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봉 열풍]‘재(re-)’의 여성화 혹은 다시 만난 여성의 세계 재개봉 현상의 이면 읽기 ① - 재개봉 시장의 중심, 여성 관객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17-02-24조회 3,048
재개봉 현상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무엇보다 영화의 장르적 분포와 관객의 성별이다. 재개봉 영화는 흔히 ‘감성 멜로’라고 하는 장르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2013년부터 재개봉된 영화의 장르 분포를 보면 휴먼 드라마나 멜로드라마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 영화가 절반을 넘는다. 2016년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드라마가 53%, 멜로·로맨스가 24%, 액션이 21%, 나머지가 애니메이션(14%)과 코미디(14%)다. 흥행 순위를 보면 관객의 선호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재개봉 영화 역대 흥행 순위 10위 내의 다수가 로맨스 장르다. 2015년 재개봉해서 33만 명의 관객을 모은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미셸 공드리, 2004), 2016년 11월 재개봉해 28만 명의 관객을 모았으며 여전히 상영중이어서 누적 관객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노트북 The Notebook>(닉 카사베츠, 2004), 2016년 재개봉작 흥행 2위에 오른 <500일의 썸머(5 00) Days of Summer>(14만 8,000), 그 외에도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7만),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5만), <냉정과 열정 사이 冷靜と情熱のあいだ>(4만 3,000), <러브 레터 Love Letter>(2만 3,000, 이 영화는 2013년에 이어 2016년 세 번째 개봉을 성사시켰다) 등 커다란 성공을 거둔 영화가 모두 로맨스 장르였다.

여성의 이야기를 찾아서
로맨스 장르의 전통적 관객은 여성이고, 이는 곧 재개봉 열풍을 이끄는 것이 여성 관객임을 의미한다. 이유가 뭘까? 이들 로맨스 영화는 지리적 거리, 계급적 갈등, 시간의 흐름이나 기억 삭제에도 불구하고 재회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다. 심지어 죽음도 이들을 갈라놓지 못한다. 이런 로맨스 영화는 연애 감정이 있거나 친밀한 관계에서도 경쟁적이고 계산적이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광풍, 그리고 여성을 교감해야 할 동등한 파트너라기보다는 성적 이미지로 소비하고 비하·혐오하는 젊은 남성들의 폭력적 태도 속에서 하나의 판타지 공간을 마련해준다. 가을이나 겨울에 맞춰 재개봉한 따뜻하고 달달한 로맨스 영화들이 각박한 세상과 여남 관계 속에서 한숨 돌리고 싶은 여성 관객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개봉 영화의 흥행 코드를 쓸쓸한 연말에 치고 올라오는 연애 감정에 대한 욕망이나 낭만적 판타지로 한정한다면, 이 현상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는 것이 된다.
현재 상영작의 면면을 보자. 스크린은 CGI나 3D, 4D 등의 스펙터클한 전시에 집중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슈퍼 히어로 시리즈, 그리고 여성이 남성의 동성 사회를 끈끈하게 만드는 교환물로 소비되는 소위‘브로맨스’ 한국영화들로 도배되어 있다.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여성 관객은 비교적 시장이 작아서 안정적이며 검증이 끝난 재개봉 영화에서 자기 서사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찾게 된 것이다. 이 영화들은 적어도 여성이 주연이고, 여성의 감정을 세밀히 살피고, 때로는 자기 인생의 주체로서 결단력을 보여주는 여성을 내세운다.
흥행 성적이 압도적이진 않지만 재개봉으로 화제가 된 영화의 목록을 두루 살펴보면 이런 분석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Fried Green Tomatoes>, <렛 미 인 Lat Den Ratte Komma In>, <바그다드 카페 Bagdad Cafe>, <베티블루 37.2 37°2 le matin>, <피아노 The Piano>, <시카고 Chicago>….
이 영화들에서 여성은 다양한 시대를 배경으로 서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나아가 여성 간의 우정과 연대, 사랑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고, 여전사부터 뱀파이어, 스파이까지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리고 대부분 투자 자본의 양극화로 점차 축소되고 있는 중소 규모의 상업영화라는 특징도 공유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전통적인 ‘시네필’ 관객이 타깃인 영화들과도 구분된다. 유럽 남성 작가 영화 속의 여성 캐릭터 역시 폭력적이고 가학적일 정도의 비극에 빠지며 남성들의 예술적 성찰의 도구나 각성의 동기 정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왕왕 있어왔다. 결국 재개봉 영화, 그것도 멜로 드라마에 여성 관객이 몰리는 이유는 여성의 서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다양성을 잃어가는 예술·독립영화와 대규모 상업영화 모두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스크린에서 찾는 차선책
따라서 재개봉 영화에서 멜로드라마 비중이 높은 것에 대해 다양성이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는 일부의 염려 어린 분석은 영화 전반의 남성 지배적 문화를 간과한 해석이다. 주류 개봉 루트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여성들은 이 두 번째 스크린에서 차선책이나마 자신들의 세계를 만나려 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무조건 낭만적 도피나 과거로의 퇴행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여성 관객은 여성의 이야기가 앞으로 더 만들어져야 하고 그 여성의 세계를 만날 관객이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재(re-)’의 여성화는 재개봉 현상에만 있지 않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과거 흥행한 남성 버전의 시리즈를 여성 버전으로 리메이크 혹은 리부트하는 현상이 일고 있다. <고스트버스터즈 Ghostbusters>(2016)나 여성판 ‘오션스 일레븐’ <오션스 8 Ocean’s Eight>(2017)이 그것이다. 이 ‘재(re-)’의 여성화 현상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그러한 영화를 관람해 여성의 서사에 대한 요구가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여성 스스로 얻어낸 것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고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들의 이야기에 이미 검증을 거친 것에만 소심하고 안정적으로 투자하려는 자본의 남성 중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씁쓸함이 남는다. 왜 여성은 늘 두 번째 자리에서만 자신들의 세계를 만날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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