민회관에서 열린 도쿄 올림픽 출정식 

하네다 공항에서 한국 선수단을 환영하는 재일교포 인파

하네다 공항에서 한국 선수단을 환영하는 재일교포 인파

남북한 단일팀의 문제는 1957년 제53차 IOC 회의 안건에 상정되며 불거지기 시작했다. 1958년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시작된 IOC의 남북한 단일팀에 대한 권고는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강도가 높아졌다. IOC는 남북 단일팀 협의에 남한이 불응하면 북한을 단독으로 올림픽에 출전시키겠다며 남북한의 합의를 촉구했다. 올림픽뿐만 아니라 육상, 권투 등 개별 종목의 국제협회에서도 남북한 단일팀 사안을 내세우며 전방위로 압박을 가했다. 남북한 단일팀 협상은 2년여에 걸쳐 중립지역인 홍콩과 스위스에서 이루어졌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63년 8월 협상은 완전히 결렬되었고, 1963년 10월 IOC는 남북한이 개별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을 승인했다. 결국 열강들이 올림픽이라는 큰 대회를 앞두고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 질서를 내세워 프로파간다의 최전선에서 활용하려 했던 남북한 단일팀 구성은 성사되지 못했다. 따라서 도쿄 올림픽과 관련해 급증한 뉴스 영상 중에 남북한 단일팀에 관한 뉴스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1963년 남북 단일팀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는 황엽 단장, 협상 결과를 보고하는 황엽 단장
1963년 남북 단일팀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는 황엽 단장(좌), 협상 결과를 보고하는 황엽 단장(우)

결국 올림픽이라는 ‘국제‧스포츠‧대회’를 통해 냉전의 한복판에서 아직 전쟁 중인 남북한을 ‘코리아’라는 단일 명칭 아래 잠시 감춰보려던 프로파간다는 실패로 돌아갔다. 도쿄 올림픽 뉴스는 단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올림픽, 대회의 위용과 위상, 한국 선수들의 선전을 알리는 데 활용되었다. 남북 단일팀 구성은 이후에도 올림픽, 월드컵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제안되었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냉전 종식 후에야 성사되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1991년 4월 일본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코리아’ 팀이었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장 앞에서 단일팀을 환영하는 재일교포들,시상대 위에서 한반도기를 바라보는 단일팀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장 앞에서 단일팀을 환영하는 재일교포들(좌), 시상대 위에서 한반도기를 바라보는 단일팀(우)

1) 『경향신문』, 1954년 5월 3일 자 2면.

출처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 <코리안뉴스>(제441호, 제442호), <리버티뉴스>(제474호, 제582호, 제588호)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 <대한뉴스>(제380호, 제389호, 제429호, 제488호, 제18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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