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고독한 관종 세인트 모드, 2019

by.김소희(영화평론가) 2021-09-28조회 4,752

오컬트 영화에는 익숙한 인물 유형이 존재한다. 악마에 씐 소녀(혹은 젊은 여성)와 그의 가족, 퇴마사인 가톨릭 신부 등이다. 이들 중 여성-악마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다른 인물들은 과장하자면 여성-악마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한 반응체일 뿐이다. 악마에 들린 여성은 선택된 관객인 퇴마사와 가족의 시선 아래 기괴한 얼굴과 뒤틀린 몸의 서늘한 쇼를 선보인다. 로즈 글래스의 데뷔작 <세인트 모드>에는 오컬트 영화의 핵심인 ‘여성-악마’라고 명시할만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에 광적으로 몰두한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여성-악마를 묘사해온 방식을 연상시킨다.  

<세인트 모드>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드(모르피드 클락)와 어맨다(제니퍼 엘)다. 이들의 역할을 오컬트 영화의 구도에 놓아보자면, 광신도로서의 젊은 간병인 모드는 일종의 퇴마사이며 투병 중인 유명 댄서이자 안무가 어맨다는 악마에 씐 여성의 자리에 내몰린다. 이들의 가족은 없거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신 어맨다의 지인들이 저택을 방문하곤 한다. 그럴 때면 죽어 가던 저택이 사람의 온기로 살아난다. 어맨다는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멋진 모자나 가발로 가리기만 하면 술과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 없이 어울리며 특유의 우아함을 뽐낸다.
 

영화는 투병이라는 지루한 시간을 전환적으로 묘사하며 관객의 이목을 끈다. 빠른 편집과 어맨다의 개성, 투병과 구원의 중첩 등의 방식으로 이야기는 활기를 얻는다. 더욱 중요하게는 모드가 지닌 외로움의 강도가 투병의 지루함을 압도한다. 모드의 외로움은 어맨다의 사교성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어맨다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으며 그 역시 유쾌한 본성을 잃지 않는다. 사람들을 어맨다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는 모드의 욕망은 종교적 광기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는 한편, 거기에 질투가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투병과 간병의 뒤집힌 관계는 아니쉬 차간티의 영화 <런>(2020)에서 클로이와 다이앤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다이앤은 딸 클로이가 계속 아픈 상태로 자신의 곁에 남아 있기를 욕망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환자-보호자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장애를 지닌 클로이의 상태는 서스펜스를 만드는 주된 요소로 기능하며 영화적인 상태로 고양된다.

<런>의 다이앤은 자신이 악인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모드는 다른 사람을 악마로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악랄하다. 모드는 자극에 반응하는 퇴마사가 아니라 반응하기 위해 자극을 요구하며 심지어는 그 자극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광적인 연출자다. 물론 누구도 그의 영화에 캐스팅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주된 배역을 스스로 떠맡게 된다. 모드는 고행을 시작한다. 어맨다로부터 ‘당신은 나의 구세주’라는 찬사를 들은 직후부터다. 기도할 때 작은 돌멩이들을 바닥에 뿌리고는 그 위에 무릎을 꿇는다. 열이 오른 스토브에 일부러 손등을 댄다. (그가 추종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로 추정되는)성인의 얼굴이 인쇄된 종이에 못을 촘촘히 박은 뒤 뒤집어 깔창처럼 깔고는 그대로 신발 위에 올라선다. 술집에서 처음 본 남자와의 섹스마저 고행의 일종처럼 보인다. 고행은 신발 속 못처럼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혼자만 향유하는 은밀한 것이다. 은밀한 것이 될수록 보이지 않는 신과의 교감의 정도가 더욱 커진다고 그는 믿는다. 믿는 것을 넘어 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 주기를 갈구한다.
 

그런데 모드의 기도가 우리 귓가에 울릴 때, 그가 접속하는 이는 신이 아니라 관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난다. 보이스오버로 들려오는 기도는 엄밀히 말해 말로 서술한 일기이며 대화가 아닌 혼잣말이다.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의 자리에 불려와 그의 기도를 듣는다.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할 리 없는 관객(혹시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당신은 모드의 진정한 솔메이트다)은 신을 대체하는 동시에 (그 자리에 관객인 내가 있기에) 신의 부재를 증명하게 된다. 모드의 보이스오버는 그것이 들려주는 내용과는 반대로 신이 없다고 지속해서 속삭이는 셈이다. 모드의 고행 역시 의심스럽긴 마찬가지다. 그것은 신성에 다가가기 위한 것이기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어난 환자 사망 사건의 트라우마에 의한 자해처럼 보인다. 어맨다가 ‘당신은 나의 구세주’라는 메시지를 적어 모드에게 선물한 윌리엄 블레이크에 관한 책은 처음부터 모드의 손에 있었을 뿐, 어맨다가 모드에게 선물하거나 이에 관해 언급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공포 영화에서 인간/비인간 사이 존재의 두려운 외형은 화면 안의 관객과 화면 밖의 관객에게 두루 영향을 미치며 강력한 위용을 드러내 왔다. 하지만 모드의 행위에 반응하는 내부의 관객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오컬트 영화에 길든 화면 밖의 관객 역시 그에게 시큰둥할 확률이 높다.
 

영화에는 모드의 고행이 응답을 받는 듯한 순간이 그려지지만, 이는 주인공을 위한 위로도, 믿음의 증거도 아닌 혼자만의 환상일 뿐이다. 홀로 있는 좁은 집에서 모드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고 그 순간 창밖에는 그를 축복하듯 폭죽이 터진다. 벌레의 모습을 한 신은 모드 집의 누추한 벽에 깃들어 말씀을 전한다. 모드의 몸은 때때로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작용하는 듯 뒤틀린다. 이것이 신의 현현인지, 과연 그 신이 좋은 신인지는 미지수다. 재현된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다. 그것은 모드의 시선에서만 진실일 뿐이다. 기괴한 모습을 드러낸 어맨다는 정말 악마에 씐 건가, 모드의 내면에 돋아난 분노의 반영일 뿐인가. 모드의 등에 돋은 날개는 실제인가 망상인가. 모드가 자신의 몸을 태워 ‘순교’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일순간 성령을 본 듯 무릎을 꿇는데 이것은 모드의 소망인가 실제인가. 실수로 삽입된 프레임처럼 짧은 시간 우리의 눈을 스치고 지나가는, 타오르며 울부짖는 얼굴은 고통받는 성인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재현해 온 ‘악마’를 연상시킨다. 아니, 그 숏은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만이 부정할 수 없는 실제 같다. 

모드의 존재는 오컬트 영화의 악마에 들린 여성마저 축복받은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를 불러온다. 오컬트 영화 속에서 여성은 주변에서 그를 떠나지 않는 가족과 퇴마사의 시선 속에서 얼마나 외롭지 않게 고통받았던가. 능히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불가사의한 힘은 또 어떤가. 모드의 광기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전하기보다는 안쓰러움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친다. 그와 함께 이 글은 신도, 악마도, 천사도, 성녀도 되지 못한 한 외로운 인간을 위한 추도사가 되어 가는 중이다. 모드의 실패는 평범하게 남고 싶지 않은 외로운 사람들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낙차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종교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신과 악마의 이야기가 아닌, 외로움의 이유를 만들고 싶어 한 고독한 인간의 이야기다. 영화가 보여준 ‘끝’의 이미지 뒤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 모든 외로운 사람들이 남긴 짙은 그을음일 것이다. 모드가 기획하고 출연한 처절하게 외로운 1인 시스템 극중극과 함께 <세인트 모드>는 가장 ‘독립’적인 오컬트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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