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푀이야드의 연쇄극 <흡혈귀 강도단>의 첫 번째 영화 <잘려진 머리>가 파리에서 개봉하다  1915년 11월 13일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9-06-18조회 8,873

그리피스가 도착하긴 했지만 영화는 아직 짧은 단편영화의 상영시간 길이로 만들어지고 있었고 그게 성공하면 그걸 마치 연속극처럼 이어가는 연쇄극(Serial films)의 형식을 산업은 선호하고 있었고 대중들도 사랑했다. 그건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보였다. 극장에는 세 가지 형식의 프로그램 모델이 공존하게 되었다. 여러 편의 서로 상관없는 단편영화들을 묶은 프로그램. 성공적인 연쇄극 영화를 중심으로 다른 단편영화들을 함께 상영하는 동시상영의 프로그램. 그리고 한 편의 장편영화. 상영시간이라는 문제는 영화사에서 생각보다 꽤 까다로운 주제이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며, 미학의 문제이며, 영화라는 제도에 관한 학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사법은 상영시간에 관여하지 않았다. 프랑스 고몽영화사는 이 형식이 시장에서의 좀 더 안정적인 성공을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루이 푀이야드는 이때 영화에 도착했다. 

아마도 연쇄극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시네아스트는 루이 푀이야드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의 바람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결혼을 하면서 중단되었다. 여전히 글 쓰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루이 푀이야드는 저널리스트가 되려고 했다. 그때 신문은 세상의 소식을 한 지면에 모으는 장소였고, 사람들은 거기서 정보를 얻고 세상의 사건을 알게 되었다. 1902년 파리에 온 그는 아무 것도 잘 되지 않았고, 글재주가 있었던 그에게 1905년 시나리오 제안이 들어왔다. 그런 다음 고몽영화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 영화는 복잡한 테크닉과 영화문법을 요구하지 않았다. 현장을 지켜보던 루이 푀이야드는 그 이듬해부터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루이 푀이야드
 
루이 푀이야드는 자신의 연출방법의 경제학을 발명했다. 소설을 쓰려고 했던 그는 시나리오에서 전체 씬을 쓴 다음 구체적인 디테일은 배우에게 맡겼다. 아마도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의 대사는 나중에 편집하면서 자막으로 작업해도 시간적으로 충분했다. 루이 푀이야드는 무성영화 초기의 연극적 거리와 깊이를 유지하는 고정된 화면의 롱 테이크를 받아들이면서 그 앞에서 배우들의 동선을 씬의 변화와 연결시켜 나갔다. 이 방법론으로 <판토마>를 성공시킨 루이 푀이야드는 <흡혈귀 강도단(Les Vampires)>를 만들었다. 제목으로 오해하지 마실 것, 이 영화는 당신이 떠올릴지 모르는 ‘뱀파이어’와 아무 상관이 없다. 파리에서 신출귀몰하면서 공포로 몰아넣은 강도단 ‘흡혈귀’와 그들의 정체불명의 지도자인 이르마 벱(Iema Vep)의 이야기. 영화에서 현상범으로 이르마 벱을 보여주면서 이 이름이 강도단 ‘흡혈귀들(Vampires)’의 철자를 멋대로 뒤섞은 애너그램 임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루이 푀이야드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단순하게 시작한다. 저널리스트인 필립은 취재를 하다가 그만 ‘흡혈귀 강도단’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 이야기에 파리의 대중들은 이상할 정도로 매혹되었다. 고몽영화사는 연달아 후속편을 원했고 루이 푀이야드는 연재소설을 쓰듯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아마도 그때 루이 푀이야드는 마치 마감에 쫓기듯이 개봉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거의 초인적인 노력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능이 발휘되었음에 틀림없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풀려나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흡혈귀 강도단’은 파리 건물들의 미로와도 같은 건축구조 속에서 종종 동선은 미로처럼 이어지고 그 속에서 경찰들과 신비로운 추적을 벌인다. 게다가 수많은 장면들을 파리의 길거리에서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찍어나가면서 일차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의 음울하고 불안한 공기가 그대로 담겨졌다. 

<흡혈귀 강도단>은 모두 열 개의 연쇄극(Episodes)으로 이루어졌다. 제 1화 <잘려진 머리>(1915년 11월 13일 개봉, 상영시간 33분), 제 2화, <살해하는 반지>(1915년 11월 13일 같은 날, 15분), 제 3화 <붉은 암호>(1915년 12월 4일, 39분), 제 4화, <유령>(1916년 1월 7일, 30분), 제 5화 <죽은 자의 탈옥>(1916년 1월 28일, 35분), 제 6화 <최면을 거는 눈>(1916년 3월 24일, 54분), 제 7화 <사타나스>(1916년 4월 16일, 46분). 제 8화 <천둥의 주인>(1916년 5월 12일, 52분), 제 9화 <독살범>(1916년 6월 2일, 48분), 제 10화 <피로 물든 결혼식>(1916년 6월 30일, 60분) 
 
뮈지도라와 장만옥

여기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는 ‘흡혈귀 강도단’을 이끄는 지도자 이르마 벱을 연기하는 뮈지도라이다, ‘뮤즈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뮈지도라(Musidora)라는 예명을 지은 잔느 로끄는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와 페미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19세기에 태어나서(!) 연극배우가 되었다. 뮈지도라는 연극 무대에 섰고, 신비로운 눈 화장을 하고 부모에게 배운 대로 망설임 없는 발언을 하면서 순식간에 파리 문화에서 노동계급 운동의 아이콘이자 부르주아 문화의 팜므 파탈이 되었다. 그래서 <흡혈귀 강도단>에서 뮈지도라가 연기하는 이르바 벱과 그녀의 일당들이 부자들의 집을 털고, 종종 과격한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은 테러로 보였고, 경찰들을 골탕 먹이는 장면들은 사법과 싸우는 모습으로 읽히기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흡혈귀 강도단>이 담고 있는 신비로움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은 비평이 아니라 한 편의 영화일 것이다. 비평가로 시작해서 감독이 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1996년 <흡혈귀 강도단>에 오마주를 바치는 영화 <이르마 벱>을 찍었다. 놀랍게도 뮈지도라가 한 역할을 여기서 홍콩배우 장만옥이 한다. 그때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장만옥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의 신비로운 감정으로 검은 라텍스 복장을 하고 파리의 옥상에 올라가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장만옥을 찍었다. 몇몇 장면에서 맛보는 설명하기 힘든 황홀감. 그렇게 영화사의 순간들은 섬광처럼 오가고 또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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