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원

by.조지훈(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2020-04-03조회 1144
나의 정원 스틸
예술가의 일상과 예술의 창작과정은 늘 대중의 궁금증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위대한 작품일수록 대중들은 잘 보이지 않은 그 세계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영화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가의 일생과 예술의 창작과정을 담아왔다. 대부분의 이런 영화(다큐멘터리)들은 남아있는 자료들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여 예술가의 삶과 예술 작품들을 번갈아 보여주는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주인공의 예술 세계를 담아낸다. 이렇게 재구성된 세계는, 그것이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극적 또는 예술적 과장을 피할 순 없다. 예술은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예술적 과장을 가미한 자기 복제를 거듭하며 스스로의 신화적 이미지를 창조하고 강화해왔다. 

그러나 사실 예술가의 삶은 그렇게 화려하거나 그렇게 비루하지만은 않다. 그들의 예술 작품 또한 크고 멋진 작업실에서 천재적인 영감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직장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또는 어렵게 마련한 작은 작업실에서 일상과 창작을 반복한다. 예술은 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탄생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의 집필 과정에서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매일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장편 소설을 쓸 때에는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규칙적으로 쓴다. 더 쓰고 싶어도 20매 정도에서 멈추고,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에도 어떻게든 20매까지는 쓴다. 장기적인 일을 할 때에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여기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규칙직인 작업을 통해 예술작품을 탄생시켜온 한 화가가 있다. 이름은 이재헌. '그리고, 지우는' 방식의 회화 작업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탐구해 온 화가다.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아들의 시간>(2014)으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던 원태웅 감독의 세 번째 다큐멘터리 <나의 정원>(2019)은 이재헌 화가의 직업 화가로서의 일상과 하루키가 말한 그 규칙적 일상을 통해 탄생하는 예술, 그리고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주목한다. 같은 창작자로서 다른 분야의 창작자가 영위하는 일상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이 영화를 구상했다는 원태웅 감독은 2015년 5월부터 약 20개월간 15일에 한 번씩 그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가 담아낸 그의 일상은 크게 세 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세계는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첫 번째 세계인 화가의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트에 가고, 아이와 놀고, 가족들과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하고 TV를 본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다음 자신의 예술적 일상 속으로 이동한다. ‘보성 타일 인테리어’라는 간판이 달린 작업실은 영화가 담아낸 두 번째 세계이면서, 그의 예술적 일상이 지속되는 보금자리이자 그의 예술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 퇴근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그림을 구상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통화하거나, 식사를 하고, 간식을 먹고, 낮잠을 잔다. 
 

영화는 낮에서 밤으로, 봄에서 겨울로, 그리고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세계 속에 존재하는 소소한 일상과 작품들이 스케치 되고, 채색되고, 지워졌다가 다시 채색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완성되는 신비로운 창작의 과정을 온전히 담아낸다. 그리고 여기에 화가 이재헌의 예술가로서의 내면과 예술적 여정을 형상화한 상상의 이미지들을 연결한다. 감독의 상상을 통해 재구성된 화가의 내면과 공간의 기억은 이 다큐멘터리가 새롭게 창조한 세계이자,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마지막 세 번째 세계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형식 속에서 충실하게 일상을 담아내면서도 때론 대담하게 현실과 상상을 오간다. 그리고 세심하게 포착되고 가공된 시간의 변화와 사운드를 배치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미지와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감독의 이런 작업 방식은 그림을 그리고 덧칠하여 지운 다음 그 위에 다시 그리면서 예술적 내면을 그림에 축적해가는 이재현 화가의 작업 방식과 닮아 있다. 
 

정리하자면, 부분적으로 한 콜라주 작품의 창작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하룬 파로키의 단편 <자라 슈만의 그림 Image by Sarah Schumann>(1978)을 연상시키고, 전체적으로는 일상과 예술의 관계를 탐색하며, 아름다운 시의 세계를 온전히 담아낸 짐 자무쉬의 <패터슨>(2016)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나의 정원>은 매일같이 비슷하게 반복되고 지속되는 한 직업 화가의 일상, 그리고 자기 확신과 자기 의심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꿈과 일상 사이에서 부유하는 예술가의 내면, 그리고 작품들이 완성되어 가는 창조적 과정을 한꺼번에 목도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나면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오래되고 진부한 질문이 더 이상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고. 정치, 사회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동시대 독립 다큐멘터리의 지형도를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감히 2019년에 공개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중에서 단연 첫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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