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워크 그리피스의 <불관용>이 개봉하여 대중의 ‘인톨러런스’ 앞에 재난의 박스오피스를 맞이하다 1916년 9월 5일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20-04-21조회 11,415

영화사에 관한 책을 보면 누구라도 마주치게 되는 영화. 보고 있으면 단지 압도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그 무게에 눌려서 질린 상태가 되어 보게 되는 영화. 말 그대로 모든 점에서 훌륭하고 심지어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건 예언적인 영화. 그런데 한 번 보고 나면 두 번 볼 엄두가 안 나는 영화. 데이빗 워크 그리피스의 <불관용>은 처음 볼 때 있는 힘을 다해서 보아야 하는 영화이다. 왜냐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책에서 이 영화를 <인톨러런스>라고 그냥 ‘音讀’한다. 여기서는 번역어로 옮길 생각이다) 단지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게다가 내내 스펙터클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세트는 장엄하고 모든 장면들은 공들여 찍었다. 3,000명의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었고, 바빌론 궁전 세트는 높이 90미터에 이르는 건축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불관용>은 (다른 그리피스의 영화가 그런 것처럼) 멜로드라마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두 번 보기가 힘든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관용>은 영화사에서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구태여 말하자면) 마치 미켈란젤로가 1508년에서 12년 사이에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천장화>와 같은 위치에 있다. 위대하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 천장을 3시간 30분 동안 반복해서 볼 자신이 없다. (<불관용>은 여러 판본이 있다. 좀 더 자주 시네마테크에서 볼 수 있는 버전은 상영시간 3시간 17분 판본이다) 
 

그리피스는 1915년 <국가의 탄생>을 완성했다. 영화에서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에 겨룰만한 성취를 얻어냈다고 에이젠쉬테인은 찬사를 보냈다. 미국에서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언론과 지식인들은 <국가의 탄생>이 흑인에 대한 인종편견에 찬 영화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리피스는 이중적인 태도로 <불관용> 제작 연출에 착수하였다. 하나는 물론 알라바이이다. 자신이 인종편견주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류애라는 휴머니즘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걸 영화로 증명하길 원했다. 속죄로서의 영화. 다른 하나는 그때 예술적으로 거의 정점에 올라온 그리피스는 자신의 영화적 가능성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불관용>은 거의 전례 없는 규모로 진행된 실험적인 영화이다. 모든 의미에서 <불관용>은 동시대 영화들과 차원을 달리한 영화였다. 아마도 <불관용>에 연출부였던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과 토드 브라우닝은 그때 많은 것을 훔쳤을 것이다. 

그리피스는 서사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웠다. 서기 전 539년. 바빌론은 모든 것이 평화롭고 풍족한 왕국이었다. 벨샤자르 왕자는 펴민인 산골소녀를 돌보고 그녀는 왕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파국은 바깥에서 온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바빌론을 쳐들어온다. 서기 27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며 전도에 나섰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의 음모에 빠져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서기 1572년 8월 24일. 프랑스. 신교도 위그노들과 갈등을 빚어오던 가톨릭교도들은 그날 대규모의 신교도 학살을 한다. 1914년 현재. 가난한 젊은 청년은 공장에 다니면서 아내와 살고 있다. 공장에 파업이 일어나고 이에 연루되어 해고당한다. 이제 낯선 곳에서 먹고 살기위해 애쓰던 청년은 그만 범죄조직과 얽혀든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의 젊은 아내가 가련하게 애를 쓴다. 
 

이제까지의 영화들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서사를 가지게 되면 차례로 진행하였다. 그리피스는 야심적으로 이 네 개의 시대를 번갈아 오가는 구조로 재구성하였다. 다른 영화들이 이 쇼트와 저 쇼트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리피스는 영화 전체를 (아직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시간의 몽타주의 천장 벽화처럼 만들었다. 시간은 자유로이 여기서 저기로, 그리고 저기서 거기로, 그렇게 이동하면서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를 펼쳐보였다. 아놀드 하우저는 <불관용>을 본 다음 문학이 이제까지 이르려고 애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혹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화는 시작하였다, 라고 탄식하듯이 썼다. 심지어 1916년은 제임스 조이스가 아직 <율리시즈>를 쓰고 있었고(이 소설은 1922년에 출판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두 번째 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를 발표했을 따름이다. (1912년에 초고가 끝났을 뿐이었다) 그리피스는 서사 전체의 시간, 차라리 인류의 역사 전체를 그렇게 잘게 쪼개놓은 다음 완전히 서사 바깥에 놓여있는 에피소드를 반복적으로 추가하였다. 릴리안 기쉬가 연기하는 어머니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어린 아기가 누워있는 요람을 흔드는 그 유명한 장면. (그래서 이제는 모든 영화교과서에서 문법처럼 인용되고 있는 장면) 그리피스는 여기서 우리에게 서로 다른 시대의 시간으로 산산 조각난 씬들을 하나의 고정점 아래 매듭을 만들어 새로운 질서를 세워 유기적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의 순간 중의 하나. 

하지만 <불관용>은 그리피스의 알리바이를 증명하지도 못했고, 동시에 미학적으로 대중적 승리를 맛보지도 못했다. 이 영화는 자기의 시대로부터 멀리 떠나왔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오락이 예술적인 목표를 향해 도약하는 새로운 도전을 참지 않았다. <불관용>은 대중들의 ‘인톨러런스’ 앞에서 거의 재난에 가까운 박스오피스를 마주했다. 
 

<불관용>의 가장 열렬한 관객은 예상치 않게도 (어쩌면 충분히 예상대로?) 볼쉐비키 혁명에 성공하고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가 필요했던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레닌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 역사의 ‘인톨러런스’로 읽어냈다. 그래서 <불관용>을 수입하여 러시아 전역에 대대적인 개봉을 했으며, 더 나아가 그리피스에게 새로운 소비에트 영화산업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리피스는 이 자리를 거절했다. 나는 거절의 과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이 제안을 수락하고 그리피스가 소비에트에 갔다면, 그래서 젊은 제자들, 에이젠쉬테인, 푸도프킨, 지가 베르토프, 미하일 롬, 도브첸코, 보리스 바르넷을 가르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십년 후에 <전함 포템킨>을 보는 그리피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사의 순간들의 우연이 만들어내는 별자리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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