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누빈 중후한 은막의 신사 ‘흐린 말년’ 지낸 영화배우 김진규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8-03-02조회 1,311

김진규 선생이 출연한 영화를 볼 때마다 상반된 두 풍경이 떠오른다. 동녘에 막 떠오른 눈부신 일출과 아련히 스러져가는 석양의 모습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가 영화배우로서 정상을 달리던 1960년대와 은퇴 후 제2의 삶을 모색하던 어려운 시기와 겹쳐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 양극단의 시기에 선생과 만났다. 처음에는 기자로서 취재를 위해, 그 뒤에는 고향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자리였다.

첫 대면은 1966년 여름, 서울 충정로 3가에 있는 그의 자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월간지의 인터뷰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이미 그가 출연한 데뷔작 <피아골>(이강천, 1955)은 물론 <동심초>(신상옥, 1959), <하녀>(김기영, 1960),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오발탄>(유현목, 1961), <잉여인간>(유현목, 1964), <벙어리 삼룡>(신상옥, 1964), <순교자>(유현목, 1965) 등의 역할과 연기에 끌려 스스로 김진규 팬임을 자처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담배를 태우지 않지만 그때 나는 갓 서른의 나이로 14살이나 위인 대배우 앞에서 뻐끔 담배를 꼬나물고(사진 참조) 여러 질문을 했다.

지금도 그의 얘기 가운데 잊히지 않는 것은 영화가 보고 싶은 나머지 낯선 어른 관객을 이용한 관람담이다. 그는 극장 주변에 있다가 입장하는 어른이 나타나면 절을 꾸뻑한 뒤 마치 그를 따라나선 아들처럼 얼른 그의 손을 잡는 시늉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본 영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1926)이었다고 한다. 열서너 살 때였다고 하니 1935년 전후였을 것이다. 지금은 잊었지만 그는 <아리랑>에 대해 구체적인 장면을 예로 들어가며 들려주었다. 아직도 한 가지 뚜렷이 기억되는 것은 누이동생 영희(신일선)가 부엌에서 마름인 오기호(주인규)에게 겁탈 당하려는 위기의 순간에도 실성한 오빠 영진(나운규)은 지붕 위의 용마루에 앉아 서산의 해를 바라보며 엉뚱한 말을 하는 대목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김 선생이 기력이 좋았을 때 좀 더 자세히 들어둘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뒷날 그의 반려자였던 배우 김보애 회상록 「내 운명의 별 김진규」(2009, 21세기북스)에 실린 김 선생의 12장 분량의 짧은 육필에는 영진의 대사가 이렇게 적혀 있다. “영희야, 해 넘어간다. 밥 지어라.”

그뿐만이 아니다. 이 책에는 그 뒤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영진은 용마루를 타고 앉아 말 타는 흉내를 낸다. 영희는 오기호에게 옷이 갈기갈기 찢기고 금세 하체가 드러나 일을 당하기 직전이다. 영희가 있는 힘을 다하여 오빠를 부르짖는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바람소리에 실려 영희의 다급한 목소리가 영진의 귀에 들린다. 지붕 꼭대기에서 내린 영진은 곧바로 부엌문을 열어젖힌다. 영희가 처참히 일을 당한 꼴을 본 것이다. 영진은 곧바로 부엌 담벼락에 꽂혀 있는 낫을 빼들었다. 오기호에게 달려들며 멱살을 잡고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찍어버린다. 오기호는 그 자리에 거꾸러지고 영희는 오빠 곁으로 달려든다. 영진은 오기호의 어깨에서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 번뜩 정신이 든다. “피, 피! 아니, 이 피가……”하며 정신이 드는 영진의 주위로 그의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이 몰려온다. 소식을 듣고 마을 주재소에서 달려온 일본 순사들이 영진을 포박한다. 한 많은 조선 사람의 설움을 뒤로 하고 꽁꽁 묶인 영진은 순사와 함께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이 글은 김 선생이 운명하기 직전인 1998년 2월 21일 전후에 쓴 것이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한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작품성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언급했으나 세부 묘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문일이 펴낸 영화소설 「아리랑」(1929, 박문서관 발행)이 유일할 정도다. 그래서 필름의 부재로 인한 공백이 매우 크다. 이런 상황에 그가 밝힌 <아리랑>의 일부 묘사는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인용이 길어진 이유이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주도에서였다. 1990년 가을이었다. 제주시청 민원창구 앞에서였다. 토지 관련 등본을 발급받으러 갔는데 그분도 건축인가와 관련된 서류를 접수하러 들렀던 것 같다. 오랜만에 뵈어 몹시 반가웠지만 서로 일이 급해 아쉽게 헤어져야 했다. 그는 그동안 ‘얼굴에 분칠해 번 돈’을 쏟아부어 만든 <성웅 이순신>(이규웅, 1970)이 흥행에 실패하고, 김진 등 두 아들을 출연시킨 <난중일기>(장일호, 1977)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부채까지 떠안는 고초를 겪게 된다. 그는 견디다 못해 1986년 정초 경기도 과천 생활을 청산하고 아무 연고가 없는 제주시 해안동으로 이주한다. 그 후 무수천 기슭에 11평짜리 슬레이트 집을 짓고 주변을 개간하며 재기를 다짐한다.

그동안 <미망인>(박남옥, 1955),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 <갯마을>(김수용, 1965) 등에서 전쟁미망인 또는 과부 역을 맡아 인기를 모은 첫 아내 이민자와, 1956년 권영순 감독의 <옥단춘>에서 공연한 것을 계기로 결혼한 둘째 아내 김보애와 각기 14년 만에 헤어지고 42세의 관광안내원에 이어 네 번째 인연을 맺은 오씨 성의 여성과 제주에 자리 잡은 뒤 그는 온갖 고생 끝에 제주시 해안동에 4층, 60개의 객실을 갖춘 유럽식 가족호텔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1993년 봄이었다.(동아일보, 1993년 3월 7일자) 그사이 ’88 서울올림픽의 제주 지역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서는가 하면, 제주지역 선발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장과 1992년 창립된 한국영화인협회 제주도지부(지부장 편거영)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거듭되는 호텔 사업의 부진과 사채의 압박으로 그는 결국 파산하고 만다. 각막수술로 인한 눈의 부담과 경제난 등 겹치는 스트레스를 술과 낚시로 달래던 그는 1남 3녀를 둔 김보애와 재결합했으나 악화되는 골수암으로 1998년 6월 19일 75년의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의 말년은 1950~60년대를 누빈 빛의 영광과는 달리 그가 연기한 <오발탄>의 주인공 철호처럼 어둡고 고달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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