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천국」 발간 10주년 기념 특집 한국영화 걸작의 재발견 영화 전문가 150인의 ‘한국영화 걸작’

by.「영화천국」 편집팀 2018-08-20조회 2,931

당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숨은 걸작은 무엇인가요?

「영화천국」 10주년을 맞아 그간 ‘걸작의 재발견’ 코너를 통해 진행해온 한국영화 걸작을 찾는 프로젝트를 특집 지면 위에 불러 모아본다. 영화감독, 현장 스태프, 기획자, 프로듀서, 홍보 담당자, 영화평론가, 영화 전문 기자 등 150인의 문화계 인사들이 뽑은 ‘한국영화 걸작’은 무엇일까. 1936년에 만들어진 양주남 감독의 <미몽>부터 2017년 개봉된 변성현 감독의 <불한당>까지, 영화 전문가들이 가슴 깊이 담아둔 한국영화 걸작125편의 이름을 여기 호명한다.

한국영화 걸작’ 목록 구성 방법

영화 전문가 및 문화계 인사 150여 명에게 본인이 생각하는 한국영화 걸작 추천을 요청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영화 걸작’은 어떤 작품인가요?” 한국영화 걸작을 선정한 뒤 선정 이유에 대해 200자 내외로 적어달라고 요청했고, 150명이 해당 요청에 귀중한 답변을 보내주었다. 선정 영화 총 125편은 제작연도 순으로 배치했다. 선정 기준은 2017년까지 완성된 한국영화이며 장·단편, 극영화,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한국이 포함된 합작영화 등을 모두 아울렀다.


 
1930’s~1950’s

미몽 | 양주남, 1936  VOD
근대화 물결 속 1930년대 도시 경성, 봉건적 현모양처 역할로부터 자유로운 욕망을 추구하는 애순의 탈주와 처벌이 멜로드라마 내러티브 양식으로 펼쳐진다. ‘인형의 집’을 벗어나고픈 애순의 욕망을 대변하는 새장 속 새, 권위적 가부장 남편과 애순의 부부싸움을 담아내는 흔들리는 화장대 거울, 당대 최고의 춤사위로 화제를 모았던 조택원의 무용극을 담아낸 미장센과 이미지 수사학은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기능과 더불어 젠더 관점에서 근대화와 함께 등장한 ‘모던걸’(신여성)에 관한 인식 체계를 드러내준다.
유지나 영화평론가,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수업료 | 최인규·방한준, 1940  VOD 
소나무가 아름다운 수원으로 가는 길, 13세 소년이 걸어간다. 돈벌이 나간 부모가 돌아올 때까지 할머니와 생활을 견디는 그는 친척집으로 수업료를 구하러 간다. 버스가 지나가며 아이들이 창 밖으로 무엇인가 버린다. 소년은 그것을 주워보지만 빈 껍데기. 최인규의 <수업료>는 아역배우의 연기가 좋고 영상이 아름답다. 나는 20년 후 <저 하늘에도 슬픔이> <사격장의 아이들>을 만들게 되었다.
김수용 영화감독

반도의 봄 | 이병일, 1941  VOD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인들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치열한 작업 현장을 그린 ‘웰 메이드’ 영화다. 다정하고 연약해 보이는 핸섬 보이 김일해와 선이 아름답고 새침한 김소영뿐만 아니라 서월영, 김한, 복혜숙 등 당대 인텔리 예술인들이 대거 출연한 초호화 캐스트 영화이기도 하다. 중국전영자료관에서 2005년 발굴?복원되어, 오랫동안 2차 자료에 의지했던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사 연구에도 크나큰 역할을 했다. 당시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선보였으며(영화 상영 전 김소영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 어떤 해외영화들이 영화인의 사랑을 받았는지(합숙소에 걸려있는 유럽영화 포스터), 다양한 정보가 곳곳에 숨어있는 너무나도 흥미로운 영화로, 감히 걸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성지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

미망인 | 박남옥, 1955  VOD 
1955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여성이 감독한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 박남옥 감독의 첫 영화이자 한국영화사 첫 여성감독 영화. 6?25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이와 남겨진 미망인이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어 여성의 관점에서 당대 현실을 관통한 작품. 영화제작 과정과 박남옥 감독의 생애는 곧 영화 바깥과 안이 구분되지 않는 한국 여성영화인의 역사가 된다.
김선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수석프로그래머

피아골 | 이강천, 1955  VOD 
<피아골>이 실패한 반공영화였다는 동시대의 비판은 지금 와서 보면 이 작품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극찬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1950년대에 만들어진 반공물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한 걸작이란 관점도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전쟁의 지옥도를 아무런 검열 없이 가차없이 그리려는 1950년대의 영화예술가에게 빨치산 주인공의 반공물만큼 완벽한 틀이 있었을까?
듀나 영화 칼럼니스트, SF작가

서울의 휴일 | 이용민, 1956  VOD 
로마를 유유히 돌아다니는 <로마의 휴일>이 이상화된 일상을 로맨틱하게 제시한다면 이용민 감독의 <서울의 휴일>은 번번이 휴일을 만끽할 수 없는 ‘문제 부부’를 통해 자본주의(소비사회)의 은밀한 욕망을 꿈꾼다. 이들이 배회하는 1950년대 중반의 서울은 아직 근대화?산업화를 이루지 못한 도시로, 새로운 변화의 활기와 공간적 황량함이 묘하게 공존한다. 약 6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숨 가쁘게 사는 우리가 휴일을 온전히 즐길 수 없다는 점이다.
전종혁 영화평론가
  
자유부인 | 한형모, 1956   VOD 
정비석의 동명 신문 연재소설을 각색한 영화 <자유부인>은 원작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수도극장에서 개봉한 이후 놀라운 흥행 성적을 거두었고, ‘국산영화계의 새로운 에폭을 지어놓은 작품’이라는 비평계의 찬사를 받았다. 영화는 전후 무분별한 사치와 부패가 판치는 세태 풍조를 고발하지만, 한편으로 주인공 오선영을 통해 서구화가 불러온 새로운 윤리의식과 여성의 욕망에 대한 양가적 시선을 드러낸다. 또한 광복 이후 최초로 시도된 크레인과 달리의 유려한 움직임 덕분에 <자유부인>은 근대 도시의 생동감을 전달하면서 현대 감각을 표현하는 본격적인 ‘영화다운 국산영화’로 평가되었다.
이길성 중앙대 강사

청춘쌍곡선 | 한형모, 1956   VOD 
1956년 개봉 당시는 물론, 지금 기준에서 보더라도 재미있는 이야기와 볼거리, 들을 거리가 풍성한 작품. 잘 뽑힌 오락영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가족, 로맨스, 코미디, 음악 등 다양한 흥행 요소에 더해 양념같이 적당한 세태 풍자도 놓치지 않았다. 이후 여러 작품에 영향을 주며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끈 디딤돌이자, 김시스터즈와 영도다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시대의 스냅이기도 하다.
이준희 대중음악연구가

지옥화 | 신상옥, 1958   VOD  
이토록 강렬한 아프레걸! 전후 빈곤과 절망만이 가득한 가운데, 홀로 삶에 대한 욕망과 의지와 정열을 불태우는 양공주 쏘냐의 이야기는 내러티브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놀라움 그 자체다. 쏘냐의 유혹적인 자태와 스릴 넘치는 자동차 추격 신, 그리고 마지막 진흙탕 속에서의 파국까지,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이 잘 짜인 드라마인 <지옥화>는 1950년대 한국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을 선사한다.
박선영 영화연구자


 
1960’s

로맨스 빠빠 | 신상옥, 1960   VOD 
21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의 남자 배우들이 아버지 역할을 맡아 연기한 것은 ‘상실’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영화가 ‘지키지 못한 어떤 것’으로 가족을 계속 이야기하는 데 주목한다. 한국의 아버지 상을 대표하는 김승호의 <로맨스 빠빠>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다가오는 경우다. 가부장의 복권에 연연하는 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돌아가거나 되살리고 싶은 것의 원형이 언제나 기억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선택했다.
이용철 영화평론가

하녀 | 김기영, 1960   VOD 

한국영화의 최초 전성기로 1960년대를 회고해보았을 때, 그 중심에는 영화 <하녀>가 자리 잡고 있다. 연극 연출가 출신답게 김기영은 2층과 아래층이라는 폐쇄된 공간 장치를 통해 1960년대 새롭게 대두한 계급의 문제와 이를 전복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그로테스크하게 시각화한다. 집안의 내부를 꿰뚫는 것 같은 카메라의 줌인이라든지 이에 걸맞은 피아노의 파쇄적인 음향 효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쥐로 상징되는 하녀와 그녀의 복수 심리는 지금 보아도 정신분석학의 교과서처럼 보인다. 유현목의 <오발탄>이 리얼리즘 영화의 전통을 세웠다면, 김기영의 <하녀>는 표현주의적이며 장르적인 화법으로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 걸작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검은 마성의 감독, ‘김기영’을 증명하는 압도적인 표현주의 미학의 걸작. ‘서구적인 중산층 저택’으로 상징되는 1960년대의 욕망과 시대적인 지표들, 그 멀끔한 표면을 갈라 해부학적으로 전시하는 계급과 권력, 금기와 처벌, 그리고 억압된 성적 에너지와 이를 둘러싼 공포와 죽음의 미장센. 한국 사회에 출몰한 근대화의 괴물성을 가장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로테스크 미학의 정점.
정지연 영화평론가

1960년 세계 영화계는 두 편의 걸작을 얻었다. 한 편이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라면 또 한 편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다. 이렇게 아름답고 기괴한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오랜 병폐이자 치부인 ‘가부장’에 대해 후벼 파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김현수 「씨네21」 기자
  
마부 | 강대진, 1961   VOD 
<마부>는 결말부에서 가공할 만한 힘을 드러낼 때까지 잔잔한, 조금은 익살스럽기도 한 영화다. 그 중심에 있는 한 가족은 사회적 격변기의 상징이다. 마부인 아버지(김승호가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는 자신의 직업이 역사 속에 사라져가는 것을 목도할 수밖에 없다. 유능한 자녀들조차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낙관주의를 성취한다.
달시 파켓 영화평론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신상옥, 1961   VOD 
“아저씨는 뭘 제일 좋아하우?” 옥희의 귀여운 한 마디로 기억되는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시나리오 수급도, 영화제작 현장도 열악했던 1960년대 초. 이 작품은 소설을 읽으며 상상하던 장면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문예영화만의 장점과 함께 소설에는 없는 계란장수와 식모의 사랑 이야기가 삽입되어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루어지는 사랑’에 대한 쾌감을 선사한다.
김승경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

삼등과장 | 이봉래, 1961   VOD 
1960년 4·19 이후 달라진 사회 분위기 속 서민 코미디의 특징을 담고 있는 영화다. 부조리한 권력에 대한 풍자적 대사, 봉건과 근대의 충돌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에피소드, 도시 핵가족의 생활 묘사 등은 전쟁과 혁명, 쿠데타로 혼란스러운 사회를 살아야 했던 대중에게 일상의 활력소가 되었다. 해학과 정이 넘치는 아버지 역의 배우 김승호의 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오발탄 | 유현목, 1961   VOD  

<오발탄>은 분단의 비애와 실향의 좌절감, 이산의 고통을 실성한 노파의 절규를 통해 표출한 리얼리즘 영화의 수작으로, 유현목 감독의 시대정신과 작가 의식이 돋보인다.
김종원 영화사 연구자·평론가

“가자!” 노모의 목소리가 화면을 잠식하다 이윽고 스크린 바깥으로 뿜어져 나온다. 이범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6?25전쟁 전후 한국 사회의 그림자를 조망하고 부조리를 관통한다.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시금석으로 거론되는 작품이지만 형식적으론 도리어 과감한 몽타주, 사운드와 이미지의 충돌 등 여러 실험적 요소가 돋보인다. 시적이면서 동시에 사실적인, 현실 반영으로서의 영화미학. 리얼리티가 아닌 리얼리즘. 그 본령을 제대로 담아낸 걸작.
송경원 「씨네21」 기자

돌아오지 않는 해병 | 이만희, 1963   VOD 
시간 속에 머물러 있는 영화가 있고, 시간을 통과하는 영화가 있다. 이만희 감독의 작품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그렇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1960년대에 제작된 작품임에도 아직 그 유효기간을 연장하고 있는 영화다. 전쟁의 서사와 액션, 그리고 당연히 그에 수반되는 스릴, 서스펜스를 담고 있으면서 웃음 또한 그 안에 녹여내고 있다. “내가 죽으면 누가 너희들을 웃겨주니!”라는 명대사와 함께.
이명세 영화감독
 
검은 머리 | 이만희, 1964    VOD
함정에 빠져 보스의 아내에서 거리의 여인으로 전락하는 여주인공. 그녀를 용서하고자 자신이 세운 계율을 어겨 스스로를 처벌해야 하는 조직의 보스. 이들의 비극적인 행로를 그린 이 영화는 기존 한국영화의 어떤 장르 규정에도 맞지 않는 독특함을 보여준다. 거대한 운명이 부여하는 극히 제한된 가능성 내에서나마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기꺼이 책임지는 이만희식 인간관의 원형이 드러나는 영화. 이만희 초기 영화세계의 극점.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 정창화, 1965
태평양전쟁 당시 미얀마 전선을 배경으로 한 정창화 감독의 항일 액션영화. 일본 군국주의를 신봉하는 조선인 학도병이 미얀마 반군과의 사랑,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 등을 통해 각성하고 반군으로 돌아선다. 경기도 광릉에 고스란히 재현해낸 미얀마의 열대림은 마치 현지 로케이션 같았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액션은 ‘역시 정창화’였다. 주인공을 통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던 조선인의 이중적 정체성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데 1965년 한일수교를 앞두고 제작되었다는 점이 시사적이다. 주인공은 결국 죽음으로 분열된 정체성을 봉합했건만….
배수경 영화사 연구자

갯마을 | 김수용, 1965   VOD
아름다운 영화라 하더라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 고유의 멋은 점차 퇴색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갯마을>은 언제든 다시 봐도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다. 영화적 감각과 미학이 당시로서는 굉장히 앞서 있던 것이다. 척박함 속에 숨어 있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영화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김수용 감독에게 뛰어난 작가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일성 촬영감독

군번 없는 용사 | 이만희, 1966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는 냉전 시대 한국영화에서 6?25전쟁의 재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곤 했다. 그런 점에서 <군번 없는 용사>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계승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검은 머리> <마의 계단> 같은 도시 범죄영화를 통해 닦아온 누아르적 스타일을 만개시킨 역작이다. <만추>와 <귀로>로 나아가기 전, 전쟁영화와 도시 범죄영화라는 이만희의 초기 작품 경향이 이 작품에 응축되어 있다.
이순진 영화사 연구자

만추 | 이만희, 1966 
이만희 감독의 여러 작품 중 그의 뛰어난 영상미와 연출 감각을 오롯이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만추>라고 생각한다. <만추>는 절제된 대사를 기반으로 한 시나리오의 구성이 상당히 뛰어났고, 이를 영상으로 옮길 때의 감각 또한 탁월했다. 그 때문에 이 작품의 시나리오는 일본으로 수출되어 영화화되기도 했다. 현재 영상이 남아있지 않아 너무나 안타깝지만, 하루빨리 필름이 발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성일 영화배우

물레방아 | 이만희, 1966   VOD
문예영화라는 장르 아닌 장르에서 태어난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걸작이다. 감독 이만희와 작가 백결은 나도향의 유명한 토속적 리얼리즘 소설로부터 무대와 인물만 가져왔을 뿐 대부분의 요소를 재창조해,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괴담을 빚어낸다. 현실과 악몽의 경계는 흐려지고, 귀기와 관능이 뒤섞이며, 서사는 출구 없는 미로로 이끈다. 우아하고 과감한 앵글의 촬영(서정민)도 더없이 매혹적이다.
허문영 영화평론가

귀로 | 이만희, 1967   VOD
전쟁의 후유증으로 몸도 마음도 불구가 된 남편. 14년간 그를 보살펴온 지연은 호감을 가지고 접근해온 젊은 기자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이만희 감독의 작가적 역량이 최고조에 달한 1960년대 후반, <만추>와 <휴일> 사이에 발표된 작품으로 한국 멜로드라마의 최고 걸작 중 한 편으로 꼽힌다. 떠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흔들리는 지연의 모습과 황량한 서울의 풍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서늘한 멜로드라마로 극한 상황에 처한 인물의 심리와 공간 묘사에 탁월했던 이만희 감독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모은영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흥부와 놀부 | 강태웅, 1967
한국 최초의 스톱 모션 인형 애니메이션이다. 같은 해 개봉한 한국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전>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작품이지만 지금 봐도 놀랄 만한 표현력과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후 강태웅 감독은 두 번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콩쥐팥쥐>를 완성하기도 했다.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통틀어 유일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인 그의 두 작품 중 하나라도 흥행에 성공했다면,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조금 더 풍성해지고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꼭 기억해둬야 할 한국영화사의 보물과도 같은 작품이다.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안개 | 김수용, 1967   VOD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안개>는 1960년대 작품치고는 실험적인 성격이 강하다. 서울 생활에 지친 30대의 주인공이 고향 무진에 와 20대 시절의 자신과 대면하는 형식 자체가 굉장히 파격적이다. 나는 누구인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는 주인공의 처지를 ‘안개’에 휩싸인 무진에 빗댄 이야기 자체가 꽤 현대적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을 말할 때 첫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
  
미워도 다시 한 번 | 정소영, 1968   VOD 
‘신파’나 ‘최루성 멜로’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다소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작품은 관객의 감성 속 깊은 곳에 닿아 짙은 공감과 눈물을 끌어내기도 한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한국 신파?멜로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본처와 첩 간의 갈등이라는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어 사회성 드라마의 기초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악인이 없다. 슬픔은 실타래처럼 엉킨 각자의 사정 속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인간 사회는 이런 실타래를 만들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왔다. 이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을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두용 영화감독

장군의 수염 | 이성구, 1968  VOD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염>은 1960년대 후반의 한국 모더니즘 계열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전후 ‘한국 사회의 분열적 주체’와 같은 리얼리즘적 수사를 구성적이고 회화적인 미장센으로 병치해 가히 ‘한국의 모던적 시네마’라 할 만한 명작이다. 특히 신동헌 감독이 참여한 애니메이션 부분은 장시간 노출, 빛샘 효과, 이중 인화 등을 통해 색채의 우연적 변화를 꾀하는 시각적 실험을 보여주는데, 이는 작품 후반 변종하의 추상화들과 대비를 이루며 그 자체로도 모더니즘의 전범(典範)으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태식 괴수연구가
  
내 것이 더 좋아 | 이형표, 1969
우연한 만남으로 구봉서의 아내 역할을 하게 된 서영춘. 이들의 역할놀이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이 영화는 1960년대 중후반 유행한 ‘여장남자 코미디’의 하나다. 코미디 장르의 전복성은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비웃고 이를 응징하는 데서 여실히 발견된다. 이들 부부의 극장 나들이 장면이 보여주는 영화적 자의식은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지윤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팀

수학여행 | 유현목, 1969   VOD 
<수학여행>은 눈이 바쁜 영화다. 섬마을 초등학생들이 서울로 수학여행을 떠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에는 서른 명에 가까운 아역 배우가 출연한다. 대부분 비전문 배우인 이 아이들은 주어진 역할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소화한다. 그 결과 우리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개성 넘치는 표정과 ‘통제’되지 않은 몸짓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의 넘치는 생동감과 이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포착한 카메라는 관객의 눈을 피곤하게, 동시에 즐겁게 만들어준다.
김보년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휴일 | 이만희, 1968   VOD 

<휴일>은 빈털터리 남자 허욱의 한겨울 어느 일요일 하루를 그린 이야기다. 허욱과 그의 연인 지연은 아이 셋을 낳고 2층 양옥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임신 6개월째인 지연의 임신중절 수술비조차 없는 게 둘의 현실이다. 여자친구 수술비도 마련하지 못하는 무능력, 여자친구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만 번지르르한 죄책감, 친구의 돈과 시계를 훔쳤다가 잡혀 얻어맞은 상처 등 온갖 감정이 허욱을 더욱 쓸쓸하고 애절하게 한다. 그는 “서울, 남산, 전차, 술집 주인 아저씨, 하숙집 아줌마, 일요일 그리고 모든 것, 난 다 사랑하고 있지”라고 말하는데 허세 가득한 이 남자가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니 무척 씁쓸할 뿐이다.
김성훈 「씨네21」 기자

<휴일>의 휴일은 출구도, 가망도, 끝도 없다. 휴일이라는 폐쇄회로에 갇힌 듯한 인물들은 가난 때문이든 불안 때문이든 무료함 때문이든 저마다의 이유로 그저 이 답 없는 휴일을 버틸 뿐이다. 아니다. 이 모든 게 다 휴일 때문이다. 내일(미래)도, (서로의, 또 각자의) 마음조차도 믿지 못한 채 실존적 고민을 떠안고 사는 이만희의 인물과 그 세계를 오롯이 목격할 것이다. 이들의 휴일은 더없이 고독하고 충분히 아름답다.
정지혜 영화평론가

스토리의 전달보다는 인물이 처한 공간의 풍경과 영화적(cinematic) 분위기로 말을 거는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 카메라는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롱 숏을 오가며 가난한 연인의 내면 풍경을 포착한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다다를 수 있는 예술성의 정점을 보여주는 이 작품 덕분에 우리는 잃어버린 <만추>에 대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


 
1970’s

화녀 | 김기영, 1971   VOD 
1971년. 하녀 명자의 스크린 등장은 한국영화사 여성상의 변화를 뜻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녀는 겁탈당하고도 좌절하지 않았고,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심에서도 주눅 들지 않은 당찬 여성이었다. <하녀>로부터 11년 후, <화녀>에 이르러 김기영 감독은 변화하는 시대 속 변화하는 여성상을 그려낸다. 파격적이고 스타일리시한 김기영 감독의 독창적 에너지가 한껏 고조되는 가운데, 당시 스크린 데뷔를 한 새로운 기운의 배우 윤여정의 에너지가 만나 이룬 최상의 합. 2018년 현재에 와서도 <화녀>가 가진 강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화정 「씨네21」 기자

충녀 | 김기영, 1972   VOD  
<충녀>는 1970년대 당시의 여타 작품과는 달리 새로운 충격을 준 영화다. 출연진의 연기와 미장센, 이야기의 흐름 등이 동시대의 한국영화와는 스타일이 확연히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개봉 당시 고교생이던 나는 이 영화의 새로움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현재까지도 가장 인상 깊은 영화로 이 작품을 꼽곤 한다.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현재까지 꾸준히 거론되는 이 작품을 ‘걸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화시 영화배우   
        
바보들의 행진 | 하길종, 1975   VOD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 시대의 아이러니한 걸작이다. 젊은이의 절망도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용공이 되고 명랑과 건전만이 강요되던 유신체제기, 이 영화는 당시 대학생의 모습을 코미디로 풀어내고 결말에는 주인공을 입대케 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명랑과 건전을 충족시킨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바보’가 되어야 살 수 있는 청년들의 현실을 웃음으로 비틀며 비극보다 더 진한 슬픔을 자아낸다.
박유희 영화평론가

화분 | 하길종, 1972   VOD   
한국영화사에서 혁신과 자괴 사이를 길항하는 하길종이라는 작가의 전무후무한 위상을 보여주는 작품. 미학적 성취와 정치적 비판을 향한 하길종의 자의식은 정교하고 일관된 영화 형식을 통해 ‘완성’되기보다 텍스트 곳곳에서 발견되는 균열의 연속을 통해 징후적으로 드러난다. 텍스트-작가-비평담론-해석 네트워크 사이의 갈등과 협상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부정합의 텍스트.
박진형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삼포 가는 길 | 이만희, 1975  VOD   
그렇다. 마흔넷에 숨을 거둔 이만희는 한국영화 역사의 예외적인 천재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의 예술적 절정인 <만추>를 볼 수가 없다. 그 전설적인 걸작의 필름이 발견되기 전까지 <삼포 가는 길>은 이만희의 천재성에 대한 마지막 증언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로드무비 없이 우리는 <고래사냥> 시리즈, <안녕하세요 하나님>과 <세상 밖으로> 같은 영화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김도훈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1975  VOD  
영자는 어느덧 도시의 응어리지고 어두운 이면을 상징하는 시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서울로 온 그녀는, 식모에서 여공으로, 버스 안내양에서 다시 외팔이 창녀로 전락의 삶을 살아간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한 여성이 자신에게 쏟아진 시대의 질곡을 지나 마침내 ‘기적’과 같은 생을 이룬 희망에 대한 의지에서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있다.
김미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겸임교수

야행 | 김수용, 1977  VOD   
원작과 달리 시대적 죄의식이 뭉뚱그려진 탓에 가학적인 성적 일탈로 무력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여자의 야행은 개연성을 잃었다. 그럼에도 카메라가 1970년대 도시 풍경 속에 한 여자의 내면을 투영해내는 방식은 놀랍다. 여자는 자신의 아픔(혹은 욕망)을 똑바로 보고 질문하듯 거리를 서성이다, 답을 하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겨울, 어깨를 웅크리고 홀로 고궁 길을 걷던 윤정희의 민낯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이지영 한국영상자료원 카탈로깅팀

로보트 태권 V | 김청기, 1976  VOD   
태권 V에 대한 논쟁이 지금도 후끈하다는 건 이 작품이 여전히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논쟁의 여러 지점은 기실, 1976년 당시 한국 사회 자체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여하튼 당대의 관객에게 <로보트 태권 V>는 한 점의 의구심도 없는 절대 영웅이었다. 방방곡곡 주제가가 울려 퍼졌고, 아이들은 저마다 주요 동작을 흉내냈다. 영화관은 비로소 어린이를 위한 즐거움을 선사하기 시작한다.
나호원 애니메이션 연구가

이어도 | 김기영, 1977  VOD

끝을 알 수 없는 억압과 혼란으로 치닫던 시대가 낳은 작품. 김기영의 예사롭지 않은 필모그래피 속에서도 단연 돌출적인 지점. 욕망과 죽음에 정면으로 맞서 펼친 그로테스크한 예술적 비전. 이화시와 박정자의 표정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영화적 에너지. 쉽사리 규정되지 않는 스케일의 정신세계. 난해함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감각의 왕국. 한국영화의 심연.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김기영의 <이어도>는 우수영화로 지정되기 위해 영화사의 국책영화로 제작된, 상대적으로 대중성을 의식하지 않고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1970년대 유신 정권의 기묘한 영화 정책이 우산을 펴준 일종의 기적 같은 작품이다. 샤머니즘의 지배와 오염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어느 바닷가 마을의 2대에 걸친 정념의 복수극은 김기영의 연출을 통해 지울 수 없는 잉여의 이미지를 남긴다. 이화시를 비롯한 배우들의 인상적인 형상도 쉽게 잊을 수 없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웃음소리 | 김수용, 1978

스타 배우 남정임이 그 전성기를 지난 시기에 남긴 수작. 남정임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연기의 저력은 더 화려해 보인다. 주인공 남정임이 말하는 모습은 단 한 장면도 등장시키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도전적인 연출을 비롯해서 가끔씩 삐끗해서 우스꽝스러워질 때도 있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기교와 장식도 넉넉하니 재밌다. 한 세대 전 온천 관광지의 쓸쓸해 빠진 가을 풍경도 구경거리다.
곽재식 화학자, 작가  


 
1980’s

최후의 증인 | 이두용, 1980   VOD

6?25전쟁과 분단을 다룬 영화 가운데 <최후의 증인>은 가장 유장한 영화일 것이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그저 회복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전되고 증폭되어 반복의 악순환을 거듭한다. 이두용 감독은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전개를 통해 30여 년에 걸친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지극히 영화적인 어법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어둠을 정면으로 바라본 한국영화사의 보기 드문 예다.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한국영화는 외국영화에 비해 왜 저럴까? 그것은 불만이고, 결핍이었다. 2000년대 초반 <최후의 증인>을 보았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였다. 이 영화를 본 후 나는 외국영화에 대한 열등감이 쓸데없음을 깨닫고 날려버렸다. 한국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였고, 박해받은 이력을 포함해 모든 면에서 한국영화적이었다. 하드보일드이고, 표현주의적이었다. 게다가 한국영화의 고질적 병폐라 비아냥거리는 신파까지도 이 영화 속에서는 결핍이 아니라 당당한 정체성이 된다.
오승욱 영화감독

바람불어 좋은 날 | 이장호, 1980   VOD 
이 영화를 처음 만나는 관객이라면 거의 열 명에 가까운 주요 등장인물이 각자의 이름과 성격, 스토리를 가진 채 러닝타임 내내 확실한 존재감을 뿜어낸다는 사실에 먼저 매료될 것이고, 각각의 플롯이 얼마나 정교하게 얽혀 다양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곧장 감탄했다가, 온통 공사장인 영화 속 배경이 1980년 강남 일대라는 사실에 결국 놀랄 것이다.
백승빈 영화감독
  
피막 | 이두용, 1980   VOD 
공포물에 무력하고 취향도 변변치 않던 어린 시절의 내게 이두용 감독의 <피막>은 강렬하게 각인된 영화다. 무서운데도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최강의 몰입도를 이끌어낸, 본다기보다 압도당하는 경험. 지금이라면 토속과 공포와 추리의 장르적 복잡성을 이것보단 더 세련된 구조로 짜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아는 <피막>의 박력은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DVD나 블루레이로 출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연하기만 하다.
성문영 음악평론가
  
깊은 밤 갑자기 | 고영남, 1981
 
주인공 선희는 가정부 미옥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믿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 공포는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선희의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 영화는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탄탄하고 섬세하고 섹시하고, 무엇보다 섬뜩하도록 무서운 장르적 재미를 두루 갖춘 영화. 권선징악적 원인이나 교훈 같은 건 안중에 없다는 듯 내달리는 심플하고 모호한 공포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정우열 웹툰 작가

만다라 | 임권택, 1981   VOD  
「금강경」 사경을 오랫동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구절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만다라>를 다시 보면서, 깨달음을 향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나아가는 수행자들을 만난다. 영화의 풍경은 수행자들의 고뇌와 맞닿아 있고, 그 속에서 구도를 논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새삼 절절하다. 어떤 장애가 닥쳐도 수행을 멈추지 않는 그들을 따라, 「금강경」을 다시 펼친다.
김경욱 영화평론가

꼬방동네 사람들 | 배창호, 1982   VOD  
초등학교 때 왼손을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아이가 있었다. 나는 슬쩍이라도 그 친구의 왼손이 보고 싶었고, 그런 마음이 드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 학년을 마치고 헤어질 때까지 끝내 나는 그 친구의 손을 보지 못했다. ‘검은 장갑’, 김보연은 그런 나의 어린 시절을 일깨우며 깊은 인상을 남긴 주인공이다. 검은 장갑은, 감정과 욕망을 힘겹게 누르고 도리를 지키며 살고자 하는 윤리적인 인물이지만, 그 숭고함을 겸허하게 ‘팔자’라는 말로 대신한다. 가슴 아프게 가난해도, 많이 배우지 않아도 아름답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꼬방동네 사람들>이다.
박찬옥 영화감독

바보선언 | 이장호, 1983   VOD   
치밀한 프리 프로덕션, 미래를 엿보는 예술적 혜안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즉흥적인 감각이 모든 것을 이끈다. 제한과 압박이 심할수록 유희가 빛을 발하기도 한다. 검열 덕분에 시나리오도, 콘티도 없이 촬영을 시작했던 <바보선언>은 시대의 공기를 극도로 예민하게 포착한다. 바보가 되지 않으면 즐거울 수 없던 시대에 오히려 빛나는 유희 정신. 그 짜릿한 감각이 날것으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김봉석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고래사냥 | 배창호, 1984 
요즘 관객에게 ‘먹방’ 배우는 단연 하정우겠지만, 나에게 원조 ‘먹방’ 배우는 바로 <고래사냥>의 안성기다. 춘자의 고향을 찾아 무작정 함께 길을 떠난 민우와 병태. 어느 마을에서 각설이 타령으로 얻은 음식을 바가지에 담아 크게 한 주걱 떠먹으며 세상 행복한 미소를 띠는 민우와 그런 그를 따라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는 병태와 춘자를 볼 때면 시대의 은유나 하층민의 연대와 같은 어려운 단어 없이도 영화가 주는 위로가 무엇인지를 느끼곤 한다.
정민화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팀

안개마을 | 임권택, 1982   VOD  
집성촌이나 다름없는 깊은 산속 마을에 한 여교사가 부임하고, 머리가 모자란 성불구자로 알려진 깨철이라는 거렁뱅이가 실은 이 폐쇄적인 공동체의 필요악이자 실질적 권력자임을 깨닫는다. 초법적 존재로서 ‘공인된 익명성’을 획득한 깨철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보여주는 눈빛은 한국영화사상 가장 위압적이라고 할 만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프리퀄.
김기호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복원팀

창수의 취업시대 | 김의석, 1984
여자들의 핸드백을 주로 노리는 소매치기 3인조는 명동과 서울역 일대를 어슬렁거리며 먹잇감을 물색한다. 그중 소매치기 기술이 없어 따돌리는 역할을 맡은 창수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잉여 산책자’의 시선으로 1980년대 중반 자본주의의 에스컬레이터를 탄 서울의 모습을 비틀며, 도시의 계급성과 씁쓸함, 소외와 죄책감을 짧고 묵직한 유머로 승화시킨다.
김동령 영화감독

길소뜸 | 임권택, 1985   VOD   

<길소뜸>은 6?25전쟁이라는 근대사의 비극이 당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에게 어떤 아픔을 남겼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속 주인공 부부와 그들의 자식은 전쟁통에 모두 흩어져 서로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긴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 동안 각자가 걸어간 길은 너무나 다르고, 그렇기에 어려움 끝에 성사된 재회도 그들을 가족이라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릴 수 없다. 역사적 아픔이 그것을 견뎌내는 개인에게 어떤 고뇌를 안겨주는지, 전쟁이라는 잔혹 행위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해주는 작품이 <길소뜸>이다.
김지미 영화배우

영화는 반드시 만들어져야 할, 피할 수 없는 바로 그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한창일 때 만들어진 <길소뜸>은 임권택 감독이 바로 그 ‘때’에 맞춰, 방송국과 서울을 세트 삼아 완성해낸 ‘운명’과도 같은 영화다. 잃어버린 아들을 드디어 찾았지만 선뜻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근현대사의 비극, 임권택 감독의 가장 냉담한 고백의 영화.
주성철 「씨네21」 편집장

<길소뜸>은 6·25전쟁으로 인한 이산과 재회를 다룬 영화다. 1983년의 ‘이산가족 찾기’라는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감독 나름의 시각으로 이산의 서사를 구성했다. 전쟁이 남긴 아픔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접근 방식은 냉정하다. 감정 과잉이나 집단 이념의 덫에 빠지지 않고 불행한 현실의 면면을 날카롭게 묘파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분단영화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
오영숙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깊고 푸른 밤 | 배창호, 1985   VOD
지금 한국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과감함으로 가득 찬 문제작. 미국 올 로케이션부터 배창호 감독의 전매특허 패닝 숏, 전복적인 캐릭터와 결말까지. 배창호 감독의 감각적 연출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소시민의 비극적 현실을 극대화했다. 배창호 영화의 깊은 자양분이던 소설가 최인호의 원작과 각본, 페르소나 안성기와 장미희가 빚어낸 욕망의 충돌이 더해져 지독한 사막이던 1980년대 한국영화에 푸른 풀 한 포기를 틔웠다.
정유미 「맥스무비」 편집장

씨받이 | 임권택, 1986   VOD 
임권택의 <씨받이>가 전 세계에 한국영화의 위상을 확립시킨 작품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고 해서 이것이 뻔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죽은 자들의 음험한 그림자 사이로 산 자들이 뿜어내는 욕망의 광채에 넋을 잃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옥녀가 담을 넘어 기어이 상규와 몸을 섞는 장면은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생명력의 최고치를 보여준다.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걸작이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이장호, 1987   VOD 
여자들은 피 흘리고 남자들은 무력하다. 이장호에게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그랬다. 때로는 서구문화에 책임을 묻거나(<과부춤> <무릎과 무릎 사이>) 종교적 구원을 모색하기도 한(<낮은 데로 임하소서>) 작가의 탐구는, 이 로드무비를 통해 분단이야말로 그러한 결정론의 씨앗이라는 통찰에 도달한다. 초유의 세피아 톤 영상 실험 또한 출구 없는 절망의 정서와 표리일체를 이룬다.
조민준 방송작가

상계동 올림픽 | 김동원, 1988 
그것은 어떤 길을 제시해준 영화였다.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 검열이 존재하던 시절.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로 지금 당장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슬픔과 격동의 현장 그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역사를 기록해야 함을 일깨워준 영화였다. 상계동의 철거민들과 함께 그곳의 눈물과 공기와 언어를 공유한 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이 관찰자일 뿐 아니라 참여자, 가족의 시선이기도 함을 증명했고, 대학가에서 삼삼오오 독립 상영을 통해 그 영화를 접한 많은 이들이 김동원 감독이 먼저 걸어간 그 길을 조심스레 따라 걸었다.
변영주 영화감독
  
칠수와 만수 | 박광수, 1988   VOD  
한국영화사를 관통해온 비평의 키워드를 ‘비판적 리얼리즘’이라 한다면 박광수는 나운규, 유현목, 하길종의 대를 잇는 적자(嫡子)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광장을 뜨겁게 한 변혁 운동의 열기 속에서 등장한 <칠수와 만수>는 옥상까지 밀려 올라가 끝내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두 하층계급 노동자의 모습을 통해, 시대가 평범한 이들에게 가한 폭력과 아픔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맹수진 서울환경영화제 프로그래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1989
청춘영화의 얼굴을 한 사회고발물. 생기 넘치는 고교생들의 일상은 한 꺼풀 벗겨보면 비극으로 돌변한다. 성적 압박, 경제력에 따른 차별, 학교폭력 등이 담겼다. 현실에 밀착한 신랄한 전개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란 유서를 남기고 떠난 여고생의 실화와, 당시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바탕이다. 벗의 죽음을 애도할 찰나도 허락하지 않는 비정한 경쟁에 내몰린 청춘들의 사투는 30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하다.
성선해 「맥스무비」 기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배용균, 1989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이 영화가 불현듯 나타났을 때, 영화사는 은총을 경험했다. 배용균은 지독하고도 명징한 이미지와 독경 소리만으로 삼라만상의 시작과 끝, 우주의 비밀과 삶의 시간, 생과 사, 간신히 붙잡은 화두와 바스러지는 육신, 성과 속을 관통한다. 생의 유한함에 따른 비애와 숭고한 떨림은 여린 잎사귀 하나, 작은 돌멩이, 온갖 색을 품은 저물녘의 하늘, 변화무쌍한 구름에 새겨졌다. 유일무이한 영화는 마침내 깨달음과 조우한다.
박인호 영화평론가
 


1990’s

그들도 우리처럼 | 박광수, 1990   VOD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지금처럼 뚜렷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철학이 유행하고 신인류가 출현했다는 호들갑스러운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 민주주의를 외치며 시대에 저항했던 ‘운동권들’은 갑자기 목표를 상실한 채 허둥댔다. <그들도 우리처럼>은 그 시대를 돌아보는 정직한 기록이자 절망 혹은 혼돈에 빠진 그들에게 보내는 가슴 벅찬 위로의 영화였다. 영화가 시대의 거울이라면 그 전면에 이 영화를 세워둘 수밖에 없다.
황희연 영화 칼럼니스트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이명세, 1990 
20대 신혼부부의 사랑과 심리를 그린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독창적인 시도들과 이명세 감독의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박중훈과 최진실의 놀라운 화학반응에 힘입어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원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가 됐다. 조정석, 신민아 주연의 진부한 리메이크는 이명세의 원작이 얼마나 걸출하고 놀라운 작품이었는지 다시금 확인시킨다.
태상준 영화전문기자

우묵배미의 사랑 | 장선우, 1990   VOD  
누런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는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은 다시 봐도 여전히 흥미롭다. 변화하는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는 탁월한 재능. 불륜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변 캐릭터가 빚어내는 역동적인 앙상블과 세심하게 담아낸 장면의 디테일은 여전히 명불허전이다. 너무 앞서 등장한 ‘진흙탕 속에 핀 연꽃’ 같은 영화.
김영우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경마장 가는 길 | 장선우, 1991   VOD  
<경마장 가는 길>은 다수의 평자에게 ‘포스트 모더니즘’의 징후로 받아들여졌다. 지식인 R의 눈에 투영된 부조리한 풍경이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을 노출하면서 당대의 윤리의식을 도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참된 가치는 당시까지의 수준에 상회하는 영화적 성취에 있다. 기하학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숏과 공간의 확장성, 심리묘사를 배제한 표면의 양식화를 통해 장선우는 한국영화의 지형을 일거에 바꾸었다. 주인공 R이 느끼는 딜레마에 대한 양식화를 통해 멀찍이 앞서가는 물질의 진화에 호응하지 못하는 의식의 답보를 통찰한 혁신적인 작품이다.
장병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개벽 | 임권택, 1991
나는 동학운동의 참뜻에 대해 잘 모르고 이 땅의 근대의 시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임권택의 <개벽>을 본다고 해서 그것들을 갑자기 깊이 깨닫게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통찰하려는 영화는 도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 대지의 풍경, 집회의 군중과 횃불, 밤낮으로 이어지는 방랑과 도주의 움직임으로 역사적 활극이 되는 영화는 진귀할 것이다. <개벽>이 그런 영화다.
정한석 영화평론가

게임의 법칙 | 장현수, 1994
<넘버 3> <초록물고기> <달콤한 인생> <신세계>의 공통점은? 바로 이 영화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한국형 누아르의 걸작 <게임의 법칙>은 홍콩 누아르의 전성기에 독보적으로 피어난 한국형 누아르다. 조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욕망과 좌절이라는 우리 서민들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한 이 영화는 대중성과 메시지, 장르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걸작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 용대가 결코 벗어날 수 없던 그 게임의 법칙이 여전히 유효한 곳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 더 아프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 변영주, 1995 

<낮은 목소리> 시리즈는 독립영화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기념비적 작품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담아 세상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치열한 제작 및 배급 과정을 통해 당대 독립영화가 고민하고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출발한 카메라는 주체적 각성과 실천을 겪으며 변화하는 인물을 기록, 다큐멘터리의 영화적 지평을 넓혀냈다.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적인 선언 이후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참혹한 인권침해가 세상에 알려졌다. 변영주 감독은 이를 7년에 걸쳐 3부작으로 제작했다. 특히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극장에서 개봉한 한국 최초의 다큐멘터리이며, 사회적 소수자의 고통을 타자화하는 문제를 극복한 작품이다. 감독의 성실한 관찰과 운동가로서 쟁점을 제기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남성 사회에 길들지 않은 여성주의적 시선을 견지하기 위한 감독의 정치적 실천이 놀라운 영화다.
김일란 다큐멘터리 감독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홍상수, 1996  VOD
유부녀와 밀회를 즐기면서 20대의 극장 여직원과 바람이 난 30대 소설가의 이야기를 다룬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그 후 1~2년 주기로 개봉된 후속 작품들의 원점이자, 강북 지역 술집, 허름한 여관, 삼각관계, 대학 시간강사 등을 주된 무대와 주인공으로 사용하는 홍상수의 캐스팅 스타일 그리고 ‘남녀불륜지사’로 사랑의 본질을 진단한 홍상수 리얼리티의 시작점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

나쁜 영화 | 장선우, 1997
2000년대 중반, 휴대폰 동영상을 삽입한 영화가 나왔고 그로부터 10년 후 인터넷에는 BJ들이 찍은 조잡한 자막의 영상이 넘쳐나고 있다. 스마트폰 촬영도 유튜브도 개인 라이브 방송도 없던 1997년에 장선우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포착해냈다. 동시대 미디어를 다룬 영화들이 <나쁜 영화>의 아류로 여겨지는 것은 그의 영화가 시대에 맞선 영화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김현수 모퉁이극장 대표

넘버 3 | 송능한, 1997 
20세기의 끝자락에서 한국 사회를 삼류가 판치는 세상이라고 말하는 <넘버 3>는 한국영화 최고의 풍자영화다. 살아있는 캐릭터와 톡톡 튀는 대사, 재기발랄한 영화적 표현, 그리고 날카로운 주제의식까지 <넘버 3>는 영화를 구성하는 그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다. 그런 송능한이 <넘버 3>와 <세기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만약 우리가 앞으로도 송능한의 세 번째 영화를 볼 수 없다면, 21세기 한국영화를 결산할 미래의 평론가들은 그의 부재를 21세기 한국영화계의 가장 큰 불행이라 말하지 않을까?
안시환 영화평론가

8월의 크리스마스 | 허진호, 1998 

죽음과 사랑이라는 테마를 동시에 다루면서도 신파와 눈물이 아닌 담담한 일상 속의 고요와 그 잔잔한 파동을 그려냄으로써 더 큰 공감과 감정적 울림을 이끌어낸 한국 멜로영화의 기념비적 작품. 홍상수와는 완전히 다른 결로 일상성에 대한 섬세한 연출을 선보이며 관객을 사로잡은 허진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이기도 하다.
백준오 플레인아카이브 대표

한국의 멜로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 전과 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이전 한국 멜로에서는 신파를 다루는 방식이 직설적이고 처절하다. 이 작품은 절제된 표현과 섬세한 감정으로 죽음과 가족, 그리고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 멜로도 근대를 넘어 현대로 들어왔음을 알렸고 한국 멜로 베스트5에 적어도 두 편은 올리게 될 허진호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다.
장형윤 애니메이션 감독

올가미 | 김성홍, 1997
미국에 <미저리>가 있다면 한국엔 <올가미>가 있다. ‘시월드’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회자될 수작. 고부갈등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 안에서 광기와 집착으로 뭉친 무시무시한 캐릭터로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압도적인 긴장감과 몰입감을 만들어냈다. 한국영화사에 다시없을 역대급 여성 캐릭터의 등장만으로도 한국영화 걸작 150편 안에 들어갈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강지연 영화사 시선 대표

강원도의 힘 | 홍상수, 1998  VOD
<강원도의 힘>은 통속적인 남녀 관계의 불온한 감정을 극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실존의 순간들 속에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다루며 날것의 미진한 힘을 과시한다. 사소하지만 부조리를 내포한 현실의 양상을 무력한 인물들이 꿈꾸는 일탈의 여정으로 그려가는 홍상수 감독의 공허한 백일몽 시리즈 중 돌발성과 우연성으로 직조되는 날것의 존재감을 가장 거칠게 그려낸 걸작이다.
김은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조용한 가족 | 김지운, 1998
<조용한 가족>은 호러와 블랙코미디의 새로운 장르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며, 한국영화에 다양한 장르물의 탄생을 촉발했다. 후일 한국영화계를 이끌게 되는 최민식, 송강호 두 주연 배우 외에도 개성 강한 걸출한 배우들이 한 가족으로 얽혀 벌이는, 결코 조용하지 않은 소동을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 마술처럼 장르의 변주를 이끌어내는 김지운 감독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리는 시작점이 된 작품이다.
모그 음악감독

광대버섯 | 염정석, 1999
죽어가는 누이동생의 모르핀 값을 벌기 위해 환각제(광대버섯)를 마시고 줄타기에 나선 남자가 있다. 그의 환영인가? 빛과 어둠, 소란과 침묵, 움직임과 정지 등 온갖 영화적 질료들이 흑백필름에 충돌하며 빚어낸 초월적 환영에 모두들 넋을 잃었다. 독립영화에 대한 비평 작업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 염정석은 독립영화계 ‘감독들의 감독’이었다. 한국영화사가 기억해야 할 이름.
강소원 영화평론가

소풍 | 송일곤, 1999
영화가 시대의 흔적을 남기고 기억하게 한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IMF 시대를 보여주는 영화로 <소풍>은 참 강렬하다. 죽음을 선택하고 달려가는 길마저 힘겨워 보이는 긴 호흡. 그들의 <소풍>이 정말 즐거운 ‘소풍’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고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진 않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유재균 일시정지 시네마 대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이명세, 1999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흐르는 계단 신과 빗속 결투 신 등 이명세 감독의 섬세한 스타일이 많이 회자되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내가 마음이 동하는 장면은 우 형사와 범인의 애인인 김주연이 포장마차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영화는 범죄의 이유는 물론 등장인물 저마다의 사연을 장황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애인의 은신처를 취조하는 우 형사에게 김주연이 묻는다. “아저씨는 왜 형사가 됐어요?”김주연은 어쩌다 살인자의 애인이 된 건지, 우 형사의 외로움은 어떻게 쌓여갔는지 그 많은 사연을 풀어내기에 영화는 시간이 없다. 이건 흔히 말하는 명대사가 아니다.
유성희 아트하우스 모모 프로그래머

| 배창호, 1999
배창호 감독은 “한국인의 주요 정서는 흔히 말하는 ‘한’이 아닌 ‘정’”이라 말한 바 있다. 과연 영화 <정>은 흔한 여인 수난사처럼 시작해 전혀 다른 길을 간다. 주인공 순이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인물조차 연민하고, 다른 이의 고난에 기꺼이 연대하며, 스스로 품위를 지킨다. 그는 ‘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서 종종 ‘구도(求道)의 길을 떠난’ 인물들이 마침내 찾아낸 답이 영화 <정>에 있다.
김숙현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2000’s

반칙왕 | 김지운, 2000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천편일률적인 코미디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최초의 B급 병맛 코미디를 보여준 작품이 바로 <반칙왕>이다. 당시 이 영화는 그야말로 새로운 충격이었다. 삶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평범한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영화!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은 나에게 반칙이었다.
이원석 영화감독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류승완, 2000 
수년에 걸쳐 만든 네 개의 단편을 이어 붙인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한국(독립)영화사가 기록해야 하는 중요한 사례이자 2000년대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한 편이다. 청년 류승완의 혈기와 뚝심이 빚어낸 독립영화의 성공 신화. 20세기 끝자락에 만들어 21세기가 시작하자마자 도착한 선물과도 같은 영화.
장건재 영화감독

춘향뎐 | 임권택, 2000  VOD
어화둥둥, 내 사랑아. 북을 치고 장단 맞춰 소리가 시작되면 임권택과 그의 카메라와 조명과 모든 스태프가 일사불란하게 장단 맞춰 움직이기 시작한다. 춘향과 이몽룡, 향단이와 방자, 그리고 조상현의 구성진 목소리. 여기서 한국영화만이 가능한 하나의 세계가 마치 병풍처럼 펼쳐진다. 나는 이런 영화를 다른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영화감독

고양이를 부탁해 | 정재은, 2001
청춘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시절의 공기를 기억해낸다는 것과도 같다.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는 푸르른 날의 온기와 한기를 동시에 떠오르게 하는 영화다. “네가 도끼로 사람을 내리쳤대도 내가 네 친구란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무모한 고백을 나눈 우리는 각기 다른 길목에서 다급히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한국 여성영화와 청춘영화, 그리고 캐릭터 앙상블의 영화를 꼽을 때 첫 손가락에 오래 머물 영화다.
진명현 독립영화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봄날은 간다 | 허진호, 2001 

허진호 감독이 말하는 사랑은 계절을 닮았다. 들떠 맞이했다 이내 익숙해지고 넌지시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말들이 영화 속 공간과 시간의 가장자리에 성글게 오고 가도 기어이 서로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뻔한 신파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사랑의 감정과 격정의 순간을 흐르는 일상에 슬며시 얹으며 전에 없던 멜로의 탄생을 알렸다.
심규한 「씨네플레이」 에디터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짧은 대사 한 마디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수많은 담론을 제기하는 ‘사랑’이라는 단어, 혹은 감정에 대해 그 어떤 영화보다 담담하게, 그리고 뜨겁게 통찰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이 영화만큼 솔직한 판타지가 또다시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한예리 영화배우

스크린에서 사랑은 보기 드문 광경이 된 지 오래다. <봄날은 간다>는 만나고 빠져들고 헤어지는 단순한 플롯의 멜로지만 인생과 사랑에서 시간이 갖는 의미를 한 축으로 삼은 성숙한 드라마라는 점에서 세월을 이기고 남았다. ‘봄날은 간다’는 세월을 지나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가락이다. 젊음이 만개하던 순간의 주인공은 이제 그 노래의 의미를 안다. 벚꽃이 만개하면 여전히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그 화분은 어디에 뿌리를 내렸을까?
구정아 영화 프로듀서
  
와이키키 브라더스 | 임순례, 2001 
영화는 수안보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한발 떨어져 보여줌으로써 그들처럼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보게 한다. 그리고 꿈으로 끌어당기는 희망 없는 낭만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
권다솜 극장판 대표

복수는 나의 것 | 박찬욱, 2002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극장에서 나오는 순간까지 믿을 수 없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감독이 저걸 만들었다고? 심지어 잘 만들었어. 영화적 완성도는 <박쥐>를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흥행 감독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이렇게 끝의 끝까지 가버릴 수 있다는 건 다시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때는 한국의 흥행 감독들이 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건가 했지만, 알고 보니 그냥 박찬욱이 잘하는 거였더라고.
강명석 웹진 「IZE」 편집장

한국영화사에서 ‘복수’의 등장. 받은 대로 되갚는다는 이 거래의 정동은 어떤 이유에선지 한국 전통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계급적 원한도 복수의 형식을 취한 적이 드물다. 비극적 아이러니의 미장센과 함께 뉴 밀레니엄에 돌출된 이 영화는 복수의 냉소적 표정을 포착했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이런 화두를 던지면서.
백문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살인의 추억 | 봉준호, 2003 

정치·경제적으로 급변하는 1980년대 말 화성이라는 소도시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표피적으로는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적 서사로 그리고 있으나 한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고 1980년대 한국 사회에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
오정완 영화사 봄 대표

<살인의 추억>은 영화가 담고 있는 사회정치학적 의미를 과감히 제거해버려도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의 쾌감에 충실한, 뛰어난 만듦새를 지닌 영화다. 화면 운용부터 숏의 크기, 카메라의 시점과 움직임, 인물들의 등·퇴장 순서 하나까지 씨줄과 날줄처럼 지극히 치밀하게 얽혀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수직과 수평, 객관과 주관, 이성과 야만, 승리와 패배 등의 충돌하는 이미지를 영화 전반에 심어 정서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안락한 의자에서 영화를 구경하던 관객은 종국엔 무기력한 방관자의 자리로 당도하게 된다.
김현민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 제목과 달리 살인자가 아니라 살인자를 쫓는 시골 형사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영화 속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수사 상황은 어수선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데, 1980년대라는 시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원색이 배제된 잿빛 화면 속에서도 산과 논과 들판은 아름답고, 안타까움과 분노와 긴장감 속에 웃기기도 하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로 촘촘하게 어우러진 영화다.
송영애 서일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봉준호 감독은 그전까지 나온 그 어떤 연쇄살인 스릴러영화도 가지 못한 경지에 겨우 두 번째 장편영화로 도달했다. ‘범인이 잡히지 않는 스릴러’라는 실화 기반 영화의 핸디캡을 빼어난 영화적인 완성도로 극복해낸 <살인의 추억>은, 작품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불가사의함과 광기의 시대를 상업성과 예술성을 아우르는 놀라운 균형 감각으로 포착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시대의 클래식이 되었다.
임필성 영화감독

송환 | 김동원, 2003 

영화 <송환>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숱한 전향 공작을 이겨낸 비전향 장기수들이 남한 사회에서 보낸 일상과 북한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송환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우연히 자신이 살던 곳으로 모셔온, 흔히 ‘간첩’이라고 불리던 장기수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해 2000년 북한으로 송환되기까지, 그리고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12년 동안 감독이 장기수들의 삶과 인간에 대한 존경심으로 써 내려간 러브레터다. 남북 분단의 상징적인 존재인 이들의 삶 또한 내 이웃의 삶이라는 <상계동 올림픽> 감독의 연출론이 이 영화를 통해 깊게 확장된다. 송환 당일 아침 이들과 헤어지는 순간. 북으로 가는 버스를 향해 ‘다시 만나자’는 감독의 울먹이는 육성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심이 느껴진다. <송환>은 현재 남북 화해의 시대로 나아가는 역사적 순간에 꼭 다시 봐야 할 영화다.
김화범 (주)인디스토리 제작기획팀 이사

우리의 분단 상황,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를 이념의 논리로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 눈물 나도록 찐한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끊임없이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외치게 하는 영화. 실존의 부조리함을 넘어 마침내 가장 이념적인 지점으로 우리를 이끄는 실천적인 영화.
문정현 다큐멘터리 감독

올드보이 | 박찬욱, 2003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대한민국의 부조리, 폭력과 억압을 체험한 세대가 가진 분노의 혈기가 천재적인 상상력과 만난 극적인 컬래버레이션이다. 이 작품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느끼는 감정은 ‘복수’ 보다 ‘사랑’이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부조리하다. 그리고 우리를 움직이는 우주의 이치는 정확하며 무자비하다. 이 비극적인 시스템 속에서 죽지 않는 ‘사랑’은 그래서 견딜 수 없이 아름답고 슬프다. 이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이경미 영화감독
  
지구를 지켜라! | 장준환, 2003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유명한 철학자이자 혁명가가 말했다는데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인류의 역사를 다루는 영화임이 확실하다. 게다가 외계 문명까지 덤으로 얹어버렸으니 이 영화는 가히, 범우주적인 영화라 할 수밖에 없겠다. 처음 보던 그날에도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없었는데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맘에 쏙 드는 이 영화에도 유일한 단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 딱 하나 있는데 그 단점은 영화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 이 놀라운 영화를 물파스 광고인 양 잘못 포장해 시시껄렁한 영화로 보이게 만들어버린 포스터가 바로 그것.
박광수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프로그래머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는 도발적이고 독창적인 데뷔작이다. 캐릭터의 개성을 골고루 살리면서도 서스펜스를 힘 있게 끌어냈고, 블랙코미디를 적소에 배치해 한국 주류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흥미 유발에 그치지 않고 소외된 자와 비주류를 감싸 안으며 우리 사회를 사유하고 비판했다. 영화 마지막은 아직도 큰 울림과 충격을 전한다.
한창욱 영화평론가
 
한국영화에 ‘케이퍼무비’라는 장르를 많은 관객에게 알려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평단의 호평과 흥행성공을 동시에 이끌어낸 작품인 만큼 각 캐릭터의 개성을 살린 배우들의 연기와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는 탄탄한 스토리가 관객의 시선을 장악한다. 한국영화사상 오락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가장 신나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권율 영화배우

왕의 남자 | 이준익, 2005
그간 ‘하지 말라’는 상업영화의 금기를 모조리 합했다. 낡은 사극, 또렷한 정치 풍자에 무려 동성애 코드가 더해졌고, 스타 배우는 빠졌다. 그러나 <왕의 남자>는 더하기 빼기 따위론 산술 불가한, 에너지가 일렁인다. 그 결과 불과 313개 스크린으로 장장 3개월간, 무려 1천만 명의 관객을 홀렸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재관람’이란 흥행 기준도 <왕의 남자>가 시작이다. 걸작이 당대엔 독보적인 유일성을 갖고, 후대엔 따르고픈 이정표여야 한다면 <왕의 남자>는 이 요건을 넘치도록 채운다.
박혜은 영화 전문 에디터

여자, 정혜 | 이윤기, 2004
정혜의 무료하고 권태로운 일상이 영화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지루하고도 긴 장면들은 어릴 적 깊게 상처받은 정혜의 아주 느린 치유 과정과도 같다. 숏, 타이밍, 리듬 등 영화의 형식을 이야기 전달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정혜라는 인물을 위해 과감히 할애하는 선택을 보면서 참 멋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정 영화감독

사랑니 | 정지우, 2005 
주체적인 30대 독립 여성의, 사회적 억압에 아랑곳하지 않는 욕망을, 음흉하게 탐닉하거나 단죄할 생각 없이, 코미디로 눙치거나 혐오스러운 악당을 내세우지도 않은 채, 시간과 공간과 언어가 뒤섞인 미로 안에 넣고, 서사와 감정의 정체를 두고 관객과 게임을 벌인 끝에, 사실성이라는 짐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달콤한 통증 자체만을 증류해내는, 극히 순수한 로맨스.
홍지로 번역가

용서받지 못한 자 | 윤종빈, 2005
이 영화는 두 가지 면에서 기념비적이다. 하나는 배우 하정우. 그는 배우 본인과 캐릭터의 경계를 허물면서 ‘출현’했다. 다른 하나는 폭력적 남성성을 해부한 내러티브. 한국의 남성성은 결국 국가적 단계에서 조직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발견은, 21세기 한국의 변화가 진즉에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대적인 감각이기도 하다.
차우진 문화평론가

친절한 금자씨 | 박찬욱, 2005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는 여성을 중심에 놓은 복수극이 남성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팜파탈도, 남성적인 여전사도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는 오직 자신만의 속도와 의지로 움직이는 능동적이고도 개성 넘치는 여성 캐릭터를 한국영화사에 출현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예쁜’ 복수극은 본 적이 없다.
장영엽 「씨네21」 기자

라디오스타 | 이준익, 2006 
언제나 ‘좋은 한국 음악영화’ 한 편 나왔으면 했다.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기는 스토리, 탄탄한 연기, 탁월한 음악 등이 말 그대로 ‘일체’가 된 듯한 작품 하나가 간절했다. 글쎄. 음악영화라는 타이틀을 내건 영화가 꽤 있었지만, 나를 만족시킨 경우는 거의 없는 걸로 기억한다. 바로 이 작품, <라디오스타>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게다가 나는 ‘진짜 라디오 스타’와 함께 10년 넘게 방송을 하고 있는 입장 아닌가. 오랜 시간 일해본 결과, 라디오는 세 바퀴로 굴러가는 자전거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아날로그, 감수성, 그리고 음악. 이런 측면에서 나는 이준익 감독이 라디오라는 매체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부끄럽지만 용기 내어 외쳐본다. 라디오, 만세.
배순탁 MBC FM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형사 Duelist | 이명세, 2005
<형사 Duelist>는 이미지의 힘을 믿는 이명세 감독의 신념이 빚어낸 일대 사건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영화를 다루는 통념을 뒤집고, 무성영화에 가깝게 운동하는 이미지의 활력, 감정의 효과에 진력하며 영화의 본질을 사유하는 작품. 정(靜)과 동(動), 색과 빛과 어둠이 번갈아 교차하는 시각적 향연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이로운 순간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우리들은 정의파다 | 이혜란, 2006
여성 노동운동은 노동 탄압과 성차별이라는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왔다. 한국 민주화운동 및 노동운동에 중요한 궤적을 남긴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똥물 투척 사건’으로 축소되어 지워진 것은 이런 두 개의 전선을 잘 보여준다. 여성의 싸움은 남성 중심적 역사 기술에서 쉬이 지워지는 것이다.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역사 속 여성들을 ‘누이’와 ‘어머니’의 얼굴로만 박제하려는 가부장제 영화미학의 욕망을 내포하고, 투사들의 연대와 동지애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역사를 다시 썼다.
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저자

괴물 | 봉준호, 2006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다. 일상의 풍경을 찢고 출현한 괴물은 한국에서 4번째로 1천만 관객을 동원했고, 한국영화의 한 표지로 남았다. 할리우드 장르영화만큼 할 수 있다는, 그러나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서 <괴물>은 장르의 문법을 한국의 지정학적 컨텍스트 안에서 비튼다. 낯선 괴물은 정치적인 방식으로 당대 한국의 초상을 그려냈고, 그때 <괴물>을 본 우리는 ‘강두’처럼 지금도 괴물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이예지 「GQ KOREA」 피처 에디터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한국 괴수영화는 안돼’라는 생각을 뒤엎은 작품이다. 한강에서 난 돌연변이 괴물 모델링부터 CG까지 야심만만하게 실현시킨 것은 기본이고, 미장센이 뛰어난 액션과 스릴에 사회적 비판과 해학까지 담아 칸영화제에서 데뷔할 때부터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작가주의적인 감각이 상업적으로는 ‘천만 영화’로 성공하기도 한 경우다.
노혜진 「스크린 인터내셔널」 기자

경계 | 장률, 2007
이 영화가 우리에게 오지 않았더라면, 한국영화의 지리적 상상은 몽골의 사막과 초원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막에 나무를 심고, 염소를 키우는 몽골인 항가이, 북한을 떠나 몽골 초원을 거쳐 태국으로 향하는 최순희와 아들 창호가 보는 세계는 추방, 환대, 유목을 펼쳐낸다. 현실과 쾌락의 어떤 규칙, 죽음 충동 속에 ‘우리’는 어떤 새 경계를 마주한다.
김소영 한예종 영상이론과 교수, 영화감독

밀양 | 이창동, 2007
인생은 불가해하다. 해답을 찾고 구원받기 위해 신에게 의탁하려 하나 삶은 더 오리무중에 빠진다. 남편과의 사별, 아들의 비명횡사, 원치 않는 사랑의 접근 등으로 삶이 구렁텅이에 빠진 신애는 원수를 용서할 기회조차 뺏긴다. 신은 존재하는가, 삶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름다운 화면으로 제시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시리고도 따스한 영화다.
라제기 「한국일보」 기자

고갈 | 김곡, 2008
사회적 타자, 즉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는 영화는 많다. 하지만 소외의 문제를 단지 자원이나 권력의 결여 문제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결여된 존재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시스템의 논리 문제로 접근하는 영화는 흔치 않다. 바로 이 점이 ‘비타협영화집단 곡사’ 영화의 특별함인데, 특히 <고갈>은 시스템의 외부를 향한 ‘곡사’의 영화적 모험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변성찬 영화평론가

똥파리 | 양익준, 2008 
이 영화는 욕설과 폭력과 트라우마로 두 시간 내내 관객을 괴롭히면서도 한 켠에 화해와 이해로 가는 작은 탈출구를 마련해뒀다. 그 화해와 이해조차 조마조마해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매 장면 폭탄 같은 긴장감을 끌어안고 상훈을 지켜보다가 폭탄이 터지는 순간, 끝났다는 안도감과 연민이 묘하게 겹쳐 다가온다. 그렇게 펄떡이던 에너지를 정성스레 염(殮)하는 결말은 언제 봐도 으뜸.
황석희 영화 번역가

빗자루, 금붕어 되다 | 김동주, 2008
확신하건대 <빗자루, 금붕어 되다>는 21세기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낯설고 신비로운 형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데뷔작이다. 김동주는 굳건하게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 아래로 인물과 사물과 장소를 중첩하고 교란한다. 하나로 팽창하면서 동시에 여럿으로 복제되고,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눈앞에 존재하는 기묘한 영화적 우주는 그렇게 탄생한다. 나는 아직도 김동주의 두 번째 영화를 기다린다.
김병규 영화평론가

경계도시 2 | 홍형숙, 2009 
2003년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가 37년 만에 한국에 도착한다. 송두율 교수의 한국행 좌절을 담은 <경계도시>를 만든 홍형숙 감독은 후일담 정도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카메라를 든다. 하지만 영화는 공포영화가 되고 만다. 귀국 열흘 만에 양심적 학자에서 거물급 간첩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통해 감독을 포함해 그를 ‘믿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피어오른 질문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과 레드 컴플렉스를 공포스러울 만큼 선명하게 드러내는 수작이다.
주현숙 다큐멘터리 감독

두만강 | 장률, 2009
인물이나 서사 위주의 많은 한국영화 사이에서, 가끔은 무거운 메시지를 가진 영화들을 발견한다. <두만강>이라는 영화는 그런 영화다. 이념과 국가, 그리고 더 작은 단위의 사회적 요소들이 어떻게 우리 삶을 재단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스며드는지.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한 시대의 정신을 넘어서 우리의 생에 닿아 있다.
장병기 영화감독

마더 | 봉준호, 2009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인간의 근본 성향이 진실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 ‘엄마’가 버스 속 사람들과 어울려 춤추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죄책감, 슬픔, 고통 등 그 모든 비극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각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고통에서 비극으로 이르는 과정을 밀도 높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인상 깊게 감상한 작품이다.
이장호 영화감독

<마더>는 그동안 신성시되어온 모성의 이미지를 뒤틀어 새로운 모성을 보여주었다. 자식을 위해서 살인도 서슴지 않는 <마더>의 모성은 비록 일그러져 있지만 가장 한국적이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사르는 희생의 어머니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타인의 삶에 불을 지르는 광기의 어머니를 조명하는 <마더>는 한국의 모성에 대한 재해석이자 자기반성이다.
박준호 영화감독

박찬욱·봉준호·이창동 감독을 필두로 한, 세계적인 시네아스트의 배출은 2000년대 한국영화의 성과 중 하나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최고작이자, 세계가 이들의 작품을 통해 주목한 ‘한국영화의 스타일’이 예술적 극점에 오른 작품이다. 죽음을 둘러싼 강렬한 미스터리 구성, 그 안에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폭력성, 무자비하면서도 애틋한 한국식 정서의 묘미, 그것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영상과 편집 모두 더할 나위 없다.
장성란 영화 저널리스트

박쥐 | 박찬욱, 2009
<박쥐>에는 여러 장르가 뒤섞여 있다. 뱀파이어와 로맨스와 살인과 종교와 죄의식과 슈퍼히어로가 이야기의 표면 위로 녹지 않은 채 둥둥 떠다닌다. 표현의 방식 역시 다양하다. 시와 연극과 무성영화와 회화를 원하는 때에 자유롭게 사용한다. 영화가 잃어가고 있는 표현의 다채로움을, 다양한 것을 종합할 수 있는 영화의 넉넉한 품을, 과감하고도 아름답게 보여준 작품이다.
김중혁 소설가

파주 | 박찬옥, 2009
파주와 안개 그 사이에 온전한 사랑이 자리 잡을 틈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파주>에서 박찬옥 감독은 가장 내밀한 감정인 사랑 역시 시대와 과거의 흐름 위에 켜켜이 쌓여 놓인 결과라고 씁쓸하게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모와 중식은 과거의 가장 앞자리로 초대되어 안개 낀 파주를 부유한다. 불가능한 사랑. 나는 이토록 서늘한 감정의 멜로드라마를 지난 9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나지현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강사


 
2010’s

오월愛 | 김태일, 2010
영화를 하면 할수록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깊어진다. 질문과 함께 매번 빠지지 않고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오월愛>. 제목에서 알 수 있듯 1980년 5월 항쟁을 다룬, 2011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다. 거대 서사로 구축된 역사가 아닌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호명되지 못한 개인들의 미시사를 통해 5월 항쟁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감독을 위시한 제작진 ‘상구네’는 아무 좌표 없이 긴 시간 그?그녀들을 찾아내, 그네들이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응시하며, 끝내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래서 <오월愛>는 우리가 알고 있는 ‘5월 항쟁’과 결이 다르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동요되는 바가 크지만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동요가 더 큰 이유는 결국 영화는 태도이자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서사가 ‘태도’이면서 세계(관)이다. 내게 <오월愛>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하지만 반드시 오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미래를 현재로 한발 끌어들이는, 그런 영화다.
안보영 다큐멘터리 감독, 프로듀서

돼지의 왕 | 연상호, 2010 
사업 실패와 충동적 살인으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린 경민은 15년간 침묵으로 감춰왔던 친구의 투신자살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폭로하기 위해 잔혹했던 학창 시절로 되감기를 시작한다. <돼지의 왕>은 애니메이션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통념을 깨고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언어로 부조리한 현실과 폭력적인 계급사회를 우화적 수사로 비틀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지형도를 넓힌 작품이다.
추혜진 인디애니페스트 프로그래머

| 이창동, 2010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드러난, 뒤틀린 비인간성의 사회는 기이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 세계는 과장되었다 느낄 만큼 섬뜩하지만 슬프게도 우리 사회가 가진 얼굴과 닮아있다. 주인공 미자는 악취 나는 현실의 얼굴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오로지 꽃을 보고 맡고 느끼며 시의 아름다움을 보려 하지만, 시를 느끼고자 하는 그녀의 깊은 탐구는 그녀에게 시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스러운 세상을 안는 것으로 완성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꽉 채워져 있으면서도 비워진, 사유를 위한 영화의 모든 요소는 한 편의 시와 같은 깊은 체험을 하게 해준다.
김종관 영화감독

영화 <시>는 아름다운 ‘시’처럼 살고 싶었던 한 노인 앞에 놓인, 그의 바람과 정반대인 고통과 오욕과 절망의 삶을 흐르는 강물처럼 그려낸 영화다. 불행한 사람과 삶을 외면하지 못한 노인의 ‘연민’이 그의 마지막을 숭고한 경지로 끌어올린다. 시처럼 아름다운 영화이면서 삶의 본질을 꿰뚫은 감독의 시선이 섬뜩해서 실로 처연하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이창동 감독의 <시>는 어느 영화보다 아름답다. 몸은 진흙 같은 현실에 허우적대더라도 주인공의 시선은 아름다움에 머문다. 그리고 그 전까지 한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주인공의 도덕적 선택을 보여준다. 그전까지 한국영화에서는 늘 모성이 강조되어왔다. 자신의 이익과 모성 중에서 늘 모성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시>의 주인공은 결단의 순간에 모성보다는 여성과 정의를 선택함으로써 한국영화의 여주인공이 근대를 지나 현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박지연 애니메이션 감독

이층의 악당 | 손재곤, 2010 
<이층의 악당>은 한국 코미디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라 생각한다. 인물에 대한 집요한 애정에서 나온 심리묘사와 그런 인물에 따른 이야기의 전개는 과장과 비약 없이도 코미디영화를 걸작 반열에 올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또한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메시지에 대한 강박을 넘어,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병적인 심리를 보여줌으로써 위로라는 감정에 닿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태곤 영화감독

두 개의 문 | 김일란·홍지유, 2011 
그날의 화재만큼 뜨겁고, 남겨진 죽음만큼이나 참혹한 ‘용산 참사’의 진실. 피해자의 목소리보다는 현장의 카메라들이 기록한 이미지와 소리를 통해 그 진실을 재구성하고 탐문하는 영화는 국가의 가공할 폭력에 대한 ‘객관적’ 고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주체적’ 목격자와 판결자로 끌어들임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윤리와 책임을 질문하는 다큐멘터리로 나아간다.
주유신 영화평론가

북촌방향 | 홍상수, 2011 
‘영화란 시간의 예술이다’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이며 모호한 정의를 더없이 구체적이고 신비롭게 현현해낸 세계. 그 시간을 이루는 모든 활동이 과격하게 평등해짐으로써 섬뜩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홍상수의 영화적 비밀을 비로소 생생히 목도하고 말았다는 충만한 착각에 사로잡히다. 한국영화사의 유일무이한 순간이자 홍상수 세계의 기이한 원체험과도 같은 영화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거미의 땅 | 김동령·박경태, 2012
경기 북부 기지촌 공간 속에 살아가는 기지촌 여성 세 명의 삶을 담아낸 작품이다. 오랜 기간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사람과 공간 모두와 깊이 있는 관계 맺음을 기반으로 영화는 공간 속 사람, 사람 속 공간을 색다른 영상언어로 풀어낸다. 현장의 목소리를 통해 은폐된 한국사와 누락된 기지촌 여성사의 한 부분을 담은 영화는 액티비즘과 동시대 예술을 아우르는 지점에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해낸다.
이승민 영화평론가, 다큐멘터리 연구자

내 아내의 모든 것 | 민규동, 2012 
전무후무한 캐릭터의 향연, 임수정?류승룡?이선균 세 배우의 이미지 반전, 민규동 감독의 도발적이면서도 위트 가득한 시나리오와 연출이 어우러진 감각적인 코미디! 이토록 말 많은 세상에서 역설적이게도 죽도록 외로운 각자를 위한 힐링?화해 무비다. 희대의 카사노바를 연기한 배우 류승룡의 발군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민진수 수필름 대표

잠 못 드는 밤 | 장건재, 2012
<잠 못 드는 밤>은 디지털 영화 시대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문법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시도해 새로운 영화 체험을 안겨주었고 두 사람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세계로 확장되는 지점 또한 세련되고 절제된 표현으로 포착하고 구축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과감한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 신선한 질문을 전달한 것 같다.
김대환 영화감독

프리즈마 | 임철민, 2013
임철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프리즈마>는 정통적인 영화적 화법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자신의 감정과 사유의 시공간을 시?청각화함으로써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감각적?영화적 체험을 오롯이 선사한다. 디지털 영상 시대에 본격화되고 있는 영화의 사유화, 장르 파괴 및 혼종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박홍준 인디포럼작가회의 의장

아버지 없는 삶 | 김응수, 2012
영화 속 화자는 ‘아버지 없는 삶’을 꾸리지 못한 지난 역사를 뒤로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야마시다 마사코 씨와 함께 일본으로 떠난다. 흔히 ‘여성’ ‘일본인’ ‘결혼 이주민’ 등으로 불리던 응시의 대상이 쉬이 일컬을 수 없는 삶과 영화의 주체임을 보이는 카메라는, 그리하여 “살라”는 정언명령을 수행한다. <초현실> <오, 사랑> 등 최신작을, 극장이라는 ‘중심’이 아닌 IPTV와 스트리밍 서비스로 처음 공개한 감독의 다음 행보도 퍽 궁금하다.
신은실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도희야 | 정주리, 2013 
영남과 도희는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다. 폐쇄된 공동체의 묵인하에 착취당하는 두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는 이야기는 종종 있었다. 이 영화의 특별함은 피해자 도희가 마냥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탈출의 기회를 기민하게 포착하고, 구원자인 영남과의 관계를 주도하는 캐릭터라는 데 있다. 두 캐릭터의 입체성은 현실을 빙자한 흔한 비극적 결말이 아닌 피해 여성들의 자력 탈출이라는 잊지 못할 결말을 만들어낸다.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철의 꿈 | 박경근, 2013 
다큐멘터리 <철의 꿈>은 포스코와 현대중공업이라는 두 기업의 인프라를 영상으로 담아 한국 산업화의 근대적 미학(modernity)을 디지털카메라로 새긴 작업이다. 동시에 탈산업화 시대를 맞은 한국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작업이기도 하다. 작품의 화자는 수렵 채집 생활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유물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작가와, 현대중공업의 거대한 유조선 이미지를 기록하는 자신을 동일시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픽션 작업을 한 실험 다큐이며, 영화 작업과 비디오 아트의 모호한 경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이다. 한국 다큐멘터리의 미적 영역을 확장시킨 작업으로 평가 받는다.
김경미 영화 프로듀서

무뢰한 | 오승욱, 2014
<무뢰한> 속 인물들은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차갑고도 가냘픈 내면이 투영된 여자의 얼굴과, 거짓된 인생으로 점철된 남자의 모습이 진실 혹은 거짓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이어간다. 토막 난 관계 속에 자리한 인간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영화.
강민주 「영화천국」 독자

비밀은 없다 | 이경미, 2015 

예쁘고 싹싹하게 웃던 정치인의 아내는 딸이 실종된 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고 중얼거리면서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신경증의 성채를 쌓아 올린 채 나 홀로 추적에 나선다. 그리고 이 젊은 엄마의 거듭되는 사투와 실패야말로 완벽한 가정의 근간을 무너뜨릴 비밀을 찾아내는 스릴러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여성-탐정의 등장이자 놀라운 가정 스릴러(domestic thriller)의 출현.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

‘아이를 잃은 엄마’ 라는 소재는 진부할지 모르나, 이 영화의 주인공 연홍은 그동안 수많은 영화가 재현한 어머니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쉽게 무너지지도, 울지도 않는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분노하고 범인을 무너뜨린다. 그녀의 딸 민진도 마찬가지. 영화의 마지막, 민진은 “엄마는 멍청해서 내가 지켜줘야 한다 했어요”라는 말을 남긴다. 한국 사회 속 모녀 관계에 놓인 많은 여성이 공감했을 말.
최정아 「영화천국」 독자
  
사람이 산다 | 송윤혁, 2015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비극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하지만 영화는 비극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남겨진 이들의 고통을 설명이 아닌 생략으로 담담히 묘사한다. 이러한 영화적 태도는 고통조차 하나의 인격으로 감싸 안으려는 감독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특히 이 영화의 마지막은 내가 그동안 마주했던 한국영화 중 가장 비극적인 엔딩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존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는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매우 아름다운 자기 서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분이 꼭 챙겨 보면 좋겠다.
정윤석 영화감독

아가씨 | 박찬욱, 2016 
<아가씨>는 박찬욱이라는 대가의 절정이자 한국영화계를 통틀어 보기 드문 성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틈새가 없지만 꽉 막혀 있지 않고, 여운이 있으나 새는 구석이 없다. 과거의 폭력을 끌어당겨 현대의 편견을 밀어낸다. 서사의 밀도는 높지만 무겁지 않다. 관객을 현혹하는 대신 매혹하는 이미지의 향연도 대단하다. <아가씨>는 예전에도 귀했고, 앞으로도 귀한 영화일 것이다.
민용준 「에스콰이어 코리아」 피처 디렉터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 변성현, 2017
그간 평이하게 다뤄진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작품. 강렬한 색채감, 로맨스 코드의 융합을 통해 누아르 장르를 신선하게 변형시켰다. 한재호?조현수 역을 맡은 두 배우는 이 영화를 통해 제 몸에 꼭 맞는 새로운 슈트 한 벌을 얻어가지 않았을까.  
이승연 「영화천국」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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