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누가 함부로 '공감'을 말하는가 더 파더, 2020

by.이승연(작가) 2021-09-17조회 6,939

이 영화는 공포영화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 안소니와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딸 앤의 가슴 저미고도 절절한 얘기가 왜 공포냐고? 그건 바로 ‘관찰자’가 아니라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치매를 다룬 수많은 영화가 인물과 관객 사이에 투명유리창을 세워 놓고 인물의 고통을 관망하게 했다면 이 영화는 맹렬히 그 창을 깨부수고 관객을 화면 안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모든 의식과 감각을 통째로 붙잡고 흔든다. 3인칭 시점의 1인칭화! 소재의 진부함은 결곡하고도 투철하게 인간을 이해하는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전위적 시도로 온전히 극복되고도 남는다.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분)는 엔지니어로 자수성가하여 근사한 아파트에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는 80대 노인이다. 그의 낙은 자신을 보러 매일 들르는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을 기다리는 일이다. 마침내 딸이 왔다. 그런데 딸의 표정이 좋지 않다. 왜 도우미한테 험한 말을 했느냐고 자신을 추궁하듯 묻기에 그녀가 시계를 훔치려 해서 그랬다고 자못 양양하게 대꾸한다. 그러나 시계는 딸의 짐작대로 욕조 밑에 있다. 엇, 왜 이게 욕조 밑에 있지? 어찌됐든 찾았으니 됐고, 도우미 대신 딸이 옆에 있으니 만족스럽다.
 

그러나 그 날의 일은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의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던 날이었던 것이다. 딸은 계속해서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급기야 자신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가게 됐다고 말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프랑스로 떠난다고? 그럼 나는?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둘째 딸은 왜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본 지가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다. 다음 날은 갑자기 못 보던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위라고 답한다. 앤은 이혼했는데 사위는 무슨? 한 술 더 떠 이 집이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는 낯선 남자. 잠시 후 장을 보러 나간 앤이 들어오는데, 아니다. 앤이 아니다. “아빠, 저예요. 저 앤이에요!”라는데 처음 보는 여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집은 분명히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니라 하고 모르는 남자가 사위를 자처하며 앤마저 얼굴이 바뀌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꿈일 것이다, 그래, 분명 꿈일 것이다.

안소니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아닌가? 혹시 안소니의 말이 다 사실인 건 아닐까? 안소니가 느끼는 감각은 분명 그의 감각이 맞을 텐데 그것을 어떻게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낯선 남자가 그의 뺨을 때려 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아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이 오해이며 착각이라고 우리가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의 기억의 오류와 소실이 망상이라고, 현재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과거가 단지 과거일 뿐이라고, 누군가에게 틀림없는 진실이 거짓투성이라고 우리가 규정할 근거가 대체 무어냔 말이다. 

감독은 집요하고 밀도 높게 관객을 긴장시킨다. 당신이 느끼는 혼란이, 혼란의 반복으로 발생하는 자기 불신이, 마침내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공포가 바로 안소니가 경험하는 그 자체라는 것을, 추체험할 수 없다고 여겼던 일을 핍진하게 우리 내부로 침투시키며 우리를 안소니화하는 데 성공시킨다. 그러나 밀어붙이기만 하는 게 아니다. 감독의 탁발한 연출은 속도의 조절과 적절한 밀당에 있다. 여백을 과감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2012년 프랑스에서 초연해 연극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자신이 쓴 연극을 직접 영화로 만들면서 감독은 영화를 한 편의 연극처럼 환원시키는 데 성공한다. 연극이 막으로 무대를 전환한다면, 영화에서는 인물 없이 다양한 공간을 천천히 훑는 기법으로 시공을 변환한다.
 

이 같은 기법으로 감독은 관객에게 어떤 시간을 제공하는데, 하나는 얼기설기 복잡해진 감정을 소강시켜 감정이 사유로 넘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시간이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진실게임이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응당 선이어야 할 것들이 안소니에게는 수많은 점으로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이다. 또한 그 선과 점이 굳이 같은지 다른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이며, 지고한 사랑의 가치를 행위로써가 아닌 고작 인식 따위로 이해하려드는 우리 자신이 가소롭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간은 미세하게 바뀐 집의 공간이 안소니의 심리변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추측케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엄마가 보고 싶어!”하며 우는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더 이상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 그는 아이가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은 아이. 기억을 잃어가며 점점 낯설어지는 공간이 될지언정 집은 그에게 자궁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공간을 되찾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은 ‘시계’가 메타포가 되어 잃어버린 시간들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과도 꼭 닿아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의 집착은 상실감이 주는 고통의 깊이와 완벽히 정비례한다.
 

거개의 사람들은 치매가 암보다 더 두렵다고 말한다.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면서도 망각에 빠져드는 질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대 받고 싶지 않은 선물로 치부한다. 어쩌면 죽음은 그 자체로 무(無)가 되는 일일 수도 있는데, 명멸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그 無와 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육체는 쇠할지언정 영혼은 꺼트릴 수 없다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욕심이 아닐까? 좋다. 그것이 순수한 바람이든 욕심이든 나아가 탐욕이든 그것의 정체를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메시지를 사회적으로 확대해 치매환자를 대하는 시선의 변화를 촉구하고, 치매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고통을 헤아려 복지체계에서 이들을 포용해줄 것을 역설하면 되는 걸까.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인간에게 기억이란 시간 속에 존재를 새긴 결과물일 것이다. ‘살아 낸’ 시간의 결과물이다. 병에 걸려 아파한 시간이나 그저 살아진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온다. 삶의 본질적 질문은 결국 이 질문 하나로 수렴되듯. 이 영화로 치매를 경험한 덕분에 답을 찾는 것은 더 쉬워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것 그대로 그 존재를 기억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는 자와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할 전부가 아닐는지.

<더 파더>는 2021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미술상, 편집상 등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이 중 안소니 홉킨스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플로리안 젤러 감독이 각색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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