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31일에서 6월 7일까지 8일간 개최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20회를 맞아 지나온 역사를 축하하고 앞으로의 비전을 가늠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1997년 4월에 첫 회를 개최했었다. 영화제의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던 시절, 1996년 10월 출범한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국제영화제였다. 당시 내걸었던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See the world through women’s eyes)"는 지금까지도 영화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캐치프레이즈로 사용되고 있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여성의 삶을 여성(주의)의 시각으로 표현한 영화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스크린에서 사소하게 여겨지거나 왜곡되고 심지어 아예 배제되어온 소수자들의 비전과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조건의 마련을 뜻한다. 따라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영화 전체(여성영화와 남성영화의 총합이라는 실질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가정)’의 일부를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한정된 세계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가려져왔던 비전과 이야기를 드러내며 영화의 세계를 확장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페이스북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이를 보다 더 구체화하기 위해 최근 4년간 두 개의 문구를 더 내걸었다.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Women Make Great Films)”와 “여성이여 스크린을 점령하라(Occupy Screen!)”가 그것이다. 뒤의 문구는 현재 영화관련 교육기관의 학생과 관객은 여성이 50%를 상회함에도 영화현장과 재현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10년간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중 여성감독의 영화는 10%를 넘지 못하며 주인공이 여성인 영화는 20%대에 머무르고 있고, 이러한 수치가 나아질 기미 역시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큰 격차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으며 차별적 시스템의 문제다. 따라서 지속된 영화계의 불균형과 불공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관객운동도 필요하지만 정책적 개입이 시급하다.
한편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조금 더 담론적인 개입이다.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하면 많은 이들은 이렇게 되묻는다. 여성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여성이나 소수자들이 나오는 영화가 ‘재미없거나 작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제작·상영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일차적 문제는 이처럼 유의미하게 평가를 할 만한 영화들이 아직 충분히 제작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남성이 주연이거나 남성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도 혹평을 받거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영화가 무수히 많지만 그 이유로 남성이라는 성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지금도 실제 통계 수치는 우리의 막연한 추측과 다르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에 열린 "영화산업 성평등을 위한 정책과 전략들" 국제 컨퍼런스에서 주유신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은 최근 극장 개봉작의 편당 동원 관객수를 감독 성별에 따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놀랍게도 결과는 여성 감독의 관객 동원수가 남성 감독보다 약 13,600명이 더 높았다. 여성 감독은 충분히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고 만들 수 있지만, 충분히 실현되지 않고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셋째, 어떤 영화가 ‘좋다’ 혹은 ‘퀄리티’가 높다는 평가의 요소와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누구의 평가가 더 많이 가시화되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 기준은 영화적 스킬, 미학적 새로움, 이야기의 설득력과 응집력, 대중적 공감과 재미, 보편적 가치의 구현 등, 상황과 조건에 따라 여러 판단 기준이 있을 것이다. 특히 ‘퀄리티’라는 것은 많은 경우 미학적 완성도와 두리뭉실하게 동일시되어 논의되곤 한다. 하지만 미학적 완성도라는 것 또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촬영, 편집, 구도 등의 스타일적 장치들을 능숙하고 매끄럽게 사용하면 충족될 수 있는 것인가.
위에 언급한 컨퍼런스의 패널로 참석한 BFI(British Film Institute) 제작기금 집행이사인 리찌 프랭키는 토론 세션에서 다양성은 영화의 ‘퀄리티’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BFI는 이미 제도적으로 제작지원을 위한 공적 기금을 배분하는 데 있어 다양성을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고, 2020년까지 감독의 성별을 50:50으로 맞추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실천하고 있다. 인지하다시피 이 정책과 실천은 성별 다양성이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성이 미학적 새로움 및 완성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에 근거한다. 시점과 이야기 주체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세계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방식을 다르게 만든다. 다양성은 카메라의 앵글과 구도를 다채롭게 만들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가시화되었던 소수자의 눈과 이야기가 세계를 더 입체적이고 보편적으로 만들 가능성을 높여준다. 소수자의 시각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정했던 ‘보편적’ 가치와 공감에 질문하게 만들며 오히려 그것이 사실 단편적이고 편협한 것이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아녜스 바르다와 JR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아녜스 바르다와 JR의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다양성이 영화에 어떻게 영화적 재미와 새로움을 불어넣는가를 보여준다. 55년의 나이차가 나는 바르다와 JR이 공동 연출한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와 영화가 담아내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환기하는 진정한 시네필 영화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듯 이 영화의 재미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이자 대표적인 여성감독인 바르다와 젊고 성공한 사진작가이자 남성인 JR이 예술가적 주장과 삶의 태도를 서로 꺾지 않으며 차이를 인정하는 우정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바르다가 같은 여성이 왜 영화감독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온다. 둘은 포토 트럭을 타고 마을을 돌며 평범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인화해 낡은 벽에 붙여주는 퍼포먼스를 하던 중에 르아브르 항만을 찾게 된다. 주로 남성인 그곳의 노동자들은 파업 중이다. 바르다는 남성인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을 만난다. 그리고 인터뷰 중 자신의 남편을 지지한다며 “늘 남편 뒤에 있었어요”라고 답하는 여성에게 “왜 옆이 아니라 뒤죠?”라고 바르다는 묻는다. 바르다 감독은 이 여성들을 누군가의 아내, 보조자가 아니라 그녀들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개인으로 대한다. 그 마을의 산업을 함께 일궈온 그녀들에게 바로 그 노동의 현장에서 그녀들의 얼굴을 돌려주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얼굴마다 사연이 있”고 바르다는 그녀들의 이미지로 그것을 들려준다. 바르다는 항만에 세워둔 대형 컨테이너에 그곳을 지켜온 토템처럼 항만 노동자의 아내이자 스스로도 노동자인 세 여성의 대형 사진을 붙여놓는다. 그리고 기중기를 이용해 그녀들을 자신의 대형 사진이 붙은 컨테이너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그녀들은 높은 곳에서 바라볼 때 세계가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이야기한다. 그녀들은 일상과 관습에서 벗어난 자신의 대형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여성의 눈”이자 지가 베르토프, 발터 벤야민 등이 언급했던 해방의 잠재성을 품고 있는 영화적 매체의 특징 아닌가.
여성으로서 바르다의 시선은 ‘노동자’라는 통념이 배제했던 아내들을 스크린에 불러들여 가치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보편성을 강화하고, 소재와 미장센에 새로움과 다채로움을 불어넣는다. 그로써 영화는 더 재미있어지고 설득력을 갖게 되며 더 다양한 이들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다양성은 곧 보편성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획득하는 요소이자, 영화의 ‘퀄리티’를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