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의 방랑자가 스크린에 등장하다 1914년 2월 7일

by.정성일(영화평론가,영화감독) 2019-03-26조회 1077
<베니스에서 아이들의 자동차 경주>
 
위대한 맥 세네트는 자신이 개발한 엎치락뒤치락 코미디를 더 밀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단지 새로운 추적 장면만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대중은 드라마를 원했다. 영화저널에서는 ‘스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화산업은 배우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키스톤 활극코미디는 새로운 등장인물(Character)이 필요했다. 맥 세네트는 키스톤 회사의 감독이자 여배우이며, 시나리오 작가이자 프로듀서이던 메이벨 노만드와 함께 온 사방을 뒤졌다. 그러던 중에 뉴욕 42번가 아메리칸 뮤직홀에 영국에서 순회공연을 온 런던 카노 극단의 <영국 뮤직홀에서의 하룻밤>을 함께 보았다. 무대에 선 24세 청년의 코믹한 연기가 인상 깊었다. 키스톤 회사의 영화감독 애덤 캐슬도 이 배우에게 주목했다. 키스톤 회사는 1913년 9월 25일 이 배우와 주급(週給) 150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계약했다. 그 청년이 찰스 스펜서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사람들이 애칭으로 ‘찰리’ 채플린이라고 부른 이 위대한 예술가가 연극과 작별하고 영화로 온 순간이다. 채플린은 카노 극단과 작별하고 런던을 떠나 LA로 향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채플린은 영화의 메커니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모든 걸 처음부터 배워야만 했다. 한 가지 사실을 환기해야 할 것이다. 채플린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첫 상영되는 날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채플린은 (훗날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여러 가지 재능이 있었는데 그중 다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는 학습능력은 마치 “하늘에서 내린 것만 같은” 천재였다고 한다.

채플린이 영화를 찍은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맥 세네트는 채플린이 24세의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 보여서 콧수염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 콧수염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코밑수염이 아니라 수염 끝이 위로 올라가는 카이젤 수염이었다. 채플린의 첫 번째 영화는 <생계비 벌기 Making a Living>(1914)다. 감독은 헨리 레어만. 상영시간은 13분. 채플린은 이 영화를 “끔찍하다”고 말할 만큼 싫어했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그냥 키스톤 영화사의 평범한 악당 중 한 명처럼 보일 뿐이다. 채플린은 무언가 자기만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대중이 익히 알고 있는 '방랑자(the rramp)' 찰리 채플린>

<1916년의 찰리채플린>
                   
채플린이 촬영한 순서로는 세 번째 영화지만 두 번째 영화 <매벨의 이상한 모험 Mabel’s Strange Predicament>(1914)보다 먼저 개봉한 <베니스에서 아이들의 자동차 경주 Kid Auto Races at Venice>(1914)에서 처음으로 작은 모자와 지팡이, 마치 빌려 입은 것만 같은 통이 넓은 바지, 행색에 어울리지도 않는 작은 조끼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이 복장은 웃겨 보였지만 동시에 이상한 비애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대중은 이 인물을 ‘떠돌이 방랑자(the tramp)’로 받아들였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인물, 어수룩해서 여기서 아무도 속일 수 없는 인물, 무슨 일에도 끼어들지 못할 게 분명한 인물, 결국에는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다가 여기서 떠나는 인물, 그렇게 언제까지나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물, 미국 대중은 이 새로운 인물에게 너무 쉽게 감정적으로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으로 이민 온 가난한 노동자 대부분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플린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베니스에서 아이들의 자동차 경주>는 자동차 경주가 벌어지는 내내 이걸 촬영하려는 카메라 앞에서 계속 알짱거리면서 매번 촬영을 방해하는 방랑자의 에피소드다. 그가 꼭 나쁜 의도로 촬영 팀을 골탕 먹이려는 건 아니다. 그는 심지어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피해주려다가 촬영을 망치게 만들기조차 한다. 6분 19초의 상영시간인 이 영화는 채플린의 ‘이후’ 영화에 대한 ‘위대한’ 예고편처럼 보인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채플린은 카메라 앞에 자기 얼굴을 잔뜩 들이밀고는 얼굴을 찡그려 보인다. 마치 카메라라는 신기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다가가서 본다. 채플린은 그렇게 호기심을 안고 위대한 영화를 차례로 만들었다. <베니스에서 아이들의 자동차 경주>는 1914년 2월 7일에 개봉했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등장인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보다 위대한 등장인물은 없을 것이다.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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