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영화를 본다는 습관에 관한 두 세가지 질문

by.정성일(영화평론가,영화감독) 2020-08-21조회 9645
언제나 그런 일이 반복되었지만, 그래서 별로 놀랍지도 않지만, 지금 약간만 검색을 해보면 거의 모든 인문사회학에 관련된 교수들, 필자들, 혹은 글을 발표할 지면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거의’ 전문가들이다. 정작 의학 전문가들은 이 바이러스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사실은 이 바이러스에 관해서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은 앞 다투어서 전문적인 사회적 진단을 내린다. 심지어 어떤 자리에 가도 팬데믹 담론에로 귀결되는 악순환 속에서 상당히 피로하고 이제는 권태를 느낄 지경이다. 나는 여기서 내 논점을 후퇴해서 영화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역시 이야기는 어떤 자리로 되돌아간다. 다만 이 자리가 좀 다른 것은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영화 ‘시장’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호명할 수는 없지만) 극장을 운영하거나, 영화를 수입해서 배급을 하거나, 그 영화를 홍보 마케팅을 하거나, 저예산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들은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지금 시장이 죽었다, 라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하여튼 언젠가는 끝날 팬데믹 ‘이후’가 걱정된다는 누군가의 말이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상대방이 말을 잘못한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극장이 텅 빈 지금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건가요, 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내게 대답했다. 극장에서 관객들이 떠나가고 있어요, 정말 문제는 코로나가 끝난 다음 그들이 돌아온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떠난 동안 극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고 거기서 재미를 찾아낼 것입니다. 코로나가 끝난 다음 새롭게 찾은 재미에 머물지 아니면 극장에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하루 종일 노는 사람도 하루에 쓸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밖에 안 되니까요. 

여기서 이 대답의 논리적 허점을 찾는 것은 요점이 아니다. 이 말에는 어떤 진실이 있다. 그건 영화를 보러 가는 건 하나의 습관이라는 사실이다. 인구 비례에 따른 관객점유율을 놓고 한국영화 시장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약간 우쭐한 말투로 영화를 선택했다는 상대적 우월의 관점을 가지고 다가간다. 이때 이 설명이 항상 실패하는 순간은 구태여 누군가의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을 만큼 보는 쪽에서 누구나 형편없는 영화라는 걸 누구나 다 아는 영화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때이다. (나는 지금 구체적인 제목을 열거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는 중이다) 반복해서 말하겠다. 하나의 습관. 술을 마실 때 그걸 마시면 다음 날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는 걸 알면서도 마신다. 하나의 습관. 그걸 보고나면 불쾌해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보러 간다. 영화를 보러가는 습관의 이유는 서로 다른 여러 층위에서 결정되는 복합적 요인들의 카오스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잘 설명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습관에 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누군가 해내기는 하겠지만 아무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보러 가는 선택은 밥을 먹기 위해 식당을 고르는 것과 다른 문제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 외출했다가 중간에 마음을 바꿔 서점에 들려 시간을 보내다 올 수 있지만 밥을 먹으러 외출을 하면 식당을 바꿀 수는 있지만 밥을 먹고 돌아온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그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각자의 기술이다. 아주 가끔 이 시간 낭비가 큰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건 얼마나 드문 경험인가) 대부분은 그 시간을 덜 지루하고 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영화를 보러 간다. 누군가는 내게 그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의 권리를 느껴보기 위해서 영화를 본다고 대답했다. 우리의 논점으로 돌아오자. 그런데 그 작은 즐거움에 예기치 않게 불안이 동반하게 되었다. 당신 옆 좌석에서 누군가 기침을 할 때 갑자기 영화를 보다 중단하고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그 사람의 얼굴에 마스크가 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 기침 소리가 나는 곳이 뒷좌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자신에게 질문할 것이다. 불안을 무릅쓰고 이 작은 즐거움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운이 나쁘면 당신은 14일 동안 격리될 수도 있다. 더 운이 나쁘면, 지금의 상황은 최악의 가정까지 순식간에 당신을 데려갈 수도 있다. 이번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아도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가장 좋은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접촉 빈도가 높아질수록 당신이 익명의 확진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당신은 그러면 극장에서 방(room)으로 옮겨가면 되잖아요, 산업의 구심점이 이동하면서 극장이 침체하겠지만 영화 산업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라고 냉정한 대답을 할지 모른다. 그 대답은 당신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이때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까지 거의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정치경제학적 환경이 민주적이었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당신은 입장료를 내면 계급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영화를 경험할 권리를 얻었다. 나는 구태여 경험, 이라는 표현을 썼다. 방으로 물러나게 되면 이제 이 민주적 기회는 사라지고 각자의 환경의 토대가 제공하는 영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환경의 토대? 누군가는 홈 씨어터에 최신 버전의 프로젝터와 스피커를 갖춰놓고 방음까지 된 방에서 스크린에 가까운 화면으로 영화를 ‘경험’할 것이다. 누군가는 같은 영화를 반지하 방에서 노트북으로 볼 것이다. 두 개의 경험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두 계급 사이의 극장이라는 교집합의 경험이 사라지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논점이 부동산으로 옮겨올 때 당신은 더 이상 이 상황 앞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냉소적 태도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 간극에 놓여있는 모순은 영화를 하찮은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우리 세상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논쟁의 장소이다. 나는 너무 멀리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간극의 모순에 시간이 부여되면 연쇄 고리가 만들어진다. 모순은 어느 순간에 멈추는 법이 없다. 이것이 이 세계의 원리이다.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자신의 상대적으로 하찮은 경험 속에서 노트북에 최적화된 기쁨을 내어줄 시간 낭비의 기술에로 눈을 돌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영화는 부르주아들의 문화 일부가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질문한다면 아직도 당신은 순진한 것이다. 이 관객들이 옮겨가기 시작할 때 영화라는 상품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자본의 축적과정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상대적 잉여가치를 놓고 여러 가지 대응이 모색되겠지만 한계에 부딪힌 상품은 임금과 노동 사이에서 시장에서의 자신의 가치를 놓고 재조정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그냥 단순하게 따라가는 중이다. 물론 이 과정이 이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당신이 반문할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나는 그날 그 자리에서 그 걱정에 대한 위로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가 아니라 아마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는 긍정을 한 다음 우리들 앞에 다가온 변화에 우리들도 변해야 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가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는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시장 안에서 자신의 성격을 바꿀 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화는 다시 한번 영화라는 이름의 다른 그 무엇이 될지 모른다. 나는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위험한 단정이다. 하나의 가정. 하나의 가능성, 그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준비. 영화의 역사는 끊임없이 자신을 다시 한 번 재정의 내리는 과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개념의 위기에서 멈추지 않고 시장의 위기로 모습을 드러낸 다음 구체적이고 (당신이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폭력적인 위기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여기서 가장 나쁜 태도는 위기를 구경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위기가 요구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런 다음 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순종할 것이다. 우리는 위기를 먼저 긍정하고 (달리 무슨 방법이 남아있는가?) 긍정 안에서 위기를 의심해야 한다. 우리는 진짜 위기와 위기를 이용하려는 가짜 위기를 구별해내야 한다. 우리들은 오직 진짜 위기 앞에서 영화의 새로운 변화를 환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마도, 아마도 그렇게 해서, 새로운 영화 앞에 나타나게 될 새로운 관객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질문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여기가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번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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