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폭군> 국내 개봉판 수집 이야기 합작영화를 비교해서 보는 재미

by.최영진(한국영상자료원 수집부) 2018-08-13조회 1,296

해외 수집 업무를 맡게 되면서 개인적으로 꼭 발굴하고 싶은, 유실된 한국영화가 여러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한홍 합작영화 <대폭군>(임원식, 1966)이 특히 탐났다. 더 자세히 말하면 <대폭군> 국내 개봉판을 꼭 찾고 싶었다. 홍콩 개봉판은 존재 여부가 이미 확인되었고 DVD로도 출시되어 볼 수 있으나 국내판은 그동안 통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대폭군> 국내판을 왜 발굴, 수집하고 싶었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영화에 대해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대폭군>은 신필름과 쇼브라더스(Shaw Brothers)가 공동 제작한 합작영화다. 이 두 대규모 제작사 간 협력 관계는 <달기>(최인현, 악풍, 1964) 제작으로 시작되었으며 <대폭군>은 두 번째 컬래버레이션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합작영화와 달리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배우 교체 촬영 방식이었다.1 홍콩과 한국 관객 정서에 좀 더 맞추기 위해 주인공인 묘선공주 역할을 두 명의 여배우(국내 배우 고(故) 최은희와 홍콩 배우 리리화(李麗華))가 맡았다. 이들을 캐스팅한 후 같은 장면을 각 배우가 한 번씩 촬영해 두 버전의 영화를 만들었다.2 결국 국내에서는 최은희 주연판이 1966년 9월 29일에 개봉했고, 홍콩에서는 리리화 주연판이 <觀世音 The Goddess of Mercy>이라는 제목으로 1967년 3월 21일 개봉했다.
<대폭군> 국내판의 발굴, 수집은 쇼브라더스 필름 컬렉션의 배급권을 인수한 셀레스 픽처스(Celestial Pictures)를 접촉하면서 가능해졌다. 2010년 당시 해외 수집 담당자가 홍콩에 출장 방문하면서 조사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그때 셀레스 픽처스와 합작영화 보유 여부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의 홍콩판이 아닌 국내판이 존재하는지 확인하기 전,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후 2015년 필자가 셀레스 픽처스에 연락해 출장 방문하면서 협의를 재진행할 수 있었다. 이때 홍콩필름아카이브에 맡겨진 <대폭군>의 필름들을 확인해보니 홍콩판뿐만 아니라 국내판 전편의 원본 픽처 네거티브와 사운드 네거티브, 그리고 오프닝 크레디트 자막 네거티브까지 보존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운드 네거티브 11릴 중 릴7은 아쉽게도 과도하게 훼손되어 잘 들리는 사운드 추출이 불가능해 11분 정도의 사운드가 유실되었으나, 나머지 필름은 다행히 더 늦기 전에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현지 현상소 리마진 리트로바타 아시아(L’Immagine Ritrovata Asia)에 4K 디지털 스캔을 의뢰해 2016년에는 <대폭군>을 <달기>와 함께 수집했고, 2017년에는 <흑도적>(최경옥, 엄준, 1966)과 <철면황제>(최경옥, 하몽화, 1967)도 수집할 수 있었다.
<대폭군> 국내판과 홍콩판을 자세히 비교하면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존의 배우 교체 방식으로 제작된 합작영화들은 배우 교체가 필요한 장면들만 테이크(take)를 두 번씩 촬영하고 나머지는 각 버전 간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프레임씩 비교하면서 보는 순간 영화의 모든 장면이 테이크를 두 번씩 촬영하고, 각 버전에 다른 테이크를 사용했다는 것이 보였다. 결국 홍콩판과 국내판에 나오는 모든 숏이 서로의 대체 테이크(alternate take)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전체를 두 번씩 찍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다. 이와 비슷하게 배우를 교체하면서 촬영된 <반혼녀>와 <흑발>도 간단히 홍콩판과 국내판을 비교해보니 마찬가지였다. 이런 합작영화들이 배우 교체 장면 외에도 모든 장면을 두 번씩 촬영한 이유를 추정하자면 각 버전의 원본 네거티브 편집본을 따로 생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필름 소모량이 일반 영화 촬영보다 훨씬 많고 촬영 시간도 그만큼 오래 걸렸을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폭군>의 모든 장면이 버전마다 다른 테이크를 사용했다고 했지만 한 가지 예외 사항을 발견했다. 바로 오프닝 크레디트 이후 묘장왕(김승호)이 군사에게 전투 근황을 보고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나오는 각 버전의 숏을 비교해보니 카메라 앵글은 조금씩 다르나 배우들뿐만이 아니라 뒤에 펄럭이는 깃발까지도 움직임이 완전히 동일해 같은 테이크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카메라 두 대를 비슷한 앵글에 맞춰 동시에 돌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멀티캠(multi-cam) 촬영 방식으로 찍은 경우, 특히 대화 장면을 찍은 사례는 당시 한국영화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것이어서 매우 놀랍다. 왜 이 장면만 그렇게 촬영되고 나머지 모든 장면은 하나의 카메라로 테이크를 두 번씩 촬영했는지 의문인데, 카메라 두 대를 모든 숏을 위해 세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카메라 두 대를 돌리는 방식의 실현 가능성을 시험해보려고 이 한 장면만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파면 팔수록 합작영화는 참 재미있다. 독자들도 꼭 <대폭군> 국내판을 관람해 그동안 보지 못한 최은희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고, 홍콩판도 챙겨 보면서 두 여배우의 연기 접근 방식을 대조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다른 합작영화도 이런 식으로 각 버전을 비교하는 재미를 느끼기 바란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