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남의 <소나기> 멜로의 관능을 입은 첫사랑

by.듀나(영화평론가) 2018-03-09조회 3,618
소나기

지나간 시대의 한국영화 중 시네필의 호기심이나 영화전공자의 의무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매력만으로 다음 세대의 팬을 얻은 작품이 많지 많은데, 고영남의 <소나기>는 그 드문 예외에 속한다.

여기에 영화 외적인 운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1960년대 이후 교과서에 꾸준히 실려온 황순원의 고전 단편이 원작이고 텔레비전 방영도 자주 된 편이라 새로운 관객의 유입이 이어진 건 자연스러웠다. 지금 보면 연기 스타일이나 대사가 많이 구식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옛날 아이들이 옛날 어른들보다 접근하기 쉽기도 하다.

<소나기>가 지금까지 적지만 꾸준한 팬을 얻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영화 자체의 매력 때문이다. 이후에도 주로 텔레비전을 통해 수많은 <소나기> 각색물이 나왔지만 (최근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애니메이션 버전을 만들었다) 자신만의 개성과 생명력만으로 의 안전한 갑갑함을 극복한 작품은 없었다. 새로 유입된 관객들은 황순원의 원작과는 별도로 고영남 버전 <소나기>의 개성을 구별해낸다. 그것이 정확하게 고영남의 개성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겠지만.

고영남 버전의 <소나기>가 다른 버전보다 유리한 점이 있다면, 시대 배경을 현대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된 건 1979년. 아직까지 <소나기>의 이야기를 시대물로 다루지 않아도 되던 때다. 덕택에 각본가 윤삼육은 황순원이 그린 것처럼 고도로 정제된 문학적 캐릭터로서 아이들을 그릴 필요가 없다. 적당히 충무로화된 버전이고 성인 성우가 대사를 더빙하긴 하지만, 이 영화의 아이들은 현실 세계 아이들의 불쾌함과 짜증스러움을 그대로 노출한다. 여기에는 시골 남자아이들의 노골적인 성차별적 태도도 포함되는데, 과연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이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1시간 40분을 조금 넘는 영화가 비교적 꽉 짜인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영화 속 세계가 굳이 원작에 충실하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굴러갈 수 있을 만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의 ‘개성’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작은 따옴표로 이 단어를 격리한 데엔 이유가 있다. 현대의 관객들이 보는 <소나기>의 개성은 고영남의 것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말 충무로 멜로영화의 보편 정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단지 당시에는 일반적이었고 평범했던 접근법이 교과서와 함께 영원한 보편성을 유지하고 있던 원작과 결합되자 그 결과물은 아주 기묘해진다. 그리고 그 기묘함은 영화가 나온 1970년대 관객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 와서 보면 영화는 기묘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어쩌자고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 연이는 남자주인공에게 섹스의 기억과 자기 연민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1970년대 호스티스 주인공과 이렇게 비슷한 것인가. 심지어 연이의 목소리를 더빙한 성우는 비슷비슷한 역에 이골이 나 있었을 게 뻔하다. <소나기>는 1970?80년대에 주로 남성 관객을 타깃으로 만들어진 선정 영화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이상하지 않은 것이, 이들 중 상당수는 <소나기>와 뿌리가 같다. <뽕> 시리즈가 아무리 선정성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원작이 나도향의 단편이란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영남의 영화는 황순원의 원작보다 훨씬 성적인 이야기다. 원작이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정교하게 지워버렸다면, 영화는 주인공인 남자아이가 첫사랑 여자아이를 만나 성적인 욕망에 눈뜨는 과정을 그리고, 여기에 대해 조금도 감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고영남의 <소나기>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사이의 간격은 그렇게 넓지 않다.

이 솔직함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린 주인공 남자아이 석의 시선과 성인 남성 감독의 시선을 어떻게 분리해낼 것인가. 남자아이의 눈을 빌려 여자아이의 드러난 속옷을 훔쳐보는 카메라의 시선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이 시선의 공격 속에서 철저하게 천진난만함을 유지하고 있는 연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아 있다. 당시 관객들은 이 관능적인 이미지들을 어떻게 소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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