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건 마스터 Wagon Master 존 포드, 1950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6-03-28조회 9,563
웨건 마스터 Wagon Master (1950)

<웨건 마스터>는 여러 면에서 이색적인 서부극이다. 예산은 999,370달러로 포드 서부극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하며, 흥행성적도 당시 포드 서부극의 평균수입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 포드의 영화에 여러 번 등장했던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같은 당대의 스타 대신 무명에 가까웠던 벤 존슨과 해리 캐리 주니어(무성영화 시절 포드 영화의 스타였던 해리 캐리의 아들)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포드의 배우라고 해도 좋을 평생의 영화적 동지였지만 영원한 조연이었던 워드 본드가 여기선 그나마 가장 알려진 배우였다. 또한 이 영화의 스토리는 포드가 스스로 작성했는데, 이것은 1930년 이후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이런 외적인 요소들만으로도 우리는 이 영화가 포드의 가장 개인적인 서부극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웨건 마스터>에는 서부극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카우보이(여기선 말 장사꾼), 무법자, 인디언, 정착민 마을, 황야의 횡단, 마차의 질주, 총격전과 같은 전형적 서부극의 관습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술 취한 광대(철학자), 도박과 춤과 노래와 같은 존 포드 서부극의 특징적 요소들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포함한 어떤 서부극과도 닮지 않았다. 극히 단순하고 느리고 천하태평이며 사소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이 기이한 서부극을 두고 포드는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에 가장 가까운 영화이며,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말했다.

앞서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다루면서 언급했듯이, 이 최고의 서부극 마스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고전적 서부극 혹은 관습적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 그의 비전형적 서부극 중에서도 가장 일탈적인 이 영화를 가장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부르는 포드의 편에 선다면(사견으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부극은 다시 정의되거나 정의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여기엔 문명과 황야, 동부와 서부, 질서와 무질서 같은 서부극의 기본적 대립항이 아예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착민 공동체도 인디언 마을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집단이며, 그저 마차의 경유지일 뿐이며, 악당들이 등장해 여정을 지체시키지만 짧은 액션만으로 퇴치되어 버린다.

말하자면 <웨건 마스터>는 가장 비서부극적인 서부극이다. 장르 연구가들이 포드의 서부극을 다루면서 <웨건 마스터>를 잘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곤경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곤경은 장르 연구가들의 것이지 포드 세계의 여행자인 우리의 것은 아니다. <웨건 마스터>는 우리의 여정에서 가장 멋진 도착지 가운데 하나이며, 또 다른 걸작이다.

스토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100여 명의 모르몬 교도의 마차 행렬과 그들을 이끄는 두 ‘웨건 마스터’(마차 행렬의 가이드이자 한시적 지도자)는 황야의 곤경과 무법자의 위협을 극복하고 모르몬의 정착지를 향해 순례를 계속한다.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극적 장치나 로맨틱한 연애담은 물론, 포드의 다른 걸작들에도 남아있는 감상적 정념조차 없다. 마차 행렬은 몇 차례의 고비를 겪지만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이것이 영화의 거의 전부다. <웨건 마스터>를 ‘사치스런 B급 서부극’이라고 표현한 하스미 시게히코는 여기엔 마차 행렬의 ‘완만한 운동’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풍경이 있고 인물이 있다면, 풍경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의 움직임을 찍는다는 카메라의 가장 단순한 행위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태그 갤러거는 비슷한 뉘앙스로 “이 영화의 미스터리는 인물이 다음에 무엇을 하는가의 미스터리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그의 생동의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질베르토 페레스는 그냥 “소박하고도 위대한 영화”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웨건 마스터>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너무도 유연한 것이어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킨 다음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주제와 정조를 집약한 한 장면을 끄집어내 특별한 찬사를 바치고 싶어도, <웨건 마스터>는, 이상한 일이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멈추기가 어렵다. 아마도 ‘완만한 운동’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면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부드럽고도 민첩한 이 영화의 생동감과 역동성이 교류하는 수려한 멜로디는 평자에게 달콤한 패배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그 아름다움을 직접 말할 수 없다면, 이 특별한 서부극의 뭔가 다른 점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으리라.

#1

<웨건 마스터>의 이례적인 점 가운데 하나는 풍경의 위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들을 순례하면서 풍경의 초월성을 몇 차례 거론한 바 있다. 사건들이 닿을 수 없고, 물질적으로는 이야기 내부에 존재하지만 그것의 아우라가 이야기를 초월하는 풍경의 이중성은 포드 서부극의 발명이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의 풍경은 인물과 친화한다. 풍경과 인물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매우 가깝거나 거의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달리 말해 인물과 풍경이 서로를 건드린다고, 혹은 인물과 풍경이 동행한다고 말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포드의 다른 서부극에서는 이런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인물들은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암석봉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으며, 주로 바위산 위에서 등장하는 인디언을 제외하고는 대개 멀리 암괴로부터 떨어져 평원을 걷거나 마차를 달린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에서 인물은 풍경을 쳐다보고 그것과 접촉하며 때로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샌디는 날카롭게 치솟은 한 암석봉을 쳐다보며 “언젠가 저걸 보고 산타페의 성당을 닮았다고 얘기했잖아”라고 말한다.(#1)

#2


#3


#4

그들은 풍경을 보고 그것을 기억하며, 때로 접촉하고 변형시키며 그들의 여정의 일부로 만든다. 움직임 혹은 완만한 운동이 사건의 일부로 재현되는 게 아니라 순수한 운동 자체로 제시되자 풍경이 움직임을 껴안은 형국, 달리 말해 운동의 초월성이 마침내 풍경의 초월성과 조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풍경과 인물을 함께 담는 쇼트들에서 인물들은 풍경과 가까이 있거나, 아니면 풍경이 보이지 않는 앙각 쇼트로 촬영된다. 마차 행렬을 바위산의 언덕에 길을 만들어서 오른 뒤 그들 스스로 풍경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2, 3, 4)

물론 이런 표현들은 모두 포드 서부극들에만 통용될 수 있다. 이야기를 지속시키려는 규범적 구심력과 이야기를 잊거나 폭파시키려는 탈규범적 원심력의 긴장이 포드 서부극의 특별한 활력을 빚어낸다. 모뉴먼트 밸리의 거대하고 황량하며 기괴한 형상은 후자의 원심력과 이야기를 넘어선 층위에서 내통한다. 포드의 인물들이 만취해 주정을 부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때로 이상심리의 광기를 보일 때, 혹은 이야기가 자신의 출발점을 잊은 듯 세부에 몰두할 때, 우리는 포드의 세계에 임한 취한 신의 손을 혹은 무심한 우주적 운명의 그림자를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에서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에서는 내통할 필요가 없다. 구심력의 규범이 사라지자 원심력은 기꺼이 풍경과 친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날뛰는 말(馬)들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말의 동작에 극의 많은 긴장이 걸려있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은 없다. <웨건 마스터>는 날뛰는 말들의 서부극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말은 인간의 통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고 그것으로써 인간의 서사에 봉사하지만, 휘파람, 총소리, 뿔피리 소리와 같은 모종의 자극에 날뛸 수 있다. 말이 날뜀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말이 날뜀으로써 말의 순응 능력에 의존한 인간의 운동,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이 지속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말과 황야의 영화인 서부극의 이상일 것이다. <웨건 마스터>가 그런 영화이다. 말이 순응할 때가 아니라 날뛸 때의 아름다움에 관한 영화이다.

#5
말들은 언제 날뛰는가. 말 장사꾼이자 능란한 조련사인 샌디의 휘파람에 날뛴다. 해리는 보안관이 헐값에 말을 산 뒤 올라타자, 동료인 트레비스(벤 존슨)과 눈빛을 교환하고 휘파람을 분다. 말은 날뛰고 보안관은 간신히 매달리다 땅바닥에 처박힌다.(#5) 보안관은 살인강도인 클레그 일당을 추적하는 질서의 수호자이지만, 동시에 모르몬교도를 추방하려는(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지만 떠돌이 약장사이자 광대패를 이미 추방한) 문명의 악덕의 집행자기이기도 하다. 포드는 여기서 굳이 이 보안관의 캐릭터를 탐구하지도, 혹은 그가 대변하는 문명과 질서의 본질을 사색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와 거래한 뒤 골려준다. 말이 날뛴다고 문명과 질서가 무너지진 않는다. 다만 동요할 뿐이다. 문명과 질서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동요로서의 유희, 유희로서의 동요일 뿐이다. 그 동요와 유희의 한가운데 날뛰는 말의 약동이 있다.

샌디는 극의 후반부에 다시 휘파람을 분다. 이때도 당하는 건 보안관 일행이다. 수배 중인 살인강도 클레그 일당은 마차 안에서 총을 겨눈 채 대기하고 있고, 보안관 일행은 마차를 수색하려던 중이다. 많은 인명이 희생될 지도 모를 위기의 순간에 해리는 휘파람을 불고 말은 다시 날뛴다. 또 한 번 혼쭐이 난 보안관은 다시 핏대를 내며 마차 행렬을 떠난다. 살육의 총격전은 저지되며 말의 날뜀으로 비로소 말과 인간의 운동은 지속된다.

#6

날뛰지는 않지만 날뛰기 직전에 이르는 장면들도 있다. 워드 본드는 분노의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술을 마셔도 안 되는 모르몬교도 행렬의 대장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곧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다혈질의 사내다. 이 사내가 흥분할 때마다 말들은 콧김을 내뿜으며 동요한다.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한 이 장면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워드 본드의 흥분과 말들의 동요는 감탄스러울 만큼 너무나 적시에 이어져, 마치 계획된 동시화처럼 보인다. 이때 워드 본드와 말은 같은 기질 혹은 같은 운명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워드 본드도 말도 순응과 날뜀 사이를 오가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긴 순례, 오랜 운동을 지속할 것이다. 서사 안에서 종료되지 않는 그 순례는 아마도 그들의 삶 내내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말의 거친 움직임을 오해해 욕을 쏟아낸 워드 본드가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말에게 사과하는 장면(#6)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7


#8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장면은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발견한 샌디의 외침과 총소리에 마차 행렬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장면(#7)이다. 지금 말들이 총소리에 놀라 날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마른 동물이 물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탈진해 있던 말들이 모종의 자극으로 호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워드 본드는 우왕좌왕하며 “말을 세워!”라고 외치지만, 말도 사람도 듣지 않는다. 그 맹렬한 속도에 흙바람이 몰아치며 마차에 매달려 있던 가재도구들이 우수수 떨어진다.(#8)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데, 가재도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장면이 그토록 강렬한 감흥을 느끼게 할 줄은 <웨건 마스터>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말의 질주는 고결하고 무구한 천상의 운동이 아니다. 타는 갈증의 표현이라는 동물적 본능의 운동이고, 소중한 가재도구를 찌꺼기로 남기는 불완전한 운동이며, 소란과 무질서의 운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통제되지 않고 통제될 수 없는 움직임이 어떤 악덕도 조성하지 않는 운동, 물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단순하고도 투명한 운동이다. <웨건 마스터>를 순수한 서부극이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말의 순응과 날뜀이 운동의 투명성에 이르기 때문이다.

#9
<웨건 마스터>를 보고 난 뒤 우리는 서부극을 잠정적으로나마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서부극은 인간과 말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약속의 땅을 찾아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의 영화다. 그 움직임은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운동이다. 비록 그 인물과 장소가 과거에 속한 것이라 해도 과거에 닫혀있지 않으며, 질베르토 페레스의 표현을 빌리면 “미래에 열려있는 과거”이다. 황야의 순례자들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강을 건너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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