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움직임의 사전 정다희, 2019

by.김혜선(영화칼럼니스트) 2019-10-29조회 2,327
움직임의 사전 스틸
각자의 속도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정다희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시를 닮았다. 일상에서 흔히 쓰고 아는 단어를 훨씬 폭넓은 의미로 확장해주는 시처럼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즉각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언제나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2012년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 졸업작품이었던 <나무의 시간>부터 2014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단편 대상 수상작 <의자 위의 남자>, 2018년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단편 대상 수상작 <빈 방>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세계 속에 겹쳐있는 수많은 세계의 이미지들이 언제나 그의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칸 감독 주간에 초청됐던 <의자 위의 남자>에 이어서 올해 두 번째로 칸 감독 주간에 초청된 <움직임의 사전>(2019) 역시 그렇다. 
 

2019 인디애니페스트 국내 경쟁 부문 대상인 ‘인디의 별’ 수상, 13회 대단한 단편영화제 최우수상(KT&G상) 수상 등 국내에서도 꾸준히 수상을 이어가고 있는 이 작품은 기준, 반응, 역할, 가속, 인식이라는 다섯 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다섯 개의 주체를 통해 서로 다른 움직임의 속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흥미로운데, 인간, 동물, 식물이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반응하고 살아간다. 걷는다고 하기엔 초미세한 걸음을 떼어놓는 젊고 풍성한 나무, 후들거리는 다리처럼 아슬아슬한 보폭으로 그보다는 조금 더 속도를 내어 걸어가는 노쇄하고 메마른 나무, 보통 속도로 걷은 사람과 그를 빠르게 스치며 뒷걸음쳐서 뛰어가는 그림자, 그리고 순식간에 달려오고 달려가는 강아지. 재밌는 것은 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는 순식간에 세상을 스쳐가고, 어떤 존재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마냥 느리게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끝내 어딘가에 도달하고야 만다. 종이에 목탄과 연필로 그려서 컴퓨터로 채색한 캐릭터와 화면엔 유쾌하고 따뜻한 온기가 감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중 ‘거리가 달라지면 시간도 달라진다’는 내용에 영감을 받았다”는 감독의 말처럼 걷고 보고 일하고 달리다가 멈추는 캐릭터들의 동작과 속도는 각자의 삶의 방식에 따라서 변하거나 유지된다. 그들이 몸담은 배경 화면은 같은 화면을 위와 아래로 붙여놓기도 하고, 뒤집어서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건 상대적이고, 생각을 바꿔서 상대를 보면 같은 것도 다르게 볼 수 있음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누군가는 열심히 달리며 그동안 달려온 자신을 뛰어넘으려 하지만, 더 힘껏 달려서 가속이 붙더라도 결국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다. 앞서 달리고 있던 나는 쫓아오는 나 자신에게서 달아나려고 더 속도를 내기 때문이다. 재밌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 등장하는 캐릭터들마다 웃음이 터지는 타이밍과 그 웃음의 정도도 다르다. 강아지는 즉석에서 깔깔 웃으며 꼬리를 흔들지만, 나무는 한밤중 집에 가는 길에 서서야 온 몸을 흔들며 큰 웃음을 뱉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이 서로 다른 차이일 뿐 틀림이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세계 안에서 지구와 태양계, 우주도 우리의 인식을 넘나들며 각자의 속도대로 조화롭게, 다르게, 움직인다. 
 

<움직임의 사전>은 이렇듯 우리를 구성하는 세계가 하나이면서도 여러 개이고, 서로 겹치면서도 각자의 영역으로 나워져있음을 말해준다. 한마디 대사 없이, 움직임의 동작과 사운드로, 설교하고 나무라지 않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애니메이션이라고 할까. 곱씹을 수록 유머러스해서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가 하면, 헤아리기 쉽지 않은 깊이에 한번 더 곱씹게 되기도 한다. “러닝타임 10분인 이 작품을 하루에 2초씩 만들었다”는 감독의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안에 각자의 속도로 살 수 있는 세계가 오롯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나로 살아가되, 함께 살아가는 방법. 그것이 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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