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태아가 되는 법 카조니어, 2019

by.김소희(영화평론가) 2021-09-16조회 5,754

이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첫 장면에 달려있다. 버스 정류장에 근처에 예닐곱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고정숏으로 보여준다. 어안렌즈로 찍은 것처럼 곡선으로 구부러진 버스가 정차 후 지나가면 버스 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남는다. 그들은 마치 사람들 사이 보호색을 띠었던 양 이제야 눈에 띄는데, 행색을 보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젊은 여자와 나이 든 여자는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린 한 쌍처럼 보인다. 이들은 뒤로 보이는 연방 우체국의 우편물을 노린 3인조 가족 사기단이다. 이 장면의 압권은 딸 올드 돌리오(에반 레이첼 우드)가 선보이는 특별한 준비 동작이다. 굼떠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날랜 동작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낮은 난간을 뜀뛰기 하듯 넘나드는 모습이 놀라움을 안긴다. 그렇게 해서 과연 CCTV를 피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동작은 눈길을 끈다. 이는 임무 완수를 위한 제의 혹은 스트리트댄스 같다. 우스꽝스러운 동작은 다시 등장한다. 버블 공장에 딸린 사무실을 집처럼 사용하는 이들은 몇 달째 집세를 밀린 상황이다. 주인의 시선을 피해 낮은 담 아래로 몸을 굽히고 걸어가는데, 유독 돌리오만은 림보를 하듯 허리를 거의 180도로 뒤로 꺾은 채 성큼성큼 걷는다. 그 모양은 우스운 것을 넘어 그를 도시 공간과 소통하는 거리의 무용수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명백한 몸개그로, 이것이 몸의 영화임을 다소 난해한 방식으로 예고한다.

이들의 거주지는 매일 일정 시간마다 천장 벽 틈새로 분홍색 비누 거품이 새어드는 곳이다. 그럴 때마다 집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에 가까워지며 무생물과 같은 거주자들과 반대 방향에서 접점을 만든다. 가짜 가족처럼 보이던 이들은 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인데, 애초에 이들에게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붕괴한 것 같다. 여기에서 가족은 비즈니스적 공동체이며 감정적 유대가 아닌 공평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수익과 손해는 3분의 1로 정확히 나눈다. 동시에 울리는 손목 알람에 따라 정해진 일을 수행하고 몫을 나누어 갖는다. 딸 올드 돌리오는 <산책하는 침략자>(2017)의 개념을 잃어버린 신조(마츠다 류헤이)처럼 모든 개념을 처음부터 습득해야 하는 부적응자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26살에 뒤늦게 시작된 돌리오의 성장기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는 성장기가 아니라 ‘출생기’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사람과의 신체 접촉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 하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접촉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환불 불가능한 마사지 쿠폰을 포기하는 대신 생애 처음 마사지를 받은 돌리오는 작은 터치에도 몸을 떨고 눈물을 보인다. 한 임산부의 부탁으로 예비 부모를 위한 강연에 참석한 돌리오는 아기가 어머니와 감정적 유대를 맺는 최초의 행위인 ‘브레스트 크롤’(태아가 엄마의 젖가슴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행위) 장면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태어난 직후 엄마 테레사(데브라 윙거)와 접촉했는지 여부를 궁금해한다. 비행기에서 부모와 떨어져 앉게 된 돌리오는 우연히 부모님과 나란히 앉은 멜라니(지나 로드리게즈)가 자신보다 더 그들의 딸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테레사의 애정에 더욱 집착한다.
 

돌리오가 대리 참석한 강연장에서 출산 영상이 등장하는 대목은 다소 급작스럽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 속의 모든 상황은 ‘태어남’을 은유하기 위한 치밀한 우연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한 돌리오의 우체국 진입 장면 이후에는 우편함을 뒤지는 돌리오의 손을 보여주는 숏이 등장한다. 우체국 내부는 사방이 작은 우편함으로 구획된 어딘가 비현실적인 공간이며, 돌리오는 그중 한 곳을 열고는 좁은 구멍 속에서 손을 좌우로 더듬으며 우편물을 찾는다. 그러다 옆 칸에 놓인 긴 직사각형 형태의 우편물을 조심스럽게 빼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좁은 구멍으로 분만을 유도하는 출산 장면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멍을 통과한 뒤에는 진동처럼 지진이 찾아온다. 가족이 약진에 유난스럽게 반응하며 길가에 얼어붙을 때, 옆에서 행인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모습이 목격된다. 지진을 통해 세상은 개념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운동성을 드러내고, 그럴수록 이 가족은 무생물처럼 고정된다. 진동하는 비행기는 이들이 세상을 체감하는 방식을 요약한 공포 체험의 장소다. 갑작스러운 난기류로 차체가 흔들리는 현상이 벌어지자 이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른다. 세상을 은유하던 비행기는 작은 우편함 구멍과 출산 비디오 영상과 어우러져 출산 체험을 위한 기구가 된다. 비행기는 누구나 망각했을 태어남의 순간을 내부에서 단체로 경험하는 물질로 도약한다.

내부의 시점에서 출산을 체험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은 후술하는 장면을 통해 마침내 성공적으로 충족된다. 테레사가 무심결에 멜라니를 ‘아가’(hon(ey))라고 부르자, 돌리오는 수하물 분실을 조작해 얻은 여행보험금을 걸고 자신에게 ‘아가야’라고 말해보라고 테레사를 채근한다. 그러나 테레사는 끝내 돌리오를 ‘아가야’라고 부르지 못한다. 이 집단에서 막내딸 정도의 역할일 줄 알았던 멜라니는 자신의 진짜 역할이 어머니임을 자각하고는 돌리오의 손을 잡고 집단을 벗어난다. 멜라니는 자신의 집을 새로운 활동 기지로 삼아 ‘아가야’라고 불러주기를 비롯해 테레사가 거절한 것의 목록을 만든 뒤 하나씩 실행에 옮긴다. 리스트의 핵심 항목은 단연 브레스트 크롤이다. 멜라니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며 실감나는 재현을 위해 불이 들어오지 않는 화장실로 돌리오를 데려가 문을 잠근다. 어둠 속에서 지진이 찾아오자 겁에 질린 돌리오는 이것이 자신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진동이 멈춘 뒤 문이 열리고 다시 빛을 보게 된 돌리오는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기쁨에 젖어 만나는 모든 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생의 축복을 만끽한다.
 

아직 가장 중요한 동작이 남았다. 화장실에 갇힌 패닉 상황에서 실언을 내뱉어 멜라니에게 상처 입힌 돌리오는 그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콘크리트 바닥을 기어 멜라니에게로 다가간다. 돌리오의 첫 브레스트 크롤은 엄마의 품보다는 다소 거칠지만, 그보다 넓은 세상의 맨몸을 더듬는 행위이다. 덧붙여 누군가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이는 최초의 시도다. 그렇게 돌리오는 태어난다. 그리고 비로소 산다. <카조니어>에서 미란다 줄라이가 보여준 것은 아직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던 방식으로 시도된 사랑스럽고 무모한 퇴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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