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How Green Was My Valley - 그의 계곡은 푸르지 않았다 존 포드, 1941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4-06-27조회 14,996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How Green Was My Valley (1941) - 그의 계곡은 푸르지 않았다

이번 회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How Green Was My Valley>(1941)를 말하려 한다. 청컨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라면 먼저 영화를 보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이 글을 먼저 읽는 것이 혹시나 영화를 볼 때의 충만한 감흥을 빼앗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의 한 측면일 따름이다. 존 포드의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지만 아름답고 슬프고 감상적이고 냉혹하면서 괴이한 이 영화를 아무런 사전 정보와 지식 없이 만난다는 것은 충분히 행복한 일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존 포드의 ‘영예의 시기’(1939~1941)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화이면서, 아마도 그의 영화 생애에서 가장 많은 세속적 영예를 가져다준 영화일 것이다. 하워드 혹스의 <요크 상사>와 더불어 그해 최고의 흥행작 대열에 올랐고,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해 6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둬들였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데뷔작으로 꼽히는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도 같은 해 여러 부문의 오스카 후보에 올랐으나,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미술상을 존 포드에게 넘겨주고, 각본상만 수상했다.

개봉 당시 주류 평자들도 이 영화에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리즘 비평가 중 하나였던 보슬리 크로더는 개봉 다음날 「뉴욕 타임즈」(1941. 10. 29.) 기고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거친 현실의 날카로운 대조”를 “시적 이미지”로 빚어낸 “놀라운 걸작”이라고 평했다.

이런 사실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시민 케인>을 반세기 가까이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아온 후대 비평가들 사이에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미운털이 박혀 오랫동안 폄하되어온 배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후대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 감상적 주류영화이며 기껏해야 오스카 맞춤형 작품 정도로 간주했다. 데이비드 톰슨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눈물과 석탄 가루의 흉측한 뒤범벅”이라고 혹평했다(「Biographical Dictionary of Film」).

<수색자> 외엔 존 포드의 모든 영화를 감상주의와 폭력성의 교활한 결합으로 간주하는 철저한 포드 비판론자인 데이비드 톰슨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그의 책에 실린 간략한 존 포드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악랄한 험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존 포드의 열렬한 지지자인 린지 앤더슨조차 이 영화가 “가장 풍성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지만 “장식적이고 ‘실용적’(applied) 기교로 연출”되었으며 이 때문에 “포드의 다른 영화에 비해 더 많은 오스카를 받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다소 부정적으로 논평했다.(「About John Ford」)

그토록 널리 알려진 영화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오해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당겨 말하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주류적이지도 고전적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단순히 모던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괴이한 영화다. 이 영화의 괴이함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재탐구되어야 할 존 포드의 걸작이며,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이 존중받고 사랑받게 될 것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50년 동안 살아온 탄광 마을을 이제 떠나려는 휴 모건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노스탤지어의 정조가 깃든 제목과 유년기의 회고담이라는 설정만으로도 감상적 멜로드라마라는 이 영화의 인상은 운명처럼 정해져 버린 것 같다. 이 영화가 얻은 대중적 성공과 비판적 논평은 이런 최초의 인상이 낳은 기대를 존 포드가 저버리지 않았음을 뜻할 것이다.

물론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존 포드는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 훼손한다. 이 영화의 괴이한 점 가운데 하나는 충족과 훼손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충족인지 훼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장면들과 끊임없이 마주한다. 많은 비판자들이 이 영화에서 충족의 면만 보았다면, 우리는 이제 훼손의 면을 볼 필요가 있다.

휴 모건이라는 화자(내레이터)의 위치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면서 일인칭 화자이다. 첫 장면은 스카프에 책을 싸는 그의 손동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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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모건의 내레이션과 함께 제시되는 어린 시절의 플래시백이 영화의 거의 전부다. 생긴 지 오래지 않은 웨일즈의 탄광 마을에 사는 가난한 광부 가족의 이야기. 휴는 모건 부부의 6남 1녀 중 막내이며 휴를 제외한 남자는 모두 광부이고 어린 휴도 곧 광부가 된다. 고단하지만 정겨운 공동체적 삶을 누리던 휴의 가족과 마을은 탄광주의 횡포, 파업과 해고, 불의의 사고로 무너져가고 유년의 낙원처럼 보이던 푸른 계곡(#2)은 점점 석탄으로 검게 물들어간다.

린지 앤더슨조차 ‘오스카적’이라고 간주했던 이 이야기는 과연 주류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충실한가.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 사람은 후대의 시네필 비평가가 아니라 오히려 구세대 주류 평자인 보슬리 크로더였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그는 이 영화가, “하층민의 삶의 탁월한 디테일 묘사와 그들의 섬세한 감정표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의 구체적 패턴을 구성하지 못했으며” “영화의 의도가 삶의 형식 없는 흐름을 따르는 것이긴 하지만, 산발적인 에피소드로만 이루어져 있어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크로더는 이것이 약점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존 포드는 놀라울 정도로 극적 구성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이만큼 에피소드 중심적인 포드의 다른 작품은 그가 가장 아끼는 영화 중 한편인 <웨건 마스터>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 중 한편인 <세계는 전진한다 The World Moves on> 정도다). 여기엔 중심적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으며 모건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점진적 해체와 몰락을 초래하는 사건들이 수평적으로 나열될 뿐이다. 이 영화의 강렬한 정감은 사건들의 극적 구성이 아니라, 어린 휴 모건의 순결한 얼굴과 표정과 말투에서 비롯된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애처로운 아름다움이 있어 그가 나쁜 선택을 하는 경우조차 그의 편에 서야 한다고 믿게 만든다.

어린 휴의 마취적 아름다움에서 이 영화에 대한 매혹과 비난이 동시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매혹된 이들은 그토록 순결한 아이의 거듭된 불행에 눈물을 쏟았고, 비난한 이들은 존 포드가 아이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켰다고 보았을 것이다. 사회적 현실을 소재로 삼은 멜로드라마가 사회적 불의의 최종적 희생자를 아이로 설정하는 것, 관객은 “동정의 형식으로 (아이라는) 약자에게 막대한 감정적 에너지를 투자”하고 그로부터 정서적 안정을 얻는 것(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그 과정을 비판적 논자들이 나르시시즘적인 도피로 간주하는 것 등은 영화 세상에서 드물지 않게 보아온 광경이다.

하지만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 대한 매혹과 비난은 한 가지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이 영화는 어린 휴의 현재적 드라마가 아니라 늙은 휴의 회고담이라는 사실이다. 반복건대 회상의 자의성 자체가 모티프가 아닌 한 관객인 우리는 영화의 플래시백을 영화 내적 진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약속된 가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플래시백에서의 자의성의 은밀한 작동이 이 영화의 비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첫 시퀀스의 모종의 얼룩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얼룩은 즉각적으로 의식된다기보다 플래시백 서사의 기묘한 점들이 그것을 거꾸로 되짚게 만드는 편에 가깝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맏형 이보어가 탄광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에게는 임신한 아름다운 아내 브론윈이 있다. 모건 가족에게 가장 끔찍한 불행이 닥친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다뤄지는 방식은 이상하리만큼 간략하며 심지어 건조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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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장례식이 치러지는 집 안은 깊은 어둠과 침묵에 잠겨 있다(#3). 그때 어머니는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브론윈의 출산을 돕고 내려와서 “손자가 태어났다”고 태연한 말투로 아버지에게 알린다.(#4) “하나가 가니 또 하나가 왔군” “그런 이상한 소리는 며느리하고나 해요” “조용히 해”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이어지는 대화에서 어머니의 말과 표정은 자식을 잃은 어미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시큰둥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거의 매 시퀀스의 화자이자 목격자였던 휴 모건이 유독 이 시퀀스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비극적 사건을 맞은 아이의 클로즈업에 한 쇼트도 할애되지 않았을까. 다음 시퀀스에 실마리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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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 성적표를 보며 가족들이 정담을 나누고 있다(#5). 아버지는 휴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묻는다. 휴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사이, 후경에 있는 브론윈이 어머니에게 “매일 이보어의 신발과 옷을 준비하지만 그는 오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휴는 그것을 듣고 있다(#6). 아버지가 다시 장래 소망을 묻자 휴는 “광부가 될래요”라고 답한다. 만류하던 아버지는 결국 “네 뜻대로 해라. 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는 마라”고 말한다. 곧이어 휴는 브론윈의 집으로 옮기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허락을 얻는다.

이 일련의 시퀀스들은 다소 끔찍한 상상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결혼 전 브론윈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휴는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사랑에 빠졌고, 그것은 나만의 비밀이 되었다”고 보이스 오버로 말했다. 휴는 브론윈의 남편 자리, 즉 맏형 이보어의 자리에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건 이보어가 사라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보어의 죽음은 휴의 말해지지 않은 소망이다. 소망이 성취되자 그는 슬퍼할 필요가 없었고, 곧이어 이보어의 자리를 대신한다. 휴가 광부가 되려는 이유는 이보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것 말고는 이 서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천진한 소년은 가혹한 현실의 순결한 희생자라기보다는 금지된 욕망의 소유자다.

희생자로서가 아니라 휴의 주체성을 중심에 놓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사람은 역시 태그 갤러거다. 갤러거는 공동체에 대한 휴의 맹목적 집착이야말로 그의 불행을 초래한 것이며 이 영화의 표면적 감상주의 아래에는 휴의 천진난만한 선택, 그리고 가망 없는 공동체에 대한 냉소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JOHN FORD-The Man and His Films」). 갤러거는 또한 ‘자라지 않는 소년’이라는 훌륭한 관찰을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플래시백 서사에서 또 다른 기묘한 점이다.

‘이 소년은 극 중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제작자 대릴 자눅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20세기 폭스의 제작 책임자였던 대릴 자눅과 존 포드는 주로 편집권 문제로 수없이 다투었으나, 끝내 서로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존 포드와의 기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사람은 자눅 뿐이었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는 작소 왜소한 아이가 관객을 동정을 끌어내기에 더 적합하며 그러기 위해선 어른 휴가 등장해선 안 된다는 상업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존 포드는 그 아이디어를 확장해 플래시백 서사의 모호한 진실성 혹은 은밀한 자의성에 녹여 넣으면서 미학화했다.(성장한 휴 역에는 타이론 파워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 한 장면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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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모건은 탄광주 아들과 결혼한 뒤 멀리 떠났던 누나가 마을 내 탄광주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누나를 찾아간다. 그런데 탄광주 저택에 들어선 휴는 너무 왜소해 보인다#7). 단순한 착시일까. 그렇지 않다. 다음 장면에서 휴는 대문에 걸린 쇠고리로 노크한다.(#8) 그런데 쇠고리는 까치발을 해야 손에 닿을 정도로 높이 달려 있다. 이 장면이 이상한 이유는 영화는 이미 종결을 향해 가고 있고 플래시백의 시작 시점으로부터, 영화 내적 시간이 짐작건대 2년 이상 흘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를 맞은 누나는 “정말 많이 자랐구나.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대문과 쇠고리가 모두 존 포드의 지시로 세팅된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 장면을 보면 이 쇠고리의 높이는 성인인 하녀에게도 불편할 만큼 높이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9).

이 장면들에서 휴의 과소한 신체가 회상주체의 자의적 왜곡이라면, 성장의 중단은 휴 모건의 소망이라는 뜻이다. 사건들이 연대기 순으로 발생하지만 기묘하게도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휴의 신체 성장이 멈춰있기 때문이며, 모두 죽거나 떠나가지만 그만은 완강하게 집과 탄광 마을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늙은 휴 모건의 소망이다. 그는 이 시기의 기억이라는 장소 안에 영원히 거주하기를 원하며, 그 장소에서는 시간이 현실적 규칙을 벗어난 원환운동을 계속한다. 성장을 거부하고 시간을 원환하려는 그의 소망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패한다.
 
#10
 
이 영화의 또 다른 기묘한 점은 짧은 기간의 플래시백 서사의 마지막 장면이 플래시백의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곳은 우리가 이미 보았던 푸른 계곡의 시대, 모두가 모두를 반기고 아꼈던 낭만적 공동체의 시대다(#10 ). 이 이상한 회귀는 자의적 회상 안에서조차 (가족)공동체 해체, 몰락, 이별, 죽음의 틈입을 차단할 수 없으므로 실재의 폭력이 개입하지 않았던 회상의 시작 시점으로 되돌아갔음을 뜻한다. 우리는 유년기를 이상화하는 영화가 유년기적 낙원의 한 정점에서 끝나는 사례는 수없이 만나왔다. 하지만 현재를 경유하지 않고 플래시백 내부에서 다시 최초의 장면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맺는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첫 시퀀스에서 제시된 늙은 모건의 현재는 이미 유령적인, 부재에 가까운 시점이 아니었던가. 이 유례없는 플래시백은 다시 발견되고 탐구되어야 한다. 여기서 다 말하지 못한 이 영화의 비밀은 훨씬 더 많다.

이상화된 시대의 기억에 거주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최초의 시점으로 영겁 회귀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푸른 계곡의 시대는 그 최초의 시작 시점에 사실상의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아있고(러닝 타임으로는 15분 정도에 불과하다), 이상적 공동체는 사실상 존재한 적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존 포드는 소년의 순결하고도 완고한 아름다움이 주재하는 감상적 플래시백을 내세워, 그것의 매혹을 전시하면서 동시에 내파한다. 여기서 감상(感傷)과 냉소는 식별 불가능하다. 태그 갤러거는 합당하게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존 포드의 가장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영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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