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영화]코미디,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우다 HISTORY 3: 1990~2000년대 초 한국 코미디 영화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7-02-15조회 1,176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코미디 장르는 환골탈태한다. 요인은 두 가지였다. 먼저 산업적으로 필요했다. 1990년대 초 충무로는 대격변을 맞이한다. 대기업 자본이 들어온 것이다. 토착 자본은 이미 검증된 흥행 아이템을 반복하고 싶어 했지만 기업은 달랐다. 그들은 마케팅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어느 정도 흥행이 예측 가능한 영화를 원했다.
이때 이른바 ‘기획 영화’의 시대를 연 사람이 영화사 신씨네의 신철 대표다. 그가 기획한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1992)는 한국에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소개했다.
두 번째 요인은 새로운 유머 감각을 지닌 감독의 등장이다. 바로 강우석이다. 그가 연출한 <투캅스>(1993)는 기존 코미디와는 분명한 단절이었다. 이 영화는 한국 코미디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신파적 감상주의를 싹 걷어냈다.
강우석 감독은 배우의 개인기가 아닌, ‘현실적 상황’에 기댄 코미디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적당히 부패한 고참 형사와 지나치게 강직한 신참 형사라는 구도만으로도 수많은 재미를 만들었다. 대사의 ‘쿨’한 매력과 취조실 장면의 개그 스타일 등은 분명 한국영화에 없던 것이고, 이후 수많은 영화에 교과서가 되었다. 단언컨대, 한국 코미디 영화는 <투캅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코미디 영화, 봉인 해제!
두 영화 이후 1990년대 충무로는 ‘코미디 천국’이 된다. 특히 로맨틱 코미디의 위세는 대단했다. 사실 <결혼 이야기>는 수십 쌍의 부부를 인터뷰해서 시나리오를 썼고, 지금 보면 지나치게 리얼하고 심각하다. (게다가 당시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한 문성근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하지만 이 장르는 이후 급속하게 말랑말랑해졌다. <그 여자, 그 남자>(김의석, 1993), <101번째 프로포즈>(오석근, 1993), <닥터 봉>(이광훈, 1995), <박봉곤 가출사건>(김태균, 1996) 등이 이어졌다.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던 로맨틱 코미디는 매우 편안하게 충무로에 정착한다.
한편 <투캅스>로 봉인이 해제된 코미디 장르는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1994)를 비롯해 <개같은 날의 오후>(이민용, 1995), <돈을 갖고 튀어라>(김상진, 1995), <남자는 괴로워>(이명세, 1994), <진짜 사나이>(박헌수, 1996), 급기야 <미지왕>(김용태, 1996)까지 폭주했다. 1990년대 중·후반은 한국 코미디 역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준 시기일 것이다.
1998년에 등장한 두 신인 감독은 이에 결정타를 날렸다. <기막힌 사내들>의 장진 감독은 낯선 방식으로 웃기려 했고,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감독은 무서운 방식으로 웃기려 했다. 그들의 영화는 1990년대 코미디의 장르 분화가 맞이한 최후 결정체였다. 2000년 이후 장진은 <킬러들의 수다>(2001)를, 김지운은 <반칙왕>(2000)을 내놓는다.
세기가 바뀌었어도 로맨틱 코미디는 여전했고, 그 정점은 <싱글즈>(권칠인, 2003)였다. 이 영화는 <결혼 이야기>의 문제의식을 업그레이드하는 동시에 캐릭터와 장르의 재미도 놓치지 않은 수작이었다. 이후 <작업의 정석>(오기환, 2005)에 이어 <미녀는 괴로워>(김용화, 2006)가 나오던 2000년대 중반까지가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였다.
로맨틱 코미디는 청춘 영화와 결합하기도 했는데, 그 토대는 PC 통신과 인터넷 소설이었다. 역시 신씨네가 제작한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2001)가 신드롬을 일으키며 포문을 열었고 <내 사랑 싸가지>(신동엽, 2004) 등이 이어졌다. 이후 청춘 코미디의 계보는 <써니>(강형철, 2011), <피끓는 청춘>(이연우, 2013), <스물>(이병헌, 2015) 등으로 이어지며 서브장르를 형성한다.

코미디 춘추전국 시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코미디의 톤은 다소 바뀌었다. 1990년대 코미디의 주된 톤이 여성적인 로맨틱 코미디였다면, 2000년 이후에는 강한 남성적인 톤을 띠게 된다. 여기에는 강우석 감독이 연출하거나 제작한 이른바 ‘시네마 서비스’ 계열 코미디들이 큰 역할을 했다. 김상진 감독의 <신라의 달밤>(2001)과 <광복절 특사>(2002), 장항준 감독의 <라이터를 켜라>(2002) 등은 차승원이라는 배우를 내세워 좀 더 직설적이면서 자극적인 웃음과 콘셉트로 관객에게 호소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이른바 ‘조폭 코미디’는 2000년대를 휩쓴 가장 강력한 코미디 트렌드였다. 포문은 <조폭마누라>(조진규, 2001)가 열었는데, 이 영화가 추석 시즌 박스오피스를 휩쓸자 영화계와 언론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달마야 놀자>(박철관, 2001)에 이어 <두사부일체>(윤제균, 2001)가 빅 히트를 기록하고 다음 해 <가문의 영광>(정흥순, 2002)까지 대박이 나자 ‘조폭 영화 망국론’의 분위기까지 조성됐다. 하지만 대중은 이런 영화들을 원했고, 조폭 코미디는 신속하게 프랜차이즈가 되었다. <조폭 마누라>와 <두사부일체>는 3편까지, <가문의 영광>은 5편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부정적인 사례만 있는 건 아니다. <내 깡패 같은 애인>(김광식, 2010)은 조폭과 로맨틱 코미디를 결합한 담백한 소품이었다.
2000년 이후 코미디 지형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섹스 코미디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에로티시즘 영화의 계보가 ‘멜로+에로’였다면, 윤제균 감독의 <색즉시공>(2002)은 로맨틱 코미디의 섹슈얼리티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비슷한 시기 <몽정기>(정초신, 2002)가 등장하며 붐이 조성되는 듯도 했지만 명맥이 제대로 이어지진 못했다.
사극 장르도 큰 변화를 겪었다.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2003)은 사극의 엄숙주의를 타파하고 언어적 규범마저 뒤흔들었다. 이후 <조선 명탐정> 시리즈가 나왔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김주호, 2012)와 <봉이 김선달>(박대민, 2016)처럼 코미디와 스펙터클을 가미한 팩션 사극의 흐름이 형성됐다.
약간 독특한 서브 장르라면 <귀신이 산다>(김상진, 2004)에서 시작해 <헬로우 고스트>(김영탁, 2010)와 <수상한 그녀>(황동혁, 2013) 등으로 이어지는 판타지 코미디가 있다. <흡혈형사 나도열>(이시명, 2006)이나 <탐정: 더 비기닝>(김정훈, 2015) 같은 범죄 코미디도 몇 편 등장했고, <오! 브라더스>(김용화, 2003), <선생 김봉두>(장규성, 2003), <1번가의 기적>(윤제균, 2006) 등 가족 중심의 휴머니즘 코미디도 사랑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약간은 삐딱한 ‘비주류’ 코미디 계열이 2000년 이후 형성되었음을 기록해야 할 것 같다. 이무영 감독의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2002)부터 시작해 <마파도>(추창민, 2005), <구타유발자들>(원신연, 2006), <은하해방전선>(윤성호, 2007), 그리고 최근엔 하정우의 첫 번째 연출작 <롤러코스터>(2013)까지 이어지는 이 불균질한 계보는 코미디 장르만 지닐 수 있는 기이한 리비도의 세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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