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피스,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가 영화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설립에 사인을 하다. 1919년 4월 17일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21-06-10조회 9,027

어쩌면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할지 모르겠다. 할리우드 영화사에 거대한 영화사들이 그렇게 차례로 설립되었을 때는 눈길도 주지 않다가 왜 갑자기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에는 관심을 기울이는 건가요, 혹시 유명한 스타들과 감독이 여기에 참여했기 때문인가요. 위대한 이름들, D. W. 그리피스. 찰리 채플린, ‘미국인들의 스위트 하트’ 메리 픽포드. ‘남자 중의 남자’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만일 그렇게 질문했다면 당신께서는 오해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오해가 영화사의 순간들 중의 이 순간의 핵심이기도 하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이르기까지 짧은 우회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화가 대중들과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벌어진 일은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게 전개되었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손을 떠나자마자 자본으로 전화하였다. 단순하게 돈을 내고 영화를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는 시장에서 유통과정을 통해 가치를 구현하는 상품에서 출발하였다. 이 상품이 자본을 가진 자들에게 유리했던 것은 여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자유로운 예술가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고할 필요도 없는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엄청난 주급(週給)을 받는 몇 명의 스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용직 비정규 노동자들이었다. 영화에서 이윤은 대부분 초과 잉여가치를 바탕으로 발생시켰으며 심지어 이 착취과정은 오늘날까지 일반화되었다. 1917년, 미국 영화산업이 전국적인 규모가 되었을 때 26개의 독립적인 체인을 운영하고 있던 극장주들이 모여 합병 형태의 퍼스트 내쇼널 배급체인(First National Exhibitors Circuit)을 만들었다. 그들은 개봉작과 재개봉작으로 이원화된 극장 배급 시스템에서 개봉일정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려고 했다.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졌으며 채플린의 야심작이었던 <개 같은 삶>과 <어깨 총!>의 흥행을 좌지우지하자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를 준비하면서 이들을 <키드>의 촬영현장에 초대하여 이 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설득시켜 상영 일수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퍼스트 내쇼널은 미국 영화사에서 메리 픽포드와 채플린 영화를 내세워서 첫 번째 백만 불 흥행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아직 용어가 등장하진 않았지만 최초의 블록버스터를 독점적 배급체인의 기반 위에서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규모를 확장시켰고 1919년 전국 5,000개 극장을 체인화 시켰다. 물론 이 과정을 이미 할리우드를 장악한 제작사들은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파라마운드 영화사의 아돌프 주커는 공격적인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본의 회전속도는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문 앞에 앉아있는 찰리 채플린과 강아지

무시무시한 합병과정과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대응 과정에서 복잡한 일이 벌어졌다. 이 과정은 그것만으로 영화라는 자본은 어떻게 자기 축적의 과정을 형성하였나, 라는 셀 수 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희생자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계약서 바깥에 놓여있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들과 출연하는 배우들은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당시의 계약 관례에 따라 영화사와 5년 단위의 주급 계약을 맺었고 그들의 이름이 아니라면 아무 가치도 없을 계약서를 그들의 동의 없이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영화사를 만들어서 영화를 제작하자는 이야기를 처음 나눈 사람은 찰리 채플린과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그리고 메리 픽포드였다. 여기에 데이빗 W 그리피스와 서부극 영화의 스타 윌리엄 S 하트가 가세하였다. 이들이 모여 영화사를 세운다는 것은 할리우드 전체가 긴장할만한 사건이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돈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스튜디오에서 안전하게 주급을 받으면서 영화를 연출하고 출연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영화 프로젝트를 그들 자신의 뜻에 따라 거절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이제까지 할리우드는 감독과 배우에게 그런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계약은 숫자로 이루어졌고 작품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와 배급업자의 판단에 따라야만 했다. 그들이 영화사 이름을 ‘(하나로) 맺어진, 뭉친, 결합한, (다소 과장해서) 단결한 예술가들(United Artists)’라고 지은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서명 직전에 윌리엄 S 하트는 파라마운트가 편당 20만 불로 인상하면서 여기서 빠졌다. 그때 윌리엄 S 하트는 일 년에 평균 여섯 편의 영화를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 픽포드와 찰리 채플린은 퍼스트 내쇼널 배급체인과 아직 계약이 남아있었다. 그리피스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자기 지분을 높이기 위해서 퍼스트 내쇼널과 별도로 세 편의 계약을 했다. 단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만이 아무 계약조건의 단서 없이 자유롭게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함께 사인할 수 있었다.
 
기차

물론 그런 다음 아름다운 이야기만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영화사의 순간들, 의 다음 순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돈의 문제이다. 하지만 돈의 이해관계로만 움직이던 할리우드에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이 정신을 이어받은 것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조에트로프 영화사를 차릴 때였다. 스필버그도 자신의 영화사를 가지기를 원했다. 그렇게 뉴 시네마 이후 감독들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기 위해서 하나 둘씩 영화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자본의 순환 안에서도 누군가는 영화가 예술가의 선택의 문제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 가지 후일담은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마이클 치미노의 어마어마한 야심에 찬 서부극 <천국의 문>의 박스 오피스에서의 재난으로 1981년 MGM에 매각되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거기서 시작했고 거기서 끝났다. 60년에 걸친 역사. 하지만 이 영화의 예술적 야심을 그리피스,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는 탓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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